<보길도에서 보내는 편지> 이름 없는 것들의 소중함

등록 2001.03.07 16:21수정 2001.03.08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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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리에 갈 때면 나는 늘 아스팔트길을 놔두고 비포장의 오솔길을 따라 갑니다.
들에는 벌써 푸른빛이 완연합니다.
보리도 한뼘 이상은 컸습니다.
지난 겨울 이 섬의 농사는 어려웠습니다.
제값을 받지 못해 내다 팔지 못한 월동 배추들이 아직도 밭마다 그대로 서 있습니다.
바다 농사 또한 힘들었지요.
눈이 많이 와서 김양식장엔 흉년이 들었고 지금은 다들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다.

부용리 마을 회관 앞을 지나 낙서재 방향으로 접어듭니다.
어쨌거나 부용리 들에는 이미 봄이 시작됐습니다.
고달팠던 겨울의 기억을 털고 마을 사람들은 다시 봄 농사 지을 밭 갈고, 마늘밭에 지심 매고, 보리밭에 비료 주느라 바쁘게 움직입니다.


할머니 몇 분은 벌써 햇쑥을 캐러 나왔습니다.
이 먼 섬에서 나는 저 쑥이 중간수집상들의 손을 거쳐 내일 아침이면 가락시장까지 올라가고 서울 사람들의 밥상에도 오를 것입니다.
나도 쑥을 뜯어다 쑥차를 만들 때가 왔습니다.

도시 근방이면 나물로 캐다 팔았을 곰부레도 들마다 지천이지만 뜯는 사람이 없어 모두가 염소들 차지입니다.
궁궁이, 솜나물, 쇠비름, 명아주, 달래, 꿀풀, 둥굴레, 참나물, 수없이 많은 풀들이 산과 들 여기 저기서 삐쭉삐쭉 고개를 쳐들고 솟아나고 있습니다.

언젠가 그대는 도시에서 자라 풀과 나무와 새들의 이름을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고 부끄러워하셨지요.
하지만 무엇이 부끄러운가요.
우리가 낯선 사람의 이름을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듯이
낯선 풀과 낯선 나무와 낯선 새들의 이름을 모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요.

정작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우리가 그들의 이름을 알게 된 후에도 여전히 그들을 함부로 대한다는 점이지요.
이름을 알고 모르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름 있고 없고도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이름이 있다고 더 귀하고 없다고 천하지도 않습니다.
이름 아는 것은 아는 대로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이름 있는 것은 있는 대로 없는 것은 없는 대로 천지간의 사물은 무엇이나 다 소중하며 존중받아야 합니다.

누구는 이름 없는 풀들, 이름 없는 나무들이라고 하면 안된다고 가르칩니다.
각각의 사물들마다 이름이 있으니 이름을 불러 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궁궁이에게 우리가 궁궁이라고 부르고 가마귀쪽나무에게 가마귀쪽나무라고 부르는 것이 궁궁이와 가마귀쪽나무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사물들에게 이름을 부쳐 부르는 것은 모두가 인간의 이익을 위한 분별심에서 그러는 것일 뿐 사물들을 위한 것은 아닐 테니 말이지요.


적자산 오르는 길에 감탕나무, 녹나무, 비자나무, 동백나무, 잣밤나무, 섬회양목, 참느릅나무, 후박나무, 호랑가시나무, 우묵사스레피나무, 꾸지뽕나무들 늘 푸른 잎이 햇살에 반짝입니다.

그러나 이 길에는 내가 이름 아는 나무들보다 이름 모르는 나무들이 더 많습니다.
이름 모를 나무들 위로 이름 모를 새들이 부지런히 먹이를 찾아 날아가고 날아옵니다.
그들도 나의 이름을 모르겠지요.
서로 이름 모르는 나무와 새들과 풀들과 벌레와 사람이 지나가는 길에 반갑게 만나 인사를 건네며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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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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