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종의 <유럽기행> 프랑스 - 2

등록 2001.05.14 11:39수정 2001.05.14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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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숙박지인 생 말로는 이러한 군사적 긴장이 역사적 유물로 남아 있는 곳이다. 생 말로 성의 모습은 완벽한 군사 요새다. 웅장한 성의 둘레는 4km에 이른다. 왜 이렇게 큰 성이 한적한 바닷가에 세워졌을까. 생 말로 성의 역사는 한마디로 프랑스의 해외 진출사와 일치한다. 성벽을 타고 한시간쯤 산책할 수 있게 돼 있는 길을 따라가니 중간에 자크 까르티에의 기념비를 볼 수 있었다.

카르티에 시계의 카르티에가 아닌 신대륙 탐험가 까르티에다. 이 자크 까르티에는 1534년 캐나다에 프랑스인의 거주지를 만들었으며 그곳에 짐승 가죽 무역과 대구 어업을 발전시킨 장본인으로 알려져 있다. 캐나다(Canada)라는 이름이 까르티에(Cartier)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게 프랑스쪽 설명이다. '캐나다 발견 450주년 기념, 캐나다국 트뤼도 수상의 참석하에 제막하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캐나다와 프랑스, 생 말로에 와서 현대 국제정치의 한 단면을 발견하니 헌책 속에 숨겨놨던 10만원짜리 수표를 찾은 기분이 들었다. 캐나다는 알다시피 미국 독립 전쟁중 영국 지지파들이 미국에서 대량 이주해 국가로서 틀을 잡았고 상당기간 영국에 충성해온 나라다. 그러나 거기에도 프랑스계가 왕성하게 살고 있다. 퀴벡, 몬트리올 등이 대표적이다.

프랑스계 퀴벡의 독립 논의도 여전히 활발하다. 그 캐나다와 프랑스의 연고를 보여주는 동상. 모르긴 몰라도 트뤼도라는 이름으로 보아 영국계보다는 프랑스계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이 동상은 전후 정황으로 보아 프랑스계 퀴벡 주민의 절대적 지지와 야당 지지자들의 도움으로 집권한 트뤼도가 수상 취임후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에 대한 보답 차원에서 자신들의 뿌리인 생 말로를 방문했고, 이에 생말로 시 정부도 호응한 결과 아닐까.

17세기에는 여기서 리오 데 자네이로까지 진출한 모험가도 있었다. 아르헨티나 앞바다에 있는 조그만 섬 포클랜드 제도, 현지 지명으로 말비나스도 생 말로 사람들이 개척한 땅이라는 뜻이다. 이쯤이면 생 말로에 왜 그처럼 철통같은 요새가 필요했는지 이해가 갔다.

생 말로는 바로 프랑스 '국영 해적'들의 본거지였다. 서양사에 등장하는 사략선(私掠船, Privateers)은 바로 국영 해적들의 배였다. 이들은 평화시에는 무역과 식민에 치중하고 전쟁시에는 적국의 배로부터 물자를 빼앗았다. 그 전쟁이라는 것도 결국은 식민지 경쟁의 결과물이고 보면 주된 적국도 짐작이 간다. 영국 해군이다. 선발 제국주의 국가요 해상력이 발달한 영국은 상선과 전함이 분명히 구분된 반면 프랑스는 그렇지 못했다. 해군력은 빈약했고 그 빈약함을 벌충하기 위한 방안으로 사략선이 활용됐다.

왕들은 사략선의 선장들이 바치는 금은보화를 즐기면서도 외교 분쟁과 경비 부담을 우려해 이 모험가들의 선단을 국가의 공식 함대로 인정하는 것은 주저했다. 모험가들과 국왕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절충책으로 사략선이 등장한 것이다. 루이 14세는 한때 이들 모험가들을 앞세워 신대륙 경영에 적극 나섰으나 결국 공업력의 차이와 유럽 대륙에서의 전쟁에 몰두한 결과 식민지 경쟁에서 지고 말았다. 미국의 루이지애나라는 이름만 남긴 채. '루이의 땅'이라는 이름의 루이지애나는 루이 16세 때 신생 미국에 팔렸다.

어찌 됐든 역사상에 승자로 기록되지 못한 프랑스 국영 해적들이지만 돈은 많이 벌어 그 돈으로 생 말로에 난공불락의 성과 멋진 주택을 지었다. 파리 사람들조차 감탄해 이 호화 주택의 형식을 말론니에라고 불렀다는 설명이다.


생 말로에서 우리 가족은 도심 외곽의 별 두 개 짜리 이비스 호텔에 묵었다. 하루밤 260프랑(1프랑은 180원정도)였다. 첫날밤이라 정신없이 자고 이튿날 일어나 보니 호텔 바로 앞에 대형 양판점인 까르푸가 있었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은근히 신경 쓰인 게 예산이었는데 바로 앞의 까르푸를 보니 반가왔다. 음료수와 빵 등을 살 요량으로 들렸다. 가격은 환상적이었다. 바게트 빵에 치즈, 햄, 야채를 끼워 넣은, 서양 사람들이 점심 대용으로 우물우물 먹는 길다란 빵이 불과 18프랑이었고 생수 1.5리터 한 병에 6프랑이었다 (프랑스의 지난해 국민 1인당 평균 소득은 한국의 3배에 가깝다. 따라서 생수 한 병에 6프랑이라면 한국 기준으로는 300원 정도에 해당한다).

도심 외곽의 고속도로 인터체인지 주변에 중저가 호텔이 여러 개 모여 있고, 그 중심에 까르푸나 오샹(Auchan) 같은 대형 양판점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나중에 알고 보니 프랑스식 부도심(副都心) 개발 계획의 전형이었다.


생 말로를 떠나 남으로 두 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곳은 낭트. 프랑스 남서부로 가는 관문이다. 낭트는 아름다운 르와르 강의 하구에 있는 인구 50만의 커다란 도시이다. 르와르 강은 알프스에서 발원해 1천여 킬로미터를 달려 대서양으로 들어가기 직전 긴 여정에 마침표를 찍듯 낭트를 낳았다.

낭트가 유명한 것은 아무래도 1598년 프랑스 왕 앙리 4세가 위그노, 즉 프랑스의 신교도에게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 낭트의 칙령을 발표한 것일 게다. 신교도와 구교도에게 동등한 권리를 인정하는 93개 조항의 이 문서는 일부 조항이 비밀에 부쳐진 채 발표됐다.
왜 왕의 칙령이 일부는 비밀로 발표되었을까. 낭트의 칙령을 둘러싼 스토리는 신과 신앙에 대한 인간의 집착을 보여준다. 거슬러 올라가면 이런 이야기다.

루터가 독일에서 종교개혁을 부르짖자 프랑스에서는 칼빈이 나왔다. 칼빈 계통의 프랑스 신교도, 즉 위그노는 낭트 같은 남서부 지방에서 강했다. 왜 그랬을까. 중세 유럽에 있어 교황권은 왕권과 더불어 또 다른 정치적 권위였다. 따라서 왕권이 확립돼 있는 수도 근방보다는 낭트 같은 주변부에서 주교와 사제들의 '횡포'가 심했고, 백성들은 반사작용으로 초기 기독교의 소박함을 열망했다. 프랑스에서는 브레타뉴, 아키텐 지방 같은 곳이다. 이 지역민들은 캘빈파의 도래 이전에도 알비이단파 같은 원시 기독교에 더욱 가까운 종파를 믿었다.

고갱의 대표작 중 하나인 '황색의 그리스도'는 이러한 브레타뉴 사람들의 소박한 삶과 신앙을 회화로 그려낸 것이다. 황금빛 휘황찬란함이 아닌 우울한 황색의 거친 터치로 그려진,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에게서 우리는 이 지역 주민의 신앙심을 읽을 수 있다. 고갱은 브레타뉴 지방에 10여년 살며 황색의 그리스도를 포함한 상당수 작품을 창작했다. 고갱이 조국 프랑스를 떠나고자 했을 때 굳이 타히티를 선택한 것도 원시적인 것, 소박한 것에 대한 동경 때문이었으리라.

나는 낭트와 브레타뉴의 종교사를 듣고 우리 나라에서도 변방으로 갈수록, 또는 농업적 수탈이 심한 지역일수록 불교 중에서도 내세(來世) 지향적인 미륵신앙이 번창했던 게 생각났다. 철원에 도읍한 궁예가 대항 종교로서 미륵신앙에 천착하고, 전라북도 익산과 김제 지방에 미륵신앙의 흔적이 많은 것은 무슨 연유일까. 원시 기독교에 대한 선호와 내세 지향적 미륵신앙과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종교학자가 아니기에 잘 모르나 지배 계층 중심의 화려한 종교에 대한 반발이 아닐까 짐작해볼 뿐이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종교 개혁기 이후의 새로운 기독교, 노동의 신성함과 검소한 삶을 강조한 캘비니즘은 빗물이 마른 모래에 흡수되듯 남서 프랑스에서 크게 번창했다. 수도 파리에서는 상공업자와 수공업자 같은 돈은 벌었으되 사회적 지위는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계층에서 위그노가 크게 세를 얻었다. 그러나 새로운 세력은 그것이 정치든, 종교든, 심지어 조그만 직장에서의 새로운 움직임이든 항상 저항을 받는 법.

낭트의 칙령이 신구교간 화해와 관용을 메시지로 한다면 그 앞에는 당연히 갈등과 충돌의 역사가 있다. 칙령 발표 26년전인 1572년 파리에서는 어느 날 밤 2만여 명의 신교도가 구교도 귀족에 의해 대량 학살되었다. 어린 왕 샤를르 9세의 뒤에서 수렴청정을 하던 카트린 드 메디치의 묵인, 또는 공모가 있었다는 게 프랑스 역사가들의 정설이다. 위그노파 제후의 결혼식 참석차 들렀던 지방의 위그노까지 참변을 당하자 프랑스 전국의 민심은 날로 흉흉해졌다. 이 학살은 성 바르돌로메의 축일날 발생했다고 해서 성 바르톨로메의 대학살이다. 이후 30여 년 가까이 신교도와 구교도는 프랑스 전국에서 죽고 죽이는 살육전을 계속 했다. 프랑스의 왕조 교체를 바라는 영국은 위그노를, 카톨릭 신앙의 철벽 요새인 스페인과 이태리는 구교도를 지원해 국제적인 분쟁으로 비화됐다.

이 혼란은 발루아 왕조의 마지막 왕 앙리 3세가 암살당하고 왕통이 끊기면서 새로이 부르봉 가의 앙리 4세가 취임하면서 가닥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는 신교도의 지도자였으나 통치의 안정을 위해 즉위 6년째 되는 해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아울러 종교적 광신이 빚는 비극에 염증을 내고 새로이 왕권의 강화를 통해 질서를 회복하고자 하는 그룹, 프랑스 역사에서 폴리티크라 부르는 그룹을 중점 발탁했다. 이들이 조정의 중심에 서고, 왕이 구교로 개종한 조치로 인해 왕권은 제자리를 잡는다. 왕은 이어 신교도의 중심지인 낭트에 가서 신교도와 구교도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한다는 낭트의 칙령을 발표했다. 이 부르봉 왕조가 훗날 루이 14세, 16세로 이어지는 프랑스 최강의 왕조이자 마지막 왕조이다.

그저 그런 남의 나라 종교전쟁 이야기지만 다소 무리를 해서 21세기초 한국 버전을 도입하면 어떨까. 보수적 기조아래 남북 통일을 맞은 한국은 어느 날 심각한 지역갈등과 보혁(保革) 갈등을 맞는다. 혁신파는 이북과 호남, 농민, 소상인 같은 소외 지역, 소외 계층에서 지지자를 늘려 나가는 반면 수도권의 정치-경제적 기득권 계층과 영남 지역 등은 여전히 보수적 가치관에 충실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서울에서는 집권층에 의해 혁신파 대 탄압이 벌어지고. 싸움은 중앙과 지방, 구체적으로는 기득권적 수도권-영남 연합과 혁신적 호남-총청-이북 연합의 갈등으로 발전한다.

중국은 혁신 쪽을, 미국은 보수 쪽을 지원한다. 어찌 어찌해서 보수 기득권 세력이 자중지란 끝에 단일 후보를 내지 못하자 혁신파 대통령이 중부권의 지원 하에 당선돼 지역간 균형 인사를 실시한다. 그는 고민 끝에 국민 화합을 위해 자신이 과거의 혁신적 정책에서 벗어나 '개혁적 보수' 노선의 정책을 펼쳐나갈 것임을 천명함 다음 광주나 평양에 가서 당신들에게도 동등한 기회와 권리를 보장하겠다, 그러니 이제 과거 서러운 역사는 잊어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그는 아직 힘이 약한 대통령이기에 보수 기득권 쪽의 반발을 우려해 일부 관용 조치는 비밀에 부친 채 발표해야 한다.

한국판 버전에서 짐작할 수 있듯 프랑스의 종교 분쟁도 낭트의 칙령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이후에도 여러 번 반전을 거듭하다가 왕권과 민권의 대결로 주제가 바뀌는 프랑스 혁명 이후에야 종교의 자유가 보편화되었다.

낭트에서 또 하나 볼만한 곳은 쥘 베르느 박물관이다. 고향 사람들은 그를 줄 베릉이라고 발음한다. 낭트는 강 하구의 삼각주형 섬과 강의 양안이 합쳐져 건설된 도시인데 이 소설가겸 과학자는 삼각주가 끝나는 곳에서 강의 합수를 바라보며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지키고 있다. 우리에게는 '80일간의 세계일주', '해저 2만리' 같은 과학 소설로 유명하다. 그는 소설 속에서 이미 19세기말에 원자력 잠수함의 출현을 예고했다. 비행기의 원리를 그림으로 그려낸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외부로부터의 보급이 없이도 1년 가까이 혼자 심해를 항해할 수 있는 핵잠수함을 그림으로 그려냈다. 프랑스 사람의 과학기술적 재능을 엿볼 수 있는 표상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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