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치가는 처음 피렌체의 의사였다. 메디치라는 이름은 바로 의료를 의미하는 메디컬(medical) 또는 의약이라는 뜻의 메디신(medicine)에서 유래됐다. 의료 행위로 이름을 날리자 바로 금융업에 손을 댔고 여기서 번 돈으로 피렌체의 실질적 군주가 됐다. 이 그늘에서 다빈치가 그림을 그렸고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썼다. 이른바 이태리 르네상스의 가장 중요한 축인 피렌체의 영광은 메디치 가가 만든 것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시기 프랑스와 이태리의 관계도 흥미롭다. 쉬농소 성에서 벽에 걸린 그림중 당시 국왕의 식사 장면을 유심히 보면 식탁에 나이프만 있고 포크가 없다. 식사중 포크를 사용하는 습관은 이태리에서 시집온 메디치 가의 여인들이 전래시킨 것이라고 한다. 훗날 전 유럽 상류층 사회의 꿈의 궁전인 프랑스 왕실도 까뜨린느가 시집올 무렵에는 야만의 땅이었다는 반증이다.
루브르 박물관에 가면 '1600년 마르세이유에 도착하는 마리아 데 메디치'의 모습을 그린 루벤스의 그림이 있다. 전형적인 궁정화가인 루벤스는 왕과 왕비들의 비위를 맞추면서도 후세에 예술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당시 정계의 막후 실력자 마리아 데 메디치를 모델로 해서 가로 3m 세로 4m의 대형 연작 그림을 무려 21점이나 그렸다. 이 숫자는 아마 마리아 데 메디치의 힘을 읽을 수 있는 척도이리라.
다시 쉬농소 성으로 돌아오면 이 성을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지하실의 부엌을 꼭 방문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우선 한국의 방짜 그릇 비슷한 구리에 주석을 섞은 이 그릇 들을 볼 수 있다. 처음 보는 사람은 유기와 착각할 정도다. 우리의 방짜 그릇은 11명의 잘 훈련된 유기장이가 한 조로 돼 함께 구릿물을 두드려 만들었는데 프랑스의 이 그릇들도 그랬을까. 이 그릇들도 균일한 밀도를 얻기 위해 타악기 연주처럼 일체감이 필요했고 그래서 조용한 밤에 만들었을까. 생각은 생각의 꼬리를 물고 생각난다. 쉬농소 성 부엌의 한켠에는 400년전의 빵 굽는 오븐, 작두를 이용해 물을 공급받는 수도꼭지가 있다. 한쪽에는 저울이 있는데 1kg, 5kg의 추가 달려 있어 대혁명 이후에도 이 성이 실제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미터법은 대혁명 이후 프랑스가 공식 채택하고 19세기 국제 협약에 의해 보급되었다. 실제 대혁명기와 2차 대전 때 이 성은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야전병원으로 활용되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고기 굽는 화덕이다. 바비큐할 때 쓰이는 쇠꼬챙이 끝에 밧줄과 도르래, 물동이가 연결돼 있길래 물을 푸는 기구인줄 알았더니 고기가 익으며 지방질이 연소, 무게가 줄어드는 정도를 측정하기 위한 도구라는 설명이다. 나중에 파리의 한국인 민박집 사빈이네 집의 사장님으로부터 설명을 듣고 새삼 감탄했다. 고기가 다 익으면 저절로 경보를 발하는 장치였던 것이다.
르와르 지방에는 이 성 말고도 수십 개의 성이 있다. 도로 곳곳에 샤토(성)의 존재를 알리는 안내판이 즐비하다. 르와르에 유독 성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프랑스는 유럽 국가중 가장 봉건주의, 국왕과 기사, 성주와 농민의 관계가 발달한 나라이지만, 그래서 대혁명 직전까지 승려, 귀족, 평민의 3부회가 소집된 나라였지만 르와르에 특히 성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르와르는 큰 강이 있고 이 강에서 유래한 큰 평야가 있어 프랑스의 정원이라는 아름다운 별칭을 갖고 있다. 한마디로 농업국가 프랑스에서도 가장 곡창지대다. 프랑스 화이트 와인의 거의 40%가 이 일대에서 생산된다.
이처럼 농업이 발달하다 보니 경제력이 왕성했고 그 경제력을 바탕으로 대토지 소유자이자 성주인 귀족들은 멋지고 근사한 성을 지었던 것이다. 이 생각을 하자 르와르 일대의 고성을 무대로 찍은 영화가 하나 기억났다. 소싯적 보았던 '추상(追想)'이라는 1970년대 영화. 영어 원제는 The Old Gun 이었다. 로미 슈나이더와 필립 느와레 라는 이름이 떠오른다. 스토리는 2차대전 말기 프랑스의 옛 고성에 독일군이 침입, 이 성을 사령부 비슷하게 사용하고 성주인 남자는 부인과 아이들을 독일군에게 잃고 혼자 남아 독일군에 협력하는 척 하며 하나씩 죽여나간다. 개인적 레지스탕스인 셈이다.
남자는 밤마다 자기에게 허용된 좁은 방에서 부인, 아이들과 함께 해변에서 찍은 흑백 필름, 1930년대쯤 찍은 자작 영화를 보며 복수의 칼을 간다. 화면이 컬러와 흑백을 오갈 때마다 영화 속의 현실도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당시로서는 실험적 기법을 썼던 것 같다. 남자의 우울한 표정,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전시(戰時)를 살게 된 데 대한 염오감, 어쨌든 살인을 일삼고 있는 자신에 대한 환멸감, 헤어진 가족에 대한 그리움에서 바탕한 우울함 등 복합적 감정이 함축된 표정이었다. 한편으로 남자는 때때로 복수를 향한 단호하고도 냉혹한 표정을 지어 관객들을 도망치지 못하게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 만이 아는 비밀통로를 통해 안방, 즉 사령관실에 잠입한 주인공은 사제 화염방사기로 독일군 사령관을 태워 죽인다. 비밀 통로의 끝은 부인의 화장거울, 사령관은 무심코 거울을 바라보다가 거울이 녹자 놀라다가 그 속에서 튀어나온 화염에 죽어간다.
프랑스 사람들이 올레앙이라고 부르는 오를레앙에서는, 역시 존나 다르크 라고 부르는 잔 다르크(John of Arc)를 보았다. 영국과의 백년전쟁 당시 누란의 위기에 처한 프랑스를 구한 양치기 소녀 잔 다르크는 역시 당당했다. 그리고 알고 보니 소녀는 오를레앙 출신이 아닌 동북부의 로레인 지방 출신이었다. 생 크르와 성당에는 잔 다르크의 생애를 10장의 커다란 그림으로 장식한 스테인드 글라스가 있다. 오를레앙과 파리 중간에 있는 샤르트르의 대성당 스테인드 글라스 그림도 유명하지만 내 눈에는 생 크르와 성당의 잔 다르크 그림이 더 좋아 보였다.
프랑스는 알려진 대로 우파와 좌파의 균형이 잘 잡힌 나라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프랑스 사람을 만나면 잔 다르크를 좋아한다거나 존경한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대체로 좌파가 많은 프랑스 지식인들이 이 말을 들으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우파로 본다는 이야기를 홍세화 님의 글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이를테면 잔 다르크를 좋아하는 너는 우익 국가주의자라는 뉘앙스라고 했다. 그럼에도 나는 잔 다르크는 영웅이라고 생각한다. 설령 이 때문에 우익이라는 평가를 받을지라도.
프랑스 지식인들은 우익을 덜 떨어진 다소 비문명적인 사람처럼 묘사한다. 개인의 모든 자유, 사랑할 자유, 생각할 자유, 표현할 자유를 존중한다. 우익은 이러한 개인의 자유보다 국가와 집단을 존중하는, 개인적 생각을 미처 못 가진 사람 취급한다. 그러나 내가 보름간의 주마간산식 프랑스 기행에서 가장 많이 본 것은 역설적으로 각종 문화재에 어려 있는 '영웅 대망론'이었다. 프랑스의 문화 유산, 역사 유적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은 세 사람이다. 루이 14세, 나폴레옹, 드골이다. 프랑스에 온 사람이면 누구나 나폴레옹의 개선문을 보고, 루이 14세의 베르사이유 궁전을 찾아가고 드골의 이야기를 듣는다. 모두 프랑스의 영광과 자존심을 세운 인물들이다.
이렇게 말하면 동양의 2류국가에서 온 관광객의 이야기라고 할지 모른다. 천만에, 각종 관광 안내서와 유인물 또한 이 세 사람으로 도배질 돼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루브르 박물관도 결국은 나폴레옹을 비롯한 여러 정복자들이 '주워온' 유물들이 태반이다. 지금 유럽에서 유럽 연합, EU통합에 가장 앞장서는 나라도 독일과 프랑스이다. 그 유럽 연합의 모토는 '유럽인에 의한 유럽', '유럽인을 위한 유럽'이다.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다. 여기에 '프랑스의 영광'을 보태면 바로 드골의 주장이다. 프랑스 지식인들이 정말 우익을 무시한다면 이는 일면 위선적인 태도 아닐까. 프랑스의 영광은 나에게 주어진 당연한 권리이고 나는 그 안에서 개인의 자유를 만끽하겠노라는. 물론 최근에는 외국인 추방을 강조하는 극우파 정당이 개칠을 하고 있지만.
잔 다르크를 향한 상념을 마칠 때쯤 우리 가족은 파리에 입성했다. 파리, 미국의 비행사 린드버그는 1930년대 사상 최초의 대서양 횡단 비행을 마치고 유럽에 도착해 이렇게 외쳤다던가. 저것이 파리의 등불이다고. 파리의 등불보다는 험악한 교통 지옥이 먼저 다가왔다. 파리의 외곽 순환도로 뻬리뻬리는 한번 들어서자 시간당 10km 미만의 거북이걸음으로 화장실이 급한 두 딸 아이를 한시간 반 이상 괴롭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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