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는 크다. 파리만의 인구는 230만 안팎. 그러나 우리의 수도권 개념을 도입하면 대(大) 파리의 인구는 900만명이 넘는다. 프랑스 인구의 15%쯤이 사는 셈이다.
4700만 인구중 1천만명(인구의 20%안팎)이 서울에, 1500만명(30%안팎) 쯤이 수도권에 몰려 사는 한국에 비교하면 수도의 비중은 다소 작다. 그러나 파리의 힘은 서울의 힘에 못지 않다. 아니 국가 전체에 미치는 영향력은 더 크다고도 할 수 있다.
파리의 역사는 바로 지난 1천년 동안 프랑스의 역사이며, 중앙이 지방을 끊임없이 정복해간 역사이다. 프랑스의 중앙 왕조들은 프랑크 왕조, 메로빙거 왕조(우리의 고려 개국시기 쯤에 프랑스를 지배한 왕조) 때부터 주변부를 끊임없이 복속시켜 지금의 프랑스를 만들어나간 것이다.
한때 샤를마뉴 대제가 현재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를 함께 아우르던 시기가 있었지만 이를 국왕 직할의 통일 왕국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지방에서는 귀족과 영주의 힘이 강했다. 이들은 형식상 중앙정부에 순응할 뿐 외국의 왕, 내부의 다른 대귀족과 연대해 수시로 반란의 창끝을 들이댔던 것이다.
예컨대 개성과 경기 일부만을 직접 통치하던 왕건의 고려가 그후 천년에 걸쳐 한반도 전역을 계속해서 국왕과 중앙 정부의 직할지로 확장시켜 나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알퐁스 도데의 소설 '마지막 수업'을 기억하는지. 주인공 소년은 어느 날 느지막이 학교에 갔다가 이제 더 이상 프랑스어를 배우지 않아도 된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의아해하다가 나중에야 그 의미를 깨닫고 아쉬워한다.
소년이 살던 프랑스 동북부의 알사스와 로렌 지방은 루이 14세, 16세 같은 루이 왕조 말기에야 처음으로 프랑스에 편입됐다가 1870년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함으로써 일시 독일 땅이 된다. 도데의 소설은 그 즈음을 묘사한 것이다.
남프랑스에 있는 천혜의 해안도시 니스, 칸느 영화제의 칸느로부터 20분 거리에 있는 니스는 나폴레옹 3세 때인 1860년에야 프랑스 땅이 되었다. 인접한 대국으로서 이탈리아의 통일을 허락해주는 대가로 할양받은 지역이 바로 니스 인근이다. 니스는 마지막으로 프랑스 본토에 병합된 땅이다.
그런가 하면 프랑스 왕실과 프랑스 귀족이 세운 영국 왕실은 프랑스 영토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서북부 지방, 노르만디, 칼레 등의 소유권을 놓고 14세기부터 15세기까지 백년전쟁을 벌였다. 이 모든 정복전쟁, 확장 전쟁을 수행한 주체는 파리의 왕과 시민, 그리고 귀족들이었다. 이들의 부지런함과 확장 욕구가 오늘의 프랑스의 영토적 지형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정복과 복속은 탁월한 효율성을 가진 것이었다. 유럽의 다른 나라가 대부분 현대에 이르러 지방의 대두, 변경 정치 권력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음에도 유독 프랑스만 이를 잘 면하고 있다. 런던의 중앙정부가 스코틀랜드와 웨일즈의 도전에, 마드리드의 중앙정부가 바스크와 카딸란(바르셀로나)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음에도 파리의 중앙정부는 큰 문제없이 강력한 중앙집권국가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현대 프랑스라고 그러한 분권적, 지방적 세력의 도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끔 외신에서 보는 프랑스 농민의 고속도로, 철도 점거 시위는 표면상 농업에 대한 중앙정부의 지원을 촉구하는 것이지만 일면 지방에 대한 중앙의 경제적 침탈을 힐난하는 것이기도 하다. 80년대 사회당 출신 미테랑 대통령의 집권은 파리의 도시 노동자와 지방의 소외 지역이 연대해 집권에 성공한, 프랑스판 ‘소외 계층+소외지역 연합’의 승리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프랑스에서 영국이나 스페인처럼 잘 조직된 지방 정치세력의 등장과 지방의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듣기 어렵다. 그만큼 파리의 정치 엘리트들이 뛰어난 때문일까. 파리가 지방을 잘 아우르는 비결로는 중앙 정치 엘리트의 우수한 능력, 기회균등의 통치 엘리트 충원, 학문과 문화 예술 방면에서의 파리의 확고한 우위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프랑스는 고등문관시험을 통해 각지의 수재들에게 균등한 행정참여의 기회를 부여하고, 파리 대학은 프랑스의 대표적 학문 연구기관으로 13세기부터 존속해왔다.
여기에 영국과의 도버 해협, 스페인과의 피레네 산맥, 이탈리아와의 알프스 산맥 같은 확고한 자연적 국경도 한몫 한다. 이러한 지형적, 정치, 사회적 조건에 보태 18세기 이후 중앙정부가 공급해온 ‘프랑스의 영광’이란 국가주의적 구호도 파리 중심의 지배체제를 지탱하는 주된 동력으로 보인다.
이러한 파리는 18세기 이후 문화와 예술, 혁명과 자유의 세계 수도로서 확실하게 기능하며 프랑스의 파리가 아닌 세계의 파리로 성큼 올라선다. 시민이 무능한 왕을 죽이고 국민의 정부를 만든 프랑스 혁명(1789), 그때로부터 근 150년간 파리는 전세계 자유주의자, 지식인들의 마음의 고향이었다.
유럽인들은 프랑스 또는 나폴레옹 군대에 저항하면서 한편으로 자유와 평등, 박애의 사상, 민족국가의 효용성을 프랑스로부터 배웠다. 18세기 루이 14세 궁정의 언어와 매너, 음식과 복식(服飾)이 유럽을 풍미한데 이어 19세기 프랑스 자유주의자, 공산주의자, 부르주아지들의 사상과 사고, 문화와 생활은 서구 모든 나라 같은 계층에게 배움의 대상이었다.
프랑스와 파리가 가장 빛을 발하던 시기는 그 중에서도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전반까지의 100여년 아닐까. 나는 그럴 수 있던 키워드로 공화정을 꼽고 싶다. 지금은 공화정이 발에 채일 정도로 흔하지만 당시는 달랐다.
당시의 프랑스는 신대륙의 미국과 남미의 몇몇 형식적 공화국을 제외하고 구대륙에서 유일하게 공화정을 실시한 대국이었다. 때로 루이 필립이나 나폴레옹 3세 같은 보수반동의 통치를 허용했으나 결국 제3공화국을 만들어내고 이를 지켜냈다.
세기말 한때 반동적 흐름이 대세를 이룬 적도 있었으나 드레퓌스 사건을 겪으며 그 예봉을 꺾었다. 이러한 전세의 역전을 만들어내고 공화국과 민주주의를 굳건히 지켜낸 것은 바로 파리의 지식인들이었다. 프랑스의 지성은 그래서 더욱 보배스럽다.
프랑스 지식인들이, 파리가 19세기 후반 정치적으로 좌초했으면 어찌 됐을까. 아마 전세계적으로 공화국과 민주주의의 보급은 훨씬 늦어졌을지 모른다. 프랑스가 공화국이지 않았다면 1차,2차 세계 대전 후 세계 각국은 공산 독재 외에 왕정이나 영국식 입헌 군주제를 더 많이 택했을 것이라고 감히 상상해본다. 특히 유럽에서는.
돌이켜 보면 프랑스의 삼색 깃발 국기에 담긴 자유 평등 박애의 이념에 얼마나 많은 유럽의 지성인들과 식민국가의 차세대 지도자들이 자국의 미래를 설계해보았던가. 좌파 계열만 보더라도 주은래, 모택동, 호치민, 부르기바 등이 모두 세기말에 프랑스에서 교육받았다.
파리가 민주 공화정의 세계 수도로 자리잡는 데에는 프랑스인 특유의 성격도 한몫 했다. 그들은 열정적이다. 19세기 파리는 늘 극적인 세계 톱 뉴스의 생산지였다. 1789년 대혁명 이후 1914년 1차 대전 발발기까지 유럽 정치 변화의 선봉에는 항상 프랑스가 있었다.
숱한 엎치락 뒤치락, 왕정 또는 제정 복귀와 공화정 재정립의 숨가쁜 소식에 유럽 다른 나라의 왕과 귀족, 민주 지도자들은 엇갈린 희비를 맛봐야 했다. 자유 민주주의자에게도, 공산주의자에게도, 보수 반동파에게도 파리와 프랑스는 빼앗길 수 없는 보루였고 세계 정세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지역이었다.
파리는 이처럼 19세기에 시작돼 20세기를 거쳐 지금도 살아 꿈틀대는 현대 문명의 원천이다. 파리가 선봉에 서서 민주를 위한 투쟁에 피흘린 결과 이제 인간은 권력의 부속품이 아닌 하나의 개체로서 존중되고, 과학은 시민의 보다 편한 생활을 지원하고, 예술과 문화는 종교와 권력의 금기와 구속에서 해방돼, 있는 그대로를 묘사하는 현대 문명이 확산됐다. 적어도 그 목표는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다. 사람을 위한 세상에 흘린 파리의 피를 생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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