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길 교수님, 지난 6월 27일자 <조선일보>에 쓰신 교수님의 글이 너무도 오묘하고 희한하고 재미있어서 벌써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그 각별한 인상이 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교수님의 글 제목이 「저 사람들이 제정신인가」였지요, 아마. 우선은 '신문 개혁'을 열망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두루 지목하는 그 제목부터가 하도 명료하고 준엄한 것이어서, 나는 지금도 깜짝 깜짝 놀라며 내 정신 상태를 점검해 보곤 하는데, 계속 얼떨떨한 가운데서도 교수님에 대한 측은한 생각이 너무도 명료하지 싶습니다.
정말로 '김동길 교수가 제정신일까?'라는 생각을 자꾸만 하게 되는데, 그것은 교수님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가 너무도 분명하고, 또 그 정도가 너무도 심각하고, 그리고 그것들이 슬프고 어처구니없으면서도 재미롭게도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교수님의 글이 지니고 있는 맹점들과 터무니없는 독단이며 미망(迷妄) 따위는 벌써 여러 사람이 조목조목 헤아리고 해부해서 밝은 햇살 아래 죄다 널어놓았으니 내가 뒤늦게 또 한번 마름질을 할 필요는 없고, 오늘은 그저 교수님에 대한 내 슬픈 심회나 한번 적어볼까 합니다.
나는 젊었을 적 교수님의 글을 많이 읽었습니다. 교수님의 저서들은 지금도 내 서가에 꽂혀서 자주 나와 눈맞춤을 하고 있습니다. 80년대 암울했던 5공 치하에서 살 때는 교수님의 글을 읽는 것도 내겐 큰 위안이었습니다. 천주교 성당에서 미사 시간에 주송을 하며 '영성체 후 묵상'을 할 때는 교수님의 저서 『한국 청년에게 고함』에서 읽은 감명 깊은 말들을 많이 사용을 하기도 했습니다.
70년대 말 유신 정권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서울 종로 5가 <기독교회관>에 모여 저녁에 집회를 갖곤 했었던 일을 기억하시나요? 처음엔 '목요기도회'였다가 '금요기도회'로 바뀌었지요, 아마.
하루는 김동길 교수님이 그 자리에 오셔서 강연을 해주셨습니다. 유신 정권에 의해 한때 영어(囹圄)의 몸이셨던 교수님은 그날도 교수님의 전공인 미국의 링컨 얘기를 하셨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여러 번 웃으며 참 재미있게, 감명 깊게 들었던 기억도…. 생각하면 참으로 아련하면서도 소중한 기억이지요.
80년대 말 민주화의 물결 속에서 교수님이 현실 정치판에 뛰어들었을 때도 나는 교수님의 그런 적극적인 현실 참여를 긍정적인 눈으로 보려고 했습니다. 정치 협잡꾼들 속에서 제발 추한 모습이 되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빌었습니다.
그러다가 교수님이 어느 정도 오염되고 남루해진 모습으로 정치판에서 퇴장을 했을 때는 그런 대로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교수님이 이제부터는 오로지 자신을 다시 정화시키고 힘껏 추스르며 사시게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교수님이 '멋진 노인'의 모습이기를 바랐습니다. 약간의 카이젤 수염에다가 빨간 나비 넥타이를 매고 텔레비전에 나타나시는 모습들을 보면서, 그렇게 젊게 사시는 '총각 노인'의 모습을 멋있게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무리 그래도 노인의 위치는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니, 제발이지 젊은이들의 사표(師表)가 되는 '존경받는 노인'의 자리에 잘 머무르게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랐습니다.
그것은 우리나라에 존경할 만한 노인들이 많지 않다는 내 인식의 작용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존경할 만한 노인층이 우리 국가 사회에 두텁게 형성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그리고 그것을 우리 나라의 불행의 한가지로 파악하고 있는 것은 내가 오래 전부터 고수하고 있는 생각입니다.
사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그것을 몹시 뼈아프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청년 시절부터 가졌던 그 생각이 50대 중반에 이른 지금까지도 거의 변함이 없다는 것은 실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사회의 목탁 구실을 하고 계시는 존경받는 어른들이 우리에게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도 계시고, 강원룡 목사님도 계시고, 청담 스님도 계시고, 강만길 선생님도 계십니다. 그외도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선생님'들이 여러 분 계십니다.
그렇지만 그 층은 여전히 두텁지 않습니다. 특히 정치 일선에서 활약했던 사람들 중에서 존경받는 노인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최대의 약점이고 비극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나는 김동길 교수님만이라도 자세가 꼿꼿한 멋진 노인이시기를 바랐습니다. 교수님이 한때나마 정치판을 섭렵했던 분이시니, 한때의 정치판 마름질에도 불구하고 사물에 대한 종합적인 판단력과 중심을 잃지 않는 무게 있는 노인의 한 전형적인 모습이 되시기를 정말이지 참으로 소망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그것을 누구에게서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대통령을 지냈다는 김영삼 씨에게서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수구적 보수의 틀거지 안에서 대통령 꿈에만 부풀어 있는 이회창 씨에게서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한때나마 존경했던 김동길 교수님에게서 노추(老醜)를 발견하는 내 심정은 너무도 무참합니다, 단순한 실망이 아닙니다. 교수님의 노추를 이번에 결정적으로 <조선일보>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는 데에 비참함은 더욱 가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참으로 교수님의 그것을 <조선일보>가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추하게 만드는 <조선일보>의 장기가 이번에 또 한번 여지없이 발휘된 셈입니다.
교수님이 <조선일보>에 쓰신 불후의 명작(?)이 될 「저 사람들이 제정신인가」를 읽은 날 그 글의 오묘함과 희한함을 음미하다가 번쩍 정신이 나서 제가 옛날 청년 시절에 썼던 글 하나를 찾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저의 그 글을 생각나게 만들어 주셔서 참 고맙습니다.
1984년에 천주교 대전교구보인 <대전주보>에 썼던 글입니다. 글 내용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서슬이 시퍼렇던 5공의 초창기였던 그 시절에는 그런 내용의 글은 교회 간행물 등에만 겨우 실릴 수가 있었습니다.
아무튼 그 글을 오늘 김동길 교수님께 한 글자도 고치지 않고 한번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바쁘시더라도 한번 읽어보시고, 청년 시절의 제게 좋은 감명을 주셨던 김동길 교수님의 지난 시절 모습을 스스로 회억하시면서, 뒤늦게라도 노추의 와중에서 한 발짝이라도 벗어날 수 있는 계기로 삼았으면 합니다.
<칼럼>
노인 공경에 대한 한가지 생각
지난 유신 독재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우리집에 본당 신부님을 비롯하여 여러 어른들과 회장님들이 모였다. 술과 음식을 들며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나누는 중에 지학순 주교님에 대한 얘기와 <정의구현사제단>의 활동에 관한 이야기도 나오게 되었다. 그러니 유신 체제의 옳고 그름에 관한 말들도 나오게 된 것은 당연지사―.
그런데 유신 체제가 부당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지금은 로마에 유학을 가 계시는 윤세병 신부님과 필자, 이렇게 두 사람 분이었다.
다른 교우들은 모두 우리 현실에는 (한국 사람들에게는) 유신 체제가 적합하다는 입장을 취하거나 중립적인, 또는 모호한 태도들을 취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윤 신부님과 필자는 여러 교우들을 상대로 논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도저히 해결이 날 수가 없는 논쟁이었지만….
그런데 그 토론 중에서 한 노인 회장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그저 우리 백성들은 정부만 믿고 따라가는 거여. 정부가 불로 들어가면 불로 따라 들어가고 물로 들어가면 물로 따라 들어가고, 그래야 허는 겨!"
나는 너무도 어이가 없었지만 잠시 후에, "정부를 위해 국민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국민을 위해 정부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하고 물었더니, "정부는 곧 국가여. 국가가 있어야 우리 국민이 살 수 있으니께 국민은 국가를 위하여 살아야 허는 겨!" 이렇게 노인 회장님은 서슴없이 대답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윤 신부님과 나는 현실적인 울울창창한 고립감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아득한 절벽 같은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지금 옛날의 얘기를 들추어 내서 노인 회장님의 그런 말씀을 논죄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그 노인 회장님과 우리 모든 어른님들이 자라나고 살아오신 시기와 교육 환경 등을 돌아보면서 그 한계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연민을 느끼는 사람들 중의 하나다. 내가 가지는 이런 류의 연민은 발전 지향적인 것으로써 우리 세대의 당연한 몫이라는 생각과 함께―
그건 그렇고, 나는 우리의 국가 사회가 존경할 만한 노인들을 많이 갖지 못한 것도 우리 시대의 불행한 빈곤 중의 하나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일본이나 중공, 자유중국 같은 나라들을 둘러보면 내 생각은 더욱 분명해진다. 우리와 같은 동양 문화권에 속해 있는 그 나라들은 우리처럼 경로 사상을 요란스럽게 떠벌리지 않아도 노인 공경 풍습과 노인의 권위가 우리보다 났다고 한다. 그 나라들에서는 노인들이 국가 경영권을 점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것은 신빙성을 갖는다. 사실 그 나라들은 노인들이 정치 지도권의 상층부를 대부분 장악하고서 경륜을 바탕으로 중후하게, 용의주도하게 나라를 이끌어 나간다.
나는 실로 그 나라들의 노인 정치와, 경륜을 바탕으로 한 정치력의 중후함에 부러움을 느낄 때가 많다.
같은 동양 문화권의 국가들 중에서 우리 나라만이 국가 경영권에서 노인들이 물러나게 된 배경에는 5.16이 결정적인 요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사실상 5,16 이후로 노인들은 권위와 자리를 잃고, 청장년들의 무분별한 박력과 야심과 패기의 그늘 속으로 침잠하게 되고 말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항이다. 바람직스럽지 못한 군사 쿠데타가 노인들의 권위와 가치에도 치명상을 입혔다는 것은 생각해 볼만한 대목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노인들에게 더 많다. 우리 나라에서 깊은 경륜을 바탕으로 지조와 기백을 지키며 옳음을 위해 최후까지 의연한 삶을 한 노인을 찾아보기란 극히 어렵다. 우리는 지금까지 추한 노인들을 너무 많이 보아왔다. 늙으면 누구나 추해지는가 싶을 정도로 추한 늙은이들이 우리 시대에는 많은 것이다. 주착이요 망령이다 싶을 정도로 추한 이름 있는 노인들의 행투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보아왔으며, 또 얼마나 혐오감과 연민을 삼켰던가!
우리 젊은이들에게 빛과 위안을 던져 주는, 그리고 사표(師表)로 삼을 만한 현대 정치사 속의 노인을 들라면 고(故) 정구영(鄭求瑛) 선생 같은 이를 제외하고는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젊은이들에게 빛과 희망을 주기보다는 자신의 이익 편에 서서 오히려 절망을 안겨 준 예가 많은 우리의 어른들은 '전쟁을 겪지 못한 세대'라는 말로 곧잘 젊은이들을 매도하고 경멸한다. 케케묵은 고사 성어(古事成語)나 읊조리고 중용(中庸)을 내세워 지나침만을 경계하며 부족함과 모자람과 무기력 등을 변명하고 호도하는 예도 많다.
이제는 우리의 노인들도 공부를 해야 한다. 젊은이들의 순수한 고뇌를 들여다보고 이해할 수도 있을 만큼, 그리고 순수와 진실과 옳음에 대한 젊은이들의 열망과 열정을 사줄 수 있을 만큼 의식 세계의 폭을 넓혀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어른들이 어른으로서의 권위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며, 젊은이들로부터 진정으로 존경과 공경을 받을 것이다.
사족(蛇足); 정말 불필요한 말일지 모르지만, 이런 류의 우리 신앙의 문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내용의 글을 '주보'에 쓰는 것 때문에 교우들 사이에서 반감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우리 주보의 포괄적인 가치와 다양성에 기여하고자 하는 뜻도 분명함을 이 게제에 밝혀 둔다. (1984년 <대전주보> 8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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