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헌법재판소가 법보다 현실을 택했다. 태국 헌법재판소는 3일 탁신 수상의 재산은닉 사건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렸다. 15명의 재판관이 판결에 참여해 8명이 무죄를, 7명이 유죄를 주장해 결국 8대 7로 무죄 판결이 난 것이다.
이에 대한 태국 사회의 반응은 대체로 담담하면서도 환영하는 분위기다. 시민들은 대개 '당연한 결정'이라는 반응을 보였고 경제계는 이번 판결이 태국 경제에 긍정적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고 환영하고 있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내려진 후 태국 방송은 뉴스 시간마다 관련 소식을 자세히 보도하고 있다.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탁신 수상이 재산 내역 신고 시점에 자신의 재산이 아내에 의해 다른 사람의 이름을 이용, 은닉된 사실을 알았다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무죄 판결의 주된 이유다. 재판부는 이 이상의 자세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태국 언론이 보도하고 있는 무죄 판결의 배경을 보면 무죄 판결을 내린 8명의 재판관 중 4명은 헌법 제 295조 조항이 탁신 수상 사건에는 적용될 수 없다고 판결한 것으로 알려졌고 나머지 4명은 탁신 수상이 재산을 숨기려는 의도가 없었던 것으로 믿는다고 알려졌다. 태국 헌법 제 295조는 모든 공직자는 자신의 재산 내역을 신고하도록 되어 있다.
탁신 수상은 지난 6월 최종 증언을 통해 자신은 아내가 재산을 차명계좌를 이용해 이동시킨 사실도 몰랐으며 자신의 비서가 재산 신고 규정을 잘 몰랐다고 주장하며 자신은 '정직한 실수'를 한 것일 뿐이라고 말했었다. 재판부는 탁신 수상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한화로 3백억원 가량의 자신의 재산이 이동된 사실을 탁신 수상이 몰랐다는 말은 설득력이 없다. 설사 몰랐다 하더라도 그 재산은 그럼 탁신 수상의 것이 아니라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그 재산은 신고하지 않아도 되는 재산이라는 말인가? 이에 대해 재판부는 명쾌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수친다 용선톤 재판관은 "차명계좌를 이용해 재산을 관리하는 것은 관행"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이 사건을 바라보는 많은 태국 시민들의 정서를 반영하고 있다. 방콕 시내 한 공원에서 만난 나파완 씨는 "내가 탁신이라도 그처럼 했을 것"이라며 탁신 수상의 재산 은닉을 옹호했다.
비록 이번 판결을 대부분의 태국 시민들이 환영하고 있다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탁신 수상에 대한 무죄 판결은 태국 사회에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탁신 수상의 지지자들마저도 대체로 탁신 수상의 유죄를 인정하면서 '그러나 그에게 국가에 봉사할 기회를 줘야 한다'는 식의 논리를 폈을 정도로 법적인 측면에서 탁신 수상의 유죄는 확정적이었다.
이번 판결은 헌법재판소가 헌법 수호냐 국가이익이냐의 갈림길에서 국가이익을 선택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판결은 태국 사회에 눈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상처를 주게 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벌써부터 그 징후는 드러나고 있다.
현재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이 뇌물을 받았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고 심지어 며칠 전에는 이미 9대 6으로 무죄 판결이 내려져 있다는 주장을 담은 괴문서가 정부청사에 뿌려지기도 했다. 헌법 수호의 최후 보루인 헌법재판소의 권위가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과거 우리나라 사법부가 행한 정치적 판결을 볼 때마다 절망감을 느꼈다. 오늘 나는 태국 헌법재판소가 내린 '정치적 판결'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그리고 태국 사회가 걷고 있는 '멀고도 험한 민주주의의 길'을 생각했다.
태국 시민들이 그토록 탁신 수상을 지지하는 이유는 그에게 '가난에서의 해방'이라는 기대를 걸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탁신이 없는 미래는 상상할 수 없다'고 외치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의 부도덕에 눈 감고 있다.
나는 오랜 세월 군부 통치의 고통을 감내했던 태국 시민들이 탁신 수상의 부도덕 외에 또 무엇에 눈 감을지 심히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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