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의 환시(幻視)

등록 2001.08.16 20:11수정 2001.08.16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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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직업에 대한 편견이나 폄하를 지독하게 싫어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럼에도 지난 십 년을 보내면서 내가 가장 불편하게 생각하게 된 직업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조교라는 것이다.


흔히 농담으로 '숙달된 조교가 여러분께 시범을 보여 드릴테니 잘 보아 두셨다가 그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하지 않던가. 그런 때 조교는 유머러스한 느낌을 준다. 매일 매번 서툰 사람들 앞에서 시범을 보일 수밖에 없는 조교의 난처한 운명이라니. 그 말을 들을 때 우리가 짓는 미소에는 그 얄궂은 운명에 대한 공감과 연민이 담겨 있다.

그러나 그런 조교가 자기 '아랫사람'들을 닥달하거나 허세를 부리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목불인견이다. 감사는 평양감사를 해야 제 맛이고 같은 조교라도 대학 조교는 되어야 큰소리 칠 수 있나 보다. 같은 대학 조교라도 국립대학 조교쯤은 해야 벼슬이라고 할 수 있는지? 그쯤 되면 본래 성정이 어진 사람은 목에 칼이 들어가도 벌일 수 없는 일을 벌이는 사람들이 있다.

선배가 일 때문에 찾아와도 목에 깁스를 한 탓인지 머리 굽혀 인사하는 법이 없다. 숫제 아예 모르는 척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후배들을 옛날 양반 몸종 부리듯 마구잡이로 부려 대면서 자기 말만 잘 들으면 T.A.인가 뭔가 한 달에 몇 만원씩 받는 장학생 시켜주고 선생님들께도 뭔가 좋은 말을 해줄 것처럼 거들먹거린다. 복도를 오가고 계단을 오르내릴 때도 자기는 다른 학생들과 다르다는 티를 내느라 여념이 없다가 제가 잘 보여야 할 교수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단박에 팔자수염 난 아전 노릇하기 바쁘다.

그것도 힘은 힘이고 권력은 권력이라고, 손바닥만한 조교 벼슬을 하도 주물러댄 탓에 급기야 그 벼슬에 상처가 나고 염증이 생겨 곪아터질 무렵이 될 즈음 2년 임기가 언제 시작되었나 모르게 끝나버린다. 그러면 속된 말로 하루아침에 끈 떨어진 신세, 역으로 제가 이 눈치 저 눈치 보는 안쓰러운 처지가 된다.

마음이 곱고 약한 사람은 그래도 어제 일을 잊은 듯 애써 무심하게 대해 주지만 사람들이 다 그렇지 않다. 상갓집에 털썩 들어와 어디 먹을 것 없나 기웃거리며 어슬렁거리는 개 다루듯이 하루아침에 하대하고 냉대하는 짓궂은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도 그 사이에 벼슬의 유무(有無)에 워낙 민감한 체질이 된 탓에 새로 바뀐 제 처지에 적응하느라 그런 사람 원망은 엄두도 못 내는 것이 오늘의 백의인(白衣人), 바로 늠름하던 어제의 조교 분이시다.


두 번 말하건대 조교라고 왜 다 그럴까. 일 처리가 분명하면서도 피로와 불편을 내색하지 않는 친절한 분이 많다. 나 또한 주변에서 그런 사람을 많이 보았으되 옛날의 못된 마름처럼 초라한 제 지위를 믿고 함부로 행동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또한 있다. 직업의 환시에 빠진 이들이다.

그런데 이는 대학 조교의 일만은 아니다. 출판사며 어디며 접촉을 하고 그밖에 여러 사람을 접하다 보니 그것이 인간 유형의 하나임을 알겠다. '계급'이 높을수록 그런 이들이 더 많아지는 듯도 하고 그런 지혜롭지 못한 이들 탓에 우리 사회의 고통은 더 커지는 듯하다.


그러니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을 때는 그의 왼팔에 완장을 채워주면 되겠다고 생각한다. 계급이 달라질 때 그 사람의 그릇이며 사람됨이 다 드러나는 탓이다.

성인이 되고 나면 어느 틈에 직업의 환시가 찾아들고 또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지경에 빠져들고 마는 인생의 어리석음이 두렵다. 가끔 생각한다. 나 자신 비평가라는 직업에 중독되지 않았는지. 사람과 사람이 하는 일이 본래 무슨 상하·귀천이 있겠는지.

직업이란 평생을 끌고 다닌다 해도 결국은 입었다 벗어야 하는 옷 같은 것. 그것을 벗어버리면 모두 한 가지, 사람이라는, 초라하면서 크고 크면서도 한없이 작은 우주로 돌아가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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