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귀종 여인

등록 2001.08.23 11:39수정 2001.08.23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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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랜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가 출판사 번역 일을 해보라고 권했던 사람이었다. 그 친구는 슬픔에 젖은 목소리로 자기 이름으로 처음 번역한 책이 교정·교열 모두 엉망이 된 상태로 출간되었다며 이제 마지막 정을 붙이려 했던 사회적 활동마저 거두어 버려야겠다고 했다.

번역은 어려운 일이고 완전한 번역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친구는 형용사 하나를 뺄 때도 일종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정성을 다했다. 자기 주장이 많은 세상이므로, 나는 그 친구가 성실했음을 그 친구의 말로 믿지 않고 인생으로 믿는다. 내가 아는 그 친구는 차라리 번역 일을 중도에 포기하고 계약금을 돌려줄지언정 절대로 외국어를 가감·생략해가며 우리 말로 옮겨놓을 사람이 아니다. 출판사에 번역 글을 넘기면서도 오·탈자 하나 안 생기도록 마무리를 깨끗이 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 친구가 절망한 연유를 안다. 세상에 아무리 성실해도 돌아오는 것은 상처뿐이라는 것.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지금 수줍은, 깨끗하고 성실한 사람을 인정해주지 않는다. 시간이 가도 변질되지 않는 사람을 돌아보지 않는다. 자기보다 남을 위하는 보이지 않는 사람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그런 경향이 너무 강해서 그 친구처럼 희귀한 유형의 여인은 세상을 감당하기 힘들다. 그늘에 피는 꽃처럼 그런 사람은 세상을 피해 상처를 안으로 삭이며 살아가야 한다.

하루 종일 우울한 기분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그 친구가 세상 살아가는 방식을 곱씹었다. 이름나고 똑똑한 운동가들이 하나둘 세속화될 때 늦게 배운 도둑질마냥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마지막까지 야학을 했던 것, 교육대학원에 들어가서 야학교육을 주제로 논문을 씀으로써 스스로 '주류'에서 벗어난 것, 출판사에 들어가 밤잠 못 자고 마감에 시달리면서도 책임감을 벗어버리지 못해 끝내 고생을 한 것, 개발괴발 써내는 식자(識者)들의 오문·악문을 고치고 영어 잘 한다는 이들의 몰염치한 번역문을 뜯어고치느라 대가 없는 노동에 시달린 것, 직장을 옮겨가니 약속은 안 지키고 의무만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고 일을 그만둔 것…….

그 친구의 연약한 살갗은 험난한 세상, 거칠고 위선적인 사람들에 스칠 때마다 상처가 난다. 그것이 채 아물기도 전에 또 다른 상처를 입는다. 마음에 깊은 멍이 들어도 그것을 하소연할 사람도 없이 자기를 둘러싼 사람들을 위해 다시 삶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살아온 짧은 나날을 돌이켜 보면 세상에는 그 친구 같은 희귀종 사람들이 있다.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 외형의 역사 이면에 묻혀 있으되 그들이 없다면 이 세상은 아무런 가망이 없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 친구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런 희귀한, 소중한 사람들의 슬픈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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