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시월유신 국민투표에 대한 기억 ④

등록 2001.08.26 07:45수정 2001.08.26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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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녕 개구리 경우도 아니련만 그런 말조차도 함부로 할 수 없었던 그 진풍경을 여러분은 (그 시절을 겪지 않은 젊은 분일 경우) 상상이 가능하겠는지요?

1972년 11월 21일에 실시된 시월 유신 국민투표 당시의 풍경이며 내가 지니고 있었던 심정 따위를 나는 그로부터 11년 후인 1983년 천주교 대전교구 교구보인 <대전주보> 9월 11일자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칼럼 형식으로 씌여진 그 글의 전문을 그대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3%의 긍지

지금은 분명히 제5공화국이고, 또 '새시대'라고들 한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과거 유신 체제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이나 반성을 자유로이 할 수가 없는 몹시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우리 신자들끼리만 보는 교회 '주보'의 협소한 지면에서나 그것이 조금씩 가능하다.

나는 국민투표라는 미명을 앞세워 유신 체제를 출범시키던 지난 72년의 풍경과 분위기 따위를 잊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중의 하나다. 그리고 전국적으로는 91.5%, 우리 고장에서는 무려 97%의 찬성율을 보인 그 가공할 정도의 찬성 쪽에 가담하지 않고, 8%(또는 3%)의 반대 쪽에 동고(同苦)한 사람들 중의 하나다.

나는 정녕코 그때의 그 참혹하던 풍경을 잊지 못한다. 나는 그해 5월 군에서 제대하여 제한적인 상황에서나마 세상을 제대로 보려고 노력하며 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시월 유신'을 맞았다.

계엄령 선포, 국회 해산, 모든 정치 활동 금지, 유신 헌법에 대한 찬반 논의 금지, 그런 상황에서 유신 체제 여부를 국민에게 묻는 국민투표 실시….

일련의 사건들이 숨가쁘게 진행되던 실로 무시무시한 상황이었다.

그때 각 매스컴들은 얼마나 요란스럽게 떠들어 대었던가. 유신 헌법만이 우리의 살 길이며 민족 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는 길이라고 했다. 그러니 한 사람도 빠짐없이 투표에 참여하여 밝은 조국의 미래를 창조하는 일에 다같이 매진하자고, 연일 밤낮으로 선동을 해대었다. 심지어는 유신을 반대하는 것은 비애국이요 역적이라는 분위기까지 만들어 내었다. 실로 그런 기운이 팽배했다.

나는 그해 처음 투표권을 행사하게 된 누이동생을 설득해서 함께 반대 쪽에 투표를 하면서 우리가 정말 비애국자 또는 역적이 아닌가 의심스러웠고, 누가 보는 것만 같아 공연히 불안하고 두려운 기분이기도 했다.

나는 그날 이후로 우리 나라 사람들은 대단히 무드에 약한 휩쓸리기 잘하는 민족이고 속아 넘어가기 잘하는 백성이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그것은 내 가슴에 깊이 각인된 인식이었다.

한국인들의 국민성 또는 민족성을 가만히 살펴보면 장점들 못지않게 단점들도 참 많은데, 단점들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쉽게 잘 속아 넘어가는 단순성과 체념을 잘하고 망각이 빠른 것, 이웃의 사소한 일은 용서하지 않으면서 국가적인 큰일은 용서를 잘하는 것, 그리고 정치적인 면의 무책임 등이 유별나지 않나 싶다.

특히 잘 속아 넘어가는 단순성과 망각이 빠른 습성은 하나의 등식같이, 서로 불가분의 관계가 아닌가도 여겨진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국민들의 무지와 우매함과 단순성을 믿고 교묘히 잘도 이용하는 먹물들의 두뇌와 대중 조작 능력―그것은 적극적으로 추악하다.


내가 10여 년 전에 있었던 '시월 유신'의 풍경을 오늘 다시 떠올리는 것에 별다른 이유는 없다. '3%의 긍지'라고 제목하였지만, 찬성 91.5% (또는 97%)에 가담했던 선의의 사람들을 비웃거나 능멸하거나 해서 괴상한 거리감과 위화감 따위를 조장하려는 뜻은 추호도 없다.

그저 다만 과거를 쉽게 망각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반성하고 참회함으로써만 진정한 역사 발전이 이루워질 수 있다는 사실에 뜨겁게 동조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반대할 수 있는 자유, 희망할 수 있는 자유, 말할 수 있는 자유―그 모든 자유는 이미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해 주신 것이다.

나는 그 확신을 버릴 수 없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하느님 앞에서 좀더 힘과 용기를 갖고 살며 떳떳한 '양심'을 지니고 싶다.
또 한 번의 10월이 다가오는 길목에서…. *
(1983. 9. 11)




1983년이 어떤 세월이었는지 아십니까?
서슬이 시퍼렇던 전두환 5공 정권의 초창기였지요. 우리 사회의 모든 언로가 차갑게 얼어 있던 시절이었구요.

위에 소개한 그런 내용의 글을 일반 지면에 쓴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어디에도 그런 글을 실어줄 일반 매체의 지면은 없었으니까요.

그 시절에 '조·중·동'이 오늘처럼 목청껏 '언론 자유'를 외쳤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아니, 오늘 만큼은 아니더라도 그 반의 반 만이라도 그 시절에도 '언론 자유'를 외쳤더라면, 오늘의 억지 아우성이 그렇게 민망하고 공허하고 꼴사납게 들리지는 않을 겁니다.

아무튼 그 당시에 조중동은 5공 정권의 언론 통제에 끽 소리도 한번 못하고 오로지 관제 언론의 충실한 모습만을 오동통하게 보여 주었을 뿐이랍니다.

그런 상황에서 천주교의 각 교구 교구보들의 존재는 나에게 큰 위안이었지요. 우리 대전교구보인 <대전주보>도 5공 정권에 결코 굽죄이지 않는 태도를 보여 주어서 내게 더없는 용기와 위안을 주었답니다.

그래서 나는 5공 시절 동안 <대전주보> 지면에 실로 많은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거의 하나같이 '애끓는' 음조의 글들이었지요. 그런 글들 중의 하나가 바로 위에 소개한 글이랍니다.

'시월 유신'으로주터 어언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사이에 진정한 역사 발전이 이루워졌을까요?

물론 역사 발전은 분명하지 싶습니다.
그러나 비뚤어지게 발전한 면도 없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가치관의 부재 현상도 그것중의 하나이겠지요.

국민의 혈세로 '박정희 기념관'을 세우려고 하는 그 어처구니없는 발상과 추진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 시대의 '가치관 혼돈 현상'의 극명한 반영일 따름이지요.

그것을 <조선일보> 등 극우 수구 세력이 거드는 것이야 당연하다 하겠지만, 오늘의 김대중 정권이 거들고 있다는 사실에서 나는 말할 수 없는 자괴감과 혼곤을 겪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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