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옹지'로 마무리를 장식한 김장

<참된 세상 꿈꾸기> 김장을 마치고

등록 2001.12.06 07:03수정 2001.12.06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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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올해의 마지막 행사가 끝났습니다. 김장을 하고 나니 한해가 거의 기울었음이 좀더 명확히 실감되는 것 같습니다. 올해도 김장을 하면서 지난해의 김장 공사가 바로 엊그제 일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지난해의 김장과 올해의 김장이 동시의 일인 것만 같은 착각…. 그만큼 세월 빠름을 또 한번 절감할 수밖에 없었지요. 어찌어찌 하다보면 내년의 김장도 또 금세, 별안간 다가올 것이고….


김장도 끝나고 나니 안온한 가운데서도 스산한 기운이 더욱 오락가락하지만, 김장 공사의 부산물인 겉절이와 새옹지를 푸지게 놓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저녁을 먹는 맛이란, 이보다 더 큰 행복이 따로 없지 싶습니다.

새옹지가 뭐냐고요? 겉절이는 뭔지 알겠지만, 새옹지는 첨 듣는 소리라고요? 그럼, 게꾹지는 아십니까?

게꾹지와 새옹지는 충청도 바닷가 마을의 별미 음식이지요. 김장을 하고 남은 배추의 겉잎에다가 늙은 호박을 길쭉길쭉하게 썰어 넣고 그것을 게장 국물에 버무리면 게꾹지요, 새우젓과 민물새우를 섞어 버무리면 새옹지가 되지요. 냄비나 뚝배기에 끓여서 먹는데, 그 얼큰 짭짤한 맛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게꾹지와 새옹지 모두 처음에는 아주 부드럽고 연해서 입 안에서 씹기도 전에 녹는 듯하다가 이삼일쯤 지나면 질기게 되는 것이 다소 흠이긴 하지만, 나는 그 이름만 들어도 입 안에서 군침이 돈답니다. 그것이 불 위에서 보글보글 끓을 때는 청국장만큼은 아니지만 집안에 냄새가 그득 퍼지게 되는데, 나는 그 냄새를 맡을 때마다 야릇한 향수에 젖곤 하지요.

시골에서 살면서 향수를 느낀다? 시골에서 손쉽게 흙냄새를 맡으며 살아도 향수라는 건 늘 내 정수리를 타고 앉아서 오관을 자극하곤 한답니다. 그래서 게꾹지나 새옹지를 먹을 때마다 소년 시절 초가삼간 옴팡집 좁은 방안의 오붓한 정경을 떠올리곤 하지요.


어느덧 성큼 찾아온 동장군이 울안을 기웃거리며 을씨년스럽게 싸락눈을 흩뿌리는 저녁, 생솔가지로 군불을 지핀 따뜻한 온돌방에 밥상 들여놓고 온 식구가 둘러앉아 서로 머리통으로 등잔불빛을 가리기도 하고 코 훌쩍거리면서 새옹지로 밥 있게 밥을 먹던 정경….

음식으로부터 연유하는 내 그리움이란 건 사실 별 게 아니랍니다. 게꾹지나 새옹지 냄새 속에서 내 소년 시절을 추억하고, 때로는 내 아버지의 체온을 느끼고, 고향 땅에서 고향 내음을 체감하기도 하는 정도지요. 하여간 게꾹지나 새옹지는 나에게 단순한 음식이 아닌 듯싶습니다. 내 가슴의 깊은 '정'을 자극하는 음식이라고 한다면 표현이 제대로 되는 것일지….


하여간 올해도 새옹지로 마무리를 장식하면서 김장 공사를 마쳤습니다. 새옹지는 오래 두고 먹는 음식이 아니어서 겉절이와 함께 여러 집에 나누어졌습니다. 새옹지와 겉절이가 여러 집에 나누어졌다는 것은 우리 집이 김장을 많이 했다는 얘기이고, 도와준 손들이 많았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우리 집은 올해도 무려 100포기나 김장을 담갔습니다. 그러나 올해는 예년과 달리 김장 공사를 두 번으로 나누어 했습니다. 지난 11월 23일 내가 어머니의 한 달 분의 약을 타러 대전성모병원에 가게 되어서, 어머니께서 대전에서 사는 막내아들 집에 주려고 20포기 김장을 미리 한 것이지요. 막내아들 집에 김치냉장고가 있는 것을 아신 나머지 내 대전 출타에 맞추어 별도로 김장을 담그시는 어머니를 우리 부부는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올해 연세 78세에, 지난 9월 대장암 수술을 받으신 어머니가 앞동에 사시는 건강하고 기운 좋은 환갑 나이의 대녀와 함께 손수 김장을 담그시는 모습, 그 모든 절차들을 지켜보면서 우리 부부는 불안스럽고 걱정이 되는 가운데서도 싫은 기색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내 승합차에 20포기 김장과 파김치와 깍두기가 담긴 김치통들을 싣고 대전으로 출발하면서 어머니의 흐뭇해하시는 모습을 보며 나는 다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 제 어머니가 건강을 회복하시고 만수무강을 누리시며, 저리도 크고 깊은 자식 사랑을 더욱 맘껏 펴시게 하소서. 저 또한 어머니의 사랑을 동생에게 전하는 이 모든 일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기쁘게 행위하게 하소서.

그리고 나는 다시금, 오늘의 이런 김치통들 때문에, 마침내 어머니의 김치통이 없는 상태로 동생 집에 가게 되는 날이 오면 더없이 허전하고 적막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마음이 지레 한결 스산해지는 것을 느껴야 했지요.

내 어머니는 김장을 담그는 일에 지극 정성을 다하신답니다. 젓갈을 사는 일부터 무척이나 신경을 쓰시고, 매번 서산에 가서 사오시곤 하지요. 태안에서도 젓갈을 살 수가 있는데도 서산에 가야 좋은 젓갈을 고를 수가 있다는 어머니의 고집을 나는 꺾을 수가 없는 거지요.

올해도 온갖 양념 속거리들에 비해 배추 값이 너무 쌌습니다. 배추 한 포기에 300원을 주고 80포기를 사면서 어머니는 농민들에게 죄를 짓는 심정이라고 했습니다. 200원을 주고 샀다는 집도 있고, 공짜로 얻어서 김장을 했다는 집도 있고, 밭에서 그냥 썩고 있는 배추도 많으니 농민들은 어찌 살 것인지….

배추 재배 농가들에는 미안하긴 해도, 우리 집의 김장 풍경에는 여전히 훈훈한 그림이 있어 좋습니다. 우리 집이 김장을 한다는 말에 여러 이웃들이 와서 속 넣어주는 일을 하니, 80포기 김장 공사가 오전 중에 끝이 났지요. 직장에 매인 아내는 조퇴를 하고 달려왔지만, 도와주는 이웃들에게 점심 차려 드리는 일밖에 하지 못했고….

내 노모께서 크게 병고를 겪으신 몸으로도 올해도 이처럼 김장을 많이 담그신 것은 다 까닭이 있는 일이지요.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도 내 어머니께서 손쓰고 나누는 것을 좋아하시는 탓이지요. 올해도 성당 수녀원과, 내외가 건강치 못한 사촌 둘째형님댁, 뒷동 동생네, 역시 엄마가 교사여서 김장하는 일이 그저 큰일인 이웃 동원이네 등에 김치통들을 나누었지요.

그러고도 김장김치는 집 앞 화단의 땅을 파고 묻은 김칫독 두 개를 채우고도 플라스틱 통으로 여러 개나 되었습니다. 내 어머니는 땅에 묻은 동치미 독과 함께 김칫독을 참으로 애지중지하십니다. 땅에 묻은 독 속에 김치를 넣으면 김치가 저절로 맛있어진다는 것이 내 어머니의 주장이지요.

겨우내 저절로 맛이 들 우리집 앞 화단 김칫독 속의 김장김치는 내년 음력 2월까지도 맛이 변치 않을 겁니다. 그리하여 가장 오래 김장의 위용을 과시하면서, 김장김치가 다 떨어진 데다가 아직 새 김칫거리도 마땅치가 않아서 그저 입이 고플 이웃들에게도 그 새콤달콤매콤한 맛이 나누어질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내년 초봄께까지도 김장김치가 땅속의 독 안에 남아서 여러 이웃들에게 새콤달콤매콤한 맛이 나누어진다는 것은 바로 여든이 다 되신 내 어머니께서 정정하게 살고 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요. 노인의 지혜와 후덕함 때문인 게지요.

김장을 한 어제 저녁 무렵 나는 다시 백화산을 오르면서 참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하느님과 성모님께 기도를 했지요. 내 어머니께서 80을 바라보시는 고령에도 대장암 수술을 잘 이겨 내신 일이며, 매일같이 세 차례씩 두 가지의 독한 약을 복용하고 사시면서도 노상 출근이 바쁜 며느리를 잘 도와주시는 것이며, 노년기에 무려 네 번이나 대수술을 받으시느라 오랜 시간 마취로 정신을 빼앗기셨으면서도 기왕의 많은 암송 기도문들을 하나도 잊지 않으시는 것이며…. 실로 경이적인 그것들은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것을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가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참으로 하느님 은총의 실체가 내 어머니에게 머무시는 것이 분명한 일이었습니다.

내가 바치는 '묵주기도' 제5단의 지향은 '부모 형제 친척 친지들과 모든 은인들의 가정을 위해서'지요. 여기에 나는 요즘 들어 한마디를 더 첨부한답니다. "제 어머니의 건강의 회복과 만수무강을 위하여 기도 드립니다." 그러고 나서 바치는 묵주기도 제5단은 내게 이상한 즐거움을 안겨주곤 하지요.

올해도 김장 공사가 끝났습니다. 또 한번 세월이 성큼 지나는 것 같습니다. 요즘은 거의 매일같이 저녁 무렵이면 백화산에서 저녁놀을 보곤 합니다. 초겨울의 저녁놀빛도 참 아름답습니다. 내게는 올해도 이런저런 곡절이 많았습니다. 그 다양했던 곡절들로 말미암아 내 몸과 마음이 좀더 소금에 절여지듯 절여지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문득, 온갖 곡절과 시련들로 말미암아 내 인생도 소금에 잘 절여지고 켜켜이 좋은 양념들이 속속들이 채워지는 김장김치를 닮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서녘 하늘의 저 장엄한 놀빛도 소망할 수 있게 되기를…. 미욱하기 이를 데 없는 나로서는 언감생심, 감히 넘볼 수 없는 세계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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