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광고탄압에 대한 기억

<참된 세상 꿈꾸기> 그리운 동아일보 ①

등록 2001.12.10 07:05수정 2001.12.10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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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해의 12월을 살다보니 12월의 역사적인 대 사건 하나가 다시금 불현듯 떠오르는군요. '12·12' 아니냐고요? 물론 12월의 역사적인 대사건을 꼽자면 '시비시비'를 단연 첫 손가락에 꼽아야 하겠지요.


하지만 12월의 역사적인 대 사건에는 '시비시비'만 있는 게 아니랍니다. 1974년 12월 16일부터 그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사건―내가 지금부터 이야기하려고 하는 그 일도 내 뇌리에는 12월의 대 사건으로 깊이 각인이 되어 있답니다.

'유신체제'의 초중반 시기였던 1974년을 생각하면 지금도 명료하게 떠오르는 것들이 있지요. 일련의 '긴급조치' 발동과 '민청학련' 사건, 그리고 '동아일보 광고탄압' 사건 등이지요.

1972년 말에 '시월유신'을 단행하여 유신체제를 출범시키고 종신 집권의 길에 들어선 박정희는 국민투표에서 나타난 90%가 넘는 국민의 압도적 지지에 힘입은 듯 73년 중반까지는 자신 있게 별 탈없이 순항을 하는 듯했습니다.

'국민투표'라는 말이 나왔으니 여기에서 잠시 국민투표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겠군요.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모두 6번의 국민투표를 실시했습니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기였던 1962년 12월 17일 민정 이양을 위해 실시했던 국민투표가 처음이었고, 전두환의 5공 정권 말기였던 1987년 10월 27일 현행 헌법을 위해 실시했던 국민투표가 현재로선 마지막이지요.


여섯 번 모두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로 가결이 된 가운데서도, 1972년 11월 21일의 유신헌법을 확정하기 위한 국민투표, 1980년 10월 22일에 시행한 제5공화정 헌법을 확정하기 위한 국민투표, 그리고 1987년의 현행 헌법을 확정하기 위한 국민투표, 이 세 번의 국민투표는 90% 이상의 투표율에 90%가 훨씬 넘는 찬성표를 얻었지요. 참으로 특기할 만한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90% 이상의 투표율에 90%가 훨씬 넘는 찬성이라…. 이 놀라운 사실에서 나는 우리 국민들이 얼마나 중심이 없이 그때 그때의 분위기에 떠밀리면서 부유(浮遊)하듯 살았는지를, 국민성의 무게 없음을 능히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생각할수록 한심스럽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지요.


1987년의 '6월 항쟁'에 의해 얻은, 집권 세력의 '항복'이나 다름없는 노태우의 '6·29선언'에 의해 그 발판이 마련되었던 그해 10월 27일의 현행 헌법을 위한 국민투표, 그것의 결과를 보면서 나는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90%가 훨씬 넘는 찬성률이 그저 기쁘기만 한 것이 아니었지요.

나는 괜스레 1980년의 제5공화정 헌법을 위한 국민투표와 1972년의 유신헌법을 위한 국민투표의 놀라운 찬성률을 떠올리면서, 그때 그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정말 공연한 의문에 젖었던 거지요.

나는 '대통령 직선제' 회복으로 표징되는 가장 민주적인 현행 헌법을 확정시킨 1987년 국민투표의 바람직한 결과를 보면서도 왠지 우리 국민들이 별로 미덥게 느껴질지 않았습니다. 뭐라고 명쾌하게 짚어 말할 수는 없는 우리 국민성의 가벼움, 부유성 같은 것을 느끼는 기분이었지요.

아무튼 박정희는 유신체제가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성립된 체제라는 데서 상당히 자신감을 가졌던 듯싶습니다. 사실 그것이야말로 박정희가 기대고 비빌 수 있는 유일한 언덕이이었지요. 그는 유신체제의 정당성을 강변할 때마다 으레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들먹이곤 했으니까요.

그러나 박정희의 최대 명분인 그 '국민의 압도적 지지'는 그야말로 허구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완전히 '대중조작'의 산물일 뿐이었지요.

그 사실을 박정희 본인이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정말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그가 그걸 몰랐다면 너무 무지한 사람이고, 알았다면 비열한 사람이겠지만, 둘 다 어리석음으로 연결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그 어리석음은 '비극'의 다른 이름이겠지요), 사실은 처음부터 유신헌법에 찬성하지 않은 10% 미만의 '깨어 있는 국민'들이 문제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박정희의 국민을 기만하고 농단하는 대중조작과 국민통제의 실상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1973년 중반 이후부터 서서히 저항 운동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일종의 지하운동 같은 양상이었지만, 곧 재야 세력에 의해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이 벌어지는 등 노골적인 반유신 운동이 전개되기에 이르렀지요.

철저한 언론 통제로 일반 국민은 잘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유신독재에 대한 저항운동이 점점 세를 키워가자 박정희는 위기감을 갖기 시작했지요. 그리하여 1974년으로 넘어오면서 박정희는 연초부터 유신체제의 무시무시한 포악성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그것의 이름은 유신헌법에 대통령의 고유 권한으로 보장되어 있는 '긴급조치'라는 것이었지요.

박정희는 반유신 민주화운동의 확산을 조기에 차단하기 위해 1974년 1월 8일과 13일, 헌법 비방과 개헌 논의를 금지하는 대통령 긴급조치 1호와 2호 및 3호를 연속적으로 발동했고, 긴급조치 1호 발동에 따라 장준하 선생과 백기완 선생이 구속되는 일까지 벌어졌지요.

여기에서 나는 장준하 선생의 이름을 쓰고 말았군요. 나는 장준하라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뭉쿨하는 뜨거운 감동과 뼈아픈 심회를 느끼는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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