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피무늬 진돗개 봉순이의 염소사냥

강제윤의 <보길도에서 온 편지>

등록 2001.12.24 09:16수정 2001.12.27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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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봉순이에게 물린 염소)


(1)


그래 갖고 살찐데, 무장 더 야울제.
염소에게 풀을 뜯어다 주고 있는데 이웃의 할머니가 말을 걸어옵니다.

돈이 샐라먼 어짤 수 없제. 개한테 물리먼 고기도 안만납꼬.
할머니가 무어라 하거나 말거나 염소는 뜯어다준 풀을 먹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밤새 배가 고팠겠지요.

사람가치 창시는 성하께 오둑오둑 잘두 묵눈구만.
개한테 물리먼 모산다 했는디.

근디 함마이, 염소는 멫 달만에 쌔낄 난다우.
한 다슷달은 넘어야제. 근 여슷달 가차이 되야제.

이놈은 언마나 대꺼쏘.
인자 새끼 뱃능갑다. 한차서 날 때 대먼 젓이 출렁출렁한디.
그라요잉, 참말로 언마 안됀는 갑쏘야.


며칠 전, 봉순이가 기어코 사고를 치고 말았습니다.
내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 목줄이 풀려 한달음에 청별 고개까지 달려가 염소를 물고 말았습니다. 무슨 일로 그랬을까.
마치 표적 사냥을 한 것처럼, 집 근처 풀밭에 묶여 있던 많은 염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1킬로도 넘는 거리를 달려가 강채 삼촌네 염소를 초죽음으로 만들다니.

봉순이는 새끼까지 밴 염소의 목덜미와 어깨, 가슴을 물어뜯어 피투성이로 만든 다음 입에 피칠갑을 하고서야 유유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나는 염소 값 30만원을 물어주고 염소를 집으로 실어 왔습니다.


한동안 염소의 목덜미에서 피가 멈추지 않았습니다.
상처를 눌러 지혈을 시켰지만 염소는 여전히 넋이 빠져 있었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는데요.
동네 사람들은 개한테 물린 염소는 못산다고 얼른 잡아 먹으라 하더군요. 하지만 죽을 때 죽더라도 일단 살려보고 싶었습니다.

지혈제를 뿌리고, 소독을 하고, 항생제와 염증치료제를 바르고, 주사까지 놓아주자 염소는 차츰 안정돼 갔습니다.
앞다리 하나는 부러졌는지 접질렸는지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 같아 부목을 대고 붕대로 감아주었지요.
염소막을 만들어 주고, 한참 동안을 염소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좀 괜찮아졌니, 이제 무엇 좀 먹어볼래.
풀을 뜯어다주자 염소가 풀을 받아먹기 시작하더군요.

그로부터 여러 날이 흘렀습니다.
염소는 여전히 다리를 절뚝이지만 다른 상처들은 모두 아물고, 식욕도 아주 되찾은 듯합니다.
더 두고 봐야 알 일이지만 염소는 온전히 살아난 듯합니다.

개한테 물린 염소가 못산다는 속설은 상처 입은 염소를 치료해주지 않고 방치해 두었을 때 해당되는 것이 아닐까요.
아무리 작은 상처라도 방치해 두었을 때 감염 등에 의해 치명적일 수 있는 것은 염소나 사람이나 매 한가지겠지요.

날마다 수시로 풀과 나뭇잎 등을 뜯어다 줍니다.
처음 다쳤을 때는 자가치료를 하려는지 쑥만을 골라 먹더니 이제는 모두 잘 먹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 어디 풀밭에다 매놓지 못하고 내가 풀 뜯는 수고를 대신해 줍니다.

그라나 저라나 애기 거천 하드끼 거천 해야 쓰것다.
그래야지라우.
할머니는 애기 돌보듯이 잘 돌봐줄려면 네가 고생스럽겠다고,
혀를 차며 마실을 가십니다.



(사진: 혼나고 난 뒤 먼 산 보고 있는 봉순이)

(2)

봉순이는 어려서 중염소 한 마리 물어 죽이고, 이참에 새끼 밴 염소까지 물었으니 나한테 진 빚이 제 몸값보다 많아졌습니다.
처음 며칠은 된통 혼을 내주고 아는 척도 안했지요.
그랬더니 기가 죽어 집밖으로 나오지도 않더니만 내가 다시 아는 체 해주자 기가 살아났습니다.

언제 염소 물었다고 혼났느냐는 듯이 예전처럼 움직이는 짐승만 눈에 띄면 못 잡아먹어 안달을 합니다.
그것은 봉순이뿐만 아니라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집니다.

사람에게는 순종적이며 한없이 유순한 개들이 왜 이다지도 다른 짐승들만 보면 공격적이고 폭력적으로 돌변하는 걸까.
지난 여름, 개구리, 게, 귀뚜라미, 사마귀, 지네 할 것 없이 봉순이네 식구들의 사정권에 들어오는 동물들은 무엇하나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도대체 움직이는 동물들이 눈앞에 어른거리면 그대로 살려 주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녀석들이 사냥감을 먹는 것도 아니었지요.
그저 닥치는 대로 죽일 뿐이었습니다.

더러는 생포해서 가지고 놀기도 하지만 그러다 죽어버리면 그뿐, 이내 다른 사냥감을 노리곤 했습니다.
매일같이 함부로 죽이지 말라고 야단을 쳤으나 내 입만 아팠지요.
그러더니 급기야 염소까지 잡아오는 사단이 난 것입니다.

도대체 이 집 개들은 왜 이다지도 공격적이고 폭력적일까.
야성이 살아있는 진돗개라서 그런 걸까.
진돗개는 사냥 본능이 있다던데 혹시 그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야생생태의 동물들, 예컨대, 호랑이나 사자 같은 육식동물들도 배가 고프거나, 공격을 받아 위협을 느낄 때 외에는 다른 동물을 함부로 죽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존과 안전을 위해서 살상을 할 뿐이지 이유 없이 생명을 해치지는 않지요. 그러니 야성이 살아 있어서 공격적이라는 말도 틀린 것 같습니다.
야성이란 생명을 함부로 해치는 기질과는 무관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개들은 왜 이유도 없이 다른 동물을 공격하고 살상하는 것일까요.
개들의 폭력성이 혹시 사람으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닐까요.
사람이야말로 개보다 더 자주 이유도 없이 무수한 생명들을 해치지 않습니까.
재미로 산짐승들을 사냥하고, 취미로 물고기들을 낚아 죽이고, 심지어 같은 인간마저도 벌레 죽이듯이 하지 않습니까.

야생으로 있었을 때 개의 본성 또한 그렇게 공격적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잡혀 길들여지는 순간부터 개들은 포악하고 잔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이 사냥을 위해 이유 없는 살상을 부추겼고 그에 따라 야생의 개들은 지금의 폭력적인 개로 길들여진 것일 테지요.

그러므로 야성이라는 것도, 사냥 본능이라 이름하는 것도 실상은 개들의 타고난 본성이 아니라 사람에 의해 길들여진 습성에 불과할 것입니다. 사정이 그런 줄 알면서도 개들의 폭력성을 탓할 수는 없겠지요 .
봉순이가 염소를 물고 왔지만, 내가 봉순이를 책망할 수만 없는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
한번 피 맛을 본 개는 다시 사고를 치게 되어 있으니 봉순이를 팔아버리라는 마을 사람들의 충고를 듣지 않는 이유가 또한 이와 같습니다.

오늘도 한소리 듣고 난 봉순이가 먼 산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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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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