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로 자신에게 속지 않는 법

보길도 편지

등록 2002.01.04 12:25수정 2002.01.10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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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속이지 않는 일은 그리 어려운 게 아니다.
참으로 자기를 속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일이고 어려운 줄을 알아야 한다.
타인에게 속지 않는 것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다. 진정 자기에게 속지 않는 일이야말로 큰일 중의 큰 일 임을 알아야 한다." (도법스님)

바다 건너 문득 집을 나섰습니다.
해남 버스터미널 대합실에서 버스를 기다립니다.
요즘 들어 불쑥 길 떠나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바람 부는 날이 잦아졌습니다.


터미널 출입구를 기웃거리는데 이중문 사이에 할머니 한 분이 쪼그려 앉아 있습니다.
할머니는 다친 손에 붕대를 감으려 하지만 붕대는 번번이 할머니의 손등을 비껴갑니다.
나는 할머니를 건너다보고 있습니다.
몇날 며칠을 감고 다녔는지 붕대는 땟국물에 젖어 시커멓고 할머니는 붕대보다 더 꺼멓습니다.

노심초사하는 할머니의 손등이 파리합니다.
할머니, 손 다치셨어요.
그래라우, 부러졌는디 벵원에 이본했다가 태언했지만 자꾸 쑤셔서 된장을 발락구만이라우.

할머니는 다친 손등에 된장을 바르고 그것을 배추 잎으로 감싸고 있습니다.
나는 할머니의 마른 손을 잡고 된장 바른 배춧잎 위에 붕대를 둘러줍니다.
고맛구만이라우, 절믄 새램이.
겔혼은 햇능가 총각잉가 몰루것지만 고맛구만이라우.
할머니는 붕대 감은 손을 들어 보이면서 몇 번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합니다.

고맙긴요 할머니.
나는 인사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사실 나는 할머니가 절절매고 앉아 있는 것을 보고서도 한참을 주저했었지요.
때 절어 불결해 보이는 붕대와 할머니의 남루한 행색에 선뜻 다가서지 못했습니다.

나는 얼마 전 다들 잡아 먹어버리라고 하는, 개에게 물려 피흘리는 염소를 데려다 치료해서 살려준 적이 있습니다.
그때 나는 참 자애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랬던 내가 다친 사람을 눈앞에 두고도 치료해주는 것을 주저했습니다.
나는 난 자신에게 속고 있었습니다.


할머니 이제 어디로 가세요.
어띤 에펜네 아들 중신 시러 가는디 엠벵할 에펜네가 여비도 안조서 이라고 있소잉. 누구한티 천언만 꿀라고 했는디.

제가 꿔드릴게요 할머니.
어치케 갚으라고.
나중에 갚으시면 되지요.
어이 사는 누군지도 모르는디.
그냥 받으세요 할머니.
제가 아니어도 다른 사람에게 갚으시면 되잖아요.
나는 천원짜리 두 장을 할머니 손에 꼭 쥐어드립니다.


할머니는 거푸 고맙다고 말씀하지만 듣는 내가 더 송구스럽습니다.
어치케 가푸까, 어치케 가푸까.
할머니 걱정 마세요.
나는 순천행 버스에 오릅니다.
아마도 할머니는 이미 누군가에게 갚으셨을 겁니다.

지금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 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과거에 내가 받은 것을 뒤늦게 갚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받는 것 또한 다르지 않겠지요.

나는 등받이에 기대 혼침에 빠져듭니다.
버스가 출발하는가.
순간, 엔진음에 놀라 눈이 번쩍 뜨입니다.
나는 또 나에게 속을 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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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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