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국가 중국도 '학벌'이 문제다

"그런데 공부, 그건 도대체 왜 하는 거지?"

등록 2002.01.27 09:11수정 2002.01.28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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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인터넷을 통해 한국의 소식들을 읽다보니 참 웃기지도 않은 기묘한 '발언'이 뉴스의 초점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김용갑 의원이 한완상 교육부총리가 국무회의 석상에서 제기한 '이력서에서 학력난을 폐지하자'라는 문제의식에 대해 '한장관의 사회주의 병이 또 도졌다'느니 '학력난을 폐지하자는 주장은 사회주의적 발상'이라느니 하면서 딴지를 걸고 넘어지고 있는 것이다.

불쌍한(?) 한 부총리님은 예전에도 한번 김의원과 비슷한 투철한 '자유민주주의 수호전사'들로 인해 '사회주의자'라는 빨간모자를 뒤집어 쓰더니 이번에도 '또 도진' 그 '자유주의 병'이라는 놈에게 호되게 당하시는 모양이다.

남의 나라 땅에서 할일없이 매일 인터넷으로 '쓰윽' 고국의 소식들을 읽으면서 그나마 '고국은 지금'이라는 궁금증들을 달래고 있긴 하지만, 매일 볼 때마다 느끼는 건 '나의 고국은 왜 이리도 안녕하지 못하는 것인지, 왜 이리도 매일같이 문제투성인지'하는 생각이 들어 늘 짜증스럽고 안타까웠다.

그런데, 이번에도 우리의 투철한 자유민주주의 수호자인 김의원의 그러한 '소신있는' 발언들을 접하고 있자니 이제는 짜증을 떠나 슬슬 '지겹기'까지 하다. 게다가 '학력란 철폐'가 '사회주의적 발상'이라는 김 의원의 말을 듣고는 문득 그 사람이야말로 늘 '사회주의 병'을 안고 사는 '환자'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나에게도 무슨 고깔모자를 씌울까?

'소신'도 좋지만 소신이 과해 '무식'한 냄새를 풍기면 곤란하다. '학력난 철폐'가 '사회주의적 발상'이라고 하는 근거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된 '발상'인지 그리고 그것이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어떤 점을 위배하고 있는 '발상'인지 도무지 감이 안 잡히기 때문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김의원이 말한 '사회주의적 발상'이 매일같이 넘쳐날 것 같은, 구소련 몰락 이후 '현실사회주의'의 리더를 자처하는 '중화인민공화국'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인데 나는 지금까지도 이 사회주의 국가에서 '학력난을 철폐하자'라고 말하는 소위 그러한 '사회주의적 발상'을 들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갈수록 '학력지옥'이 되가고 있는 사회인데, 어디 그러한 '사회주의적 발상'이 있다는 말인가.

"질 떨어지는 애들하고는 시험도 같이 못보겠다."

지난해 중국의 난징(南京)대학교에서는 아주 재미있는 풍경이 연출되었다. 매년 중국 전역의 대학에서 실시되는 전공영어 등급시험과정에서 빚어진 해프닝이었는데, 사건의 핵심은 바로 이 '학벌의 수준차'로 인한 분규였다.

이 사건을 보도한 중국의 주간잡지 '新聞週刊(신문주간)' 기사 내용을 요약 인용하자면, 지난해 5월9일 난징대학교 영어과 학생들과 이 학교 부속의 2급민영학교인 난징대학찐링학원(南京大學金陵學院) 영어과 학생 20명이 동시에 시험장으로 입장하려는 순간, 찐링학원 영어과의 다른 50여 명의 학생들과 이날 시험을 볼 예정이었던 20명의 학생들이 시험장 앞에서 '시험거부' 연좌농성을 벌인 것이다.

이들이 연좌농성을 벌인 목적은 "우리도 난징대 학생들과 같은 공평한 대우를 해달라"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무슨 말이냐하면, 원래 찐링학원이라는 곳은 난징대에서 설립한 부속학교인 셈인데, 이 학교는 소위 말하면 대학입학시험에서 성적은 안되고 좋은 학교의 졸업장은 학비를 좀 비싸게 내서라도 얻고자하는 학생들이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들어가는 2급 민영학교이다.

이 학교는 중국내 대학서열 3-4위를 다투는 명문중점대학인 난징대학에서 설립한 것이라 졸업 이후 똑같은 '난징대 졸업장'을 준다는 미끼로 '돈 있는' 학생들을 모집해서 운영해 왔었다.

그러나 정작 4급영어시험을 보는데도 찐링학원 학생들에게는 "너희들의 질이 떨어지기 때문에 정식 난징대 학생들의 영어시험점수와 같이 합산할 수 없다"고 거부를 한 것. 뽑을 때는 학비만 좀더 내면 동등한 자격을 부여한다더니 돈받고 뽑은 이후에는 "질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시험볼 자격조차 제한을 가하고 더군다나 졸업장에도 '난징대학'이라는 동일한 도장이 찍힌 것은 조금 어렵다고 발뺌하고 나서서 이들 2급 민영학교 학생들이 급기야 '분노'를 표출한 것이다.

이 사건 이후, 중국에서는 이들 찐링학원과 같은 민영학교에 대한 사회적 문제들이 연달아 터져나왔고 '도대체 이 놈의 학벌경쟁과 학벌체제를 어떻게 합리적으로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교육정책을 둘러싼 논쟁들이 오고갔었다. 그러나 '학벌'이 곧 '생존능력'이 돼버린 중국에서 이러한 '돈내고 학벌을 사는' 민영학교의 문제와 학벌경쟁의 문제점들은 정책 당국자들마저도 "그냥 당분간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입장표명을 안하는 것이 최고이다"라며 한발 물러서고 있는 상황이다.

13억 인구의 '밥줄'을 죄고 있는 학벌경쟁의 사회적 모순들을 풀자니 이들도 마땅한 합리적인 해법이 없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학벌이 지배하는 사회, 중국

중국사회가 학벌체제 사회로 들어선 것은 문화혁명이 끝난 76년 이후부터이다. 문화혁명 이후 모든 대학들이 문을 닫고 학생을 비롯한 청년들과 교수 등 지식분자들이 모두 노동자정신으로 개조당하기 위해 농촌으로 하방을 가면서 당시 중국은 말 그대로 '학벌이 철폐된' 사회를 실현했다.

그러나 사인방의 체포와 함께 문혁이 끝나면서 대학도 다시 문을 열고 또 지금까지 '못배웠던 한을 풀자'는 소위 '문화열'이 일어나면서 중국 곳곳에서는 엄청난 지식경쟁과 학벌경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문혁시기에 강제로 배움을 차단당했던 세대들을 일컬어서는 '憤靑'(분노의 청춘)이라고도 지칭하고 문혁 이후 지식과 학벌경쟁에 내몰린 초기의 세대들에게는 '文靑' 이라는 호칭을 그리고 요즘같이 그 경쟁이 극에 달한 세대를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초췌한 청춘들'이라는 별칭을 달아주었다. 즉 경쟁에 치여서 늘 힘이 없고 얼굴빛이 파리하게 초췌해져가는 가련한 청춘들이라는 것이다.

현재 중국의 고위관료사회나 지식사회에서 학벌이 지배하고 있는 현상은 쉽게 관찰될 수 있다. 지난해 4월29일 개교 90주년을 맞아 거국적인 기념행사를 치렀던 중국 최고의 명문대학인 칭화(淸華)대학교 출신들이 정계와 학계 등에서 차지하는 비율만 봐도 쉽게 드러난다.

베이징대와 더불어 중국에서 양대 명문으로 손꼽히고 있는 칭화대의 부상은 특히 개혁개방 정책 이후 더욱 두드러지고 있으며, 이것은 최근 중국 대학가에 '지는 베이징대, 뜨는 칭화대'라는 새로운 비유를 낳기도 했다. 즉 베이징대가 전통적으로 인문사회과학 방면의 최고봉인데 반해 칭화대는 과학기술 계통 방면의 '주석'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베이징대의 몰락'이라는 다소 과장된 비유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중국에서도 이른바 '돈이 안 되는' 인문사회과학 계열의 학문이 퇴조하고 있다는 것과, 이와는 반대로 칭화대의 떠오르는 위상은 중국정부가 과학기술 정책에 국가의 미래를 걸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현재 칭화대 출신의 대표적인 국가급 지도자 중에는 국무원 총리 주룽지와 국가부주석 후진타오, 국무원 부총리 우방궈 등을 꼽을 수 있으며, 이외에도 수많은 부총리들과 300여 명의 성급 고위간부들을 배출해 왔다. 뿐만 아니라 지지난해 2월 선출된 34명의 양원원사(중국과학기술원과 중국사회과학원 원사)중 칭화대 출신이 14명이나 차지해 소위 중국 엘리트 사회에 부는 '칭화현상'의 실체를 실감케 한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칭화군단'의 등장이라고도 비유하고 있어 이들 칭화군단이 현재 중국사회에서 새로운 '파워집단'을 이루고 있다는 것과 동시에 이들이 중국의 학벌경쟁을 부추기는 모순이 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얼마 전 베이징의 국제전람중심에서 열린 '2002년 졸업생 구인박람회'는 올들어 열린 최대 규모의 인재박람회였는데 이 박람회에 참석한 약 6만명 이상의 졸업예정자들이 하나같이 털어놓는 불만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학력에 대한 요구가 너무 높다는 것과 대부분의 기업이 대학원졸업 이상을 원했다는 것.

"공부? 그건 돈많이 벌고 예쁜 여자를 얻기 위해서 하는 거야"

우리들은 모두 공부를 왜 하는 것일까? 내가 초등학교 시절, 우리 부모님들은 시골에서 조상대대로 지어오던 농사를 포기하고 과감히 서울이주를 감행하셨다. 오로지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서'라고 하시며.

그러나 서울에 와서 '좋은 교육'을 받은 나는 정작 공부를 왜 했을까? 역시 어렸을 적에는 막연히 '훌륭한 사람'이 돼보겠다는 꿈과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지금의 결과가 그 '훌륭한 사람'이 되어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행히도 '조국의 발전에 공헌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어마어마한 포부를 가지지는 않았으니 결과의 부담은 덜한 셈이다.

그렇다면 '학벌이 곧 생존'이라고 하는 '사회주의적 발상'을 가지고 있는 중국인들은 공부를 왜 하는 것일까.

"너희들은 자신들을 위해서 공부를 하는 것이고, 공부를 해야지만 능력과 재능이 생기며, 어른이 되어서도 성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높은 보수와 훌륭한 대우 심지어는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미녀도 얻을 수 있단다. 그래서 공부를 해야만 한단다."

이러한 다소 당돌(?)하면서도 이보다 더 명쾌할 수 없는 '답변'은 중국의 모 중학교 교사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이 중학교 교사는 공부하기를 싫어하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아마도 공부를 해야만 하는 목적에 대해 보다 더 설득하기 쉬운 '아이같은' 논리를 찾다보니 나중에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위와같은 '대답'을 들려준 것이다.

이 '발언' 이후, 지나치게 '소신 있었던' 그 교사는 당장 목이 날아갔다. 그리고 또한 지난해 중국을 떠들썩케한 '한해의 인물'로도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이 교사가 '짤린' 이유는 이른바 교사로서의 교육적 윤리와 도덕심을 저버렸다는 것이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공부해야만 하는 이유를 "돈많이 벌고 미녀를 얻기 위해서"라는 저질적 발언을 했다는 것이 주요한 해직 사유인데 그러나 일부에서는 그를 동정하는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즉, 까놓고 말해서 그러한 '이유들'이 아니면 '뭘 위해서' 공부를 하느냐는 것이다. 설마 아직 '머리에 피도 안마른' 아이들에게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위해서' 공부해야 한다는 고상한 사상을 주입시켜야 하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그를 동정한 일부 언론에서는 그의 말을 "책 속에 금이 있고 옥이 있다"라고 한 옛 성인들의 가르침에 대한 '현대판 해석'이라는 면죄부를 주기도 했다.

학벌, 그 씁쓸한 '존재의 합리성'에 대하여

다시, 내 '고국'의 학벌문제로 돌아오자니 숨이 '턱'하고 막힌다. 한부총리가 제시한 학벌타개를 위한 '학력란 폐지' 주장이라고 하는 그 제안의 긍정적인 점들에는 심정적으로 수긍이 가지만 그것의 현실적인 실효성, 그리고 학력란을 폐지한들 '서울대 군단'으로 대변되는 우리 사회의 실질적인 '파워구조'가 무너질 수 있을까라는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고개를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그 '모순'을 푸는 재주란 나의 잔머리에서도 역시 영원히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동의할 수 없는 사실은 김용갑 의원이 말했다는 '사회주의적 발상'이라는 것과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흔드는 발상'이라는 어법이다.

사회주의 사회라고 자처하는 중국에서도 그러한 혁명적인 '사회주의적 발상'을 들어보지 못했다고 앞에서 구구절절 얘기했으니 이 문제는 넘어가기로 하고, '학력란 폐지'가 도대체 무슨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흔든다고 '무식한 소신'을 주장하시는 것인지.

자유민주주의라고 하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결합된 체제라고 이해하는데, 대학교 일학년때 교양으로 들었던 '정치학 개론'을 떠올리자면 자유주의는 시장경제 질서 속에서 사유재산권을 기초로 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영리추구의 자유'가 골자이고 민주주의라고 하면 '다수 대중에 의한 지배'라는 고전적인 의미에 모든 개인들의 정치적, 신분적인 평등이라고 하는 '평등' 개념이 그 골자라고 배웠다.

그런데 '학력란 폐지'라는 주장 속에 개인들의 '영리추구의 자유'를 저촉하고 '평등할 권리'를 위협할 수 있는 발상이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오히려 학벌사회가 조성하는 사회적 불평등 분위기야말로 자유로운 개인들의 '영리추구의 자유'와 정치적, 신분적 '평등'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만일 이것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흔든다고 할 것 같으면, 공부해야만 하는 목적이 '돈많이 벌고 미인을 얻기 위해서'라고 말한 중국의 모 중학교 교사의 발언이 사회주의교육체제를 흔들었다고 그를 해직한 '사회주의적 발상'보다도 더 저질스러운 발상이다.

타국에서 매일 한 번씩 '쓰윽' 고국의 소식들을 클릭하는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나의 고국은 아직도 한참 '자유민주주의' 정신이 부족한게 탈이다. 그리고 너무나 '무식한 소신'을 함부로 뇌까리시는 분들의 그 무한한 '자유'가 지나치게 많이 보장되어 있는 것도 탈인 듯하다.

질낮은 '자유민주주의자들'보다는 좀더 고급스럽고 수준있는 '자유민주주의자'들로부터 학벌이 존재해야만 한다고 하는 '존재의 합리성'에 대한 이야기들을 듣고 싶다. 아니면 차라리 중국 관료들의 태도처럼 대안이 없으면 솔직하게 "일단 폐지한 후에 당분간 (상황을)지켜만보고, 입장표명은 하지말자"고 그러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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