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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요즘 또 '색깔론'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오랜 세월 강고하게 유지되어 온 색깔론의 위력을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어떻게든지 그것의 효력을 오늘에도 확대재생산하면서 물고 늘어지려는 사람들 덕분이다. 그들이 오늘도 전가의 보도인 양 휘둘러대는 색깔론에는, 다시 말해 그들이 색깔론을 활용하려는 것에는 대략 두 가지의 속내가 담겨져 있는 것 같다. 하나는 북한과 능히 연결시킬 수 있는 좌파적 사상 자체를 겨냥하면서 무조건적으로 죄악시하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상대방의 본질이야 어떻든 일단 의심을 하며 음해를 가하고자 하는 뜻이다.
그 동안 그것이 통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특수한 상황 때문임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항이다. 국토가 양분되어 엄청난 전쟁을 겪은 후에도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참혹한 분단 현실이 그것의 위력을 가능케 했다. 그리고 일괄적으로 '붉은 색'으로 포장할 수 있는 특별한 사상이나 정신에 대한 철저하고도 무자비한 박멸 노력이 그것의 위력을 한껏 고조시켰다.
어느 시대든 부정시되고 죄악시되는 것들은 그것의 본질에 대한 명확한 인식만으로 죄악의 자리에 놓이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박멸코자 하는 무자비한 탄압의 피비린내가 불러일으키는 공포감이 독특한 사회 분위기를 형성하고 당대의 사람들에게 조건 반사적인 관성을 심어줌으로써 타매의 자리에 놓이게도 되는 것이다.
오랜 세월 그런 극단의 상황을 살아오면서도 자칫 좌파로 분류되기 쉬운 진보 세력의 발걸음이 멈추어지지 않았고 오늘날 더욱 확실한 역사 발전의 추동체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이른바 보수 세력임을 자처하며 걸핏하면 색깔론을 무기 삼아 휘둘러온 사람들이 안고 있는 맹점과 반민족적이고 반민주적인 속성이 끊임없이 제공해 준 명분의 확실성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반공 이데올로기의 불안한 기반 위에서 색깔론이라는 재래식 무기를 한사코 사용하려 드는 사람들의 속성을 추적해 보면 반민족적인 친일 이력이나 친일 이력을 재빨리 친미 반공으로 둔갑시킨 기회주의와 사대주의의 실상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깔고 앉은 단단한 기득권의 똬리를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실은 그 기득권의 수호 의지가 그들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핵심 사항이다. 오랫동안 독재 권력과의 밀착 속에서 향유해 온 기득권의 수호를 위해서는 반공 이데올로기와 국민 대중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색깔론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그 세월이 길었던 만큼 그들은 오늘도 그것이 유효한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국민 대중을 예전처럼 통째로 좌지우지하지는 못하더라도 반공 이데올로기의 고수와 색깔론의 확산은 얼마든지 남북 관계를 계속적으로, 또는 더더욱 경직시킬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북한의 체제를 효과적으로 도와주는 것임도 그들은 알고 있다. 그러므로 색깔론의 진정한 목적은 남북의 영속적인 대치와 살얼음 같은 긴장 관계의 지속이다. 그들은 곧잘 북한의 자연 붕괴와 흡수 통일을 주장하지만, 그것은 남한의 체제를 과신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우월감의 표시일 뿐 진정한 통일 지향과는 거리가 멀다. 오늘도 여전히 반공 이데올로기와 색깔론으로 통일 세력을 비난하고 타매하는 그들은 민족의 통일이라는 대의보다는 남북의 지속적인 긴장 관계 속에서 유지될 수 있는 자신들의 기득권이 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색깔론은 다분히 국민 대중을 볼모로 잡으려는 수작이다. 어찌 보면 그들은 세상의 수많은 색깔들 중에서 빨간색이나 일정한 색만을 볼 수 있는 부분 색맹일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는 가장 뚜렷한 대비색인 흑백(黑白)이나 청홍(靑紅)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색은 다른 색들과 잘 어울려야 존재 가치가 증명되고, 조화미를 발현할 수 있다. 빨간색만 하더라도 조금씩 다른 같은 계열의 색깔들이 참으로 많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색깔들이 많은 그 다양성은 서로 돕고 어울리며 조화미를 추구해야 할 이 세상의 이치를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색깔론자들은 같은 계열의 색깔들은 으레 한가지 색으로만 구분한다. 그것은 무지와 근접하는 그들의 약점이기도 하고, 오랜 관성에 의한 상투적인 수법이기도 하다. 그들은 분홍이나 자주색도 빨간색이라고 말할 수 있고, 심지어는 노란색도 붉은 색이라고 억지를 부리기도 한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 '혈안'이 되기도 한다.
비록 예전 같지는 않더라도 그들의 그런 혈안으로 말미암아 효력이 전무하지는 않은 것 같다. 오랜 세월의 관성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도 우리 주변에는 꽤 있기 마련이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사례를 하나 소개해 보겠다.
내년이면 팔순이 되시는 내 어머니는 천주교회의 한 신자 모임에 열심히 참여하신다. 매주 목요일 오전의 회합에 거의 빠지지 않는데, 회원 중에 황해도에서 월남한 실향민 할머니가 한 분 계신 것을 나도 익히 알고 있다.
그런대 그 실향민 할머니는 기이하게도 현 민주당 정권의 '햇볕정책'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햇볕정책이 궁극적으로 민족 통일을 지향하면서 남북 교류와 이산가족 상봉을 가능케 하는 것임에도, 자신이 비록 월남 실향민이긴 해도 이산가족이 없기 때문인지 (또는 별로 그리움이 없기 때문인지) 그 할머니는 남북한의 접촉과 교류 자체를 몹시 못마땅하게 보는 것이다.
그 할머니의 가족들은 오래 전부터 '김대중은 빨갱이'라는 믿음을 가져왔다. 자민련이 충청도를 처음 석권하던 시절부터 '충청도의 자존심'을 위해 자민련을 지지했던 그들은 자민련이 민주당과 손을 잡은 지난번 대선 때도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반감 때문에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에게 표를 주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자 그들은 이런 말을 했다.
"빨갱이가 대통령이 되었으니 인제 큰일이여. 두고 봐. 인제 이 나라는 망허구 말 테니께."
그 할머니는 2000년 6월의 남북 정상회담과 전국을 눈물바다로 만든 이산가족 상봉을 보면서도, 그것을 빨갱이 김대중이 나라를 물 말아먹는 조짐으로 보았다. 김대중이 대한민국을 김정일한테 들어바치는 것으로 보면서,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 직후에 했던 '곧 나라가 망하고 말리라'는 자신들의 예언이 들어맞고 있는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었다.
다음 대선에서는 이회창 씨를 찍기로 아주 일찌감치 마음을 정해 놓고 있는 그 할머니가 최근의 모임 자리에서 (정식 모임 후에) 이인제 씨 얘기를 하며 또 한번 색깔론을 제기했던 모양이다. 김대중이 때문에 나라가 온통 빨갱이 천지가 되었다고 개탄을 하더라는 것이다.
참지 못한 내 어머니가 한마디를 하셨다고 한다.
"그런 식으로 말허면, 굶주리는 북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사람, 평화 통일을 허자구 허는 사람은 죄다 빨갱이겄네?"
그 할머니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고 한다.
"아무래두 빨갱이 물이 들었으니께 그런 일을 허는 거 아니겄남?"
"그럼, 일년에 두 번씩 만주에 가셔서 감자 농사를 지어 갖구 북한으로 보내 주시구 허는 우리 신부님도, 북한 동포 돕기 모금 운동을 헌 우리 아들도 다 빨갱이겄네?"
"지금 세상에 나 빨갱이요 허는 사람이 있간디…."
"지금 세상에 예수님이 우리 곁에 기시다면 워떻게 허실까? 예수님도 틀림없이 빨갱이루 몰릴 것 같은디…."
"그거야 예수님 마음이겄지…."
"그렇게 말 같지 않은 소릴랑 허들 마. 우리가 뭣 때미 하느님을 믿구 승당일 다니는 겨? 우리가 승당에서 배우는 게 뭐여? 사랑 아녀, 사랑?"
"그거야 그렇지먼…."
그 할머니가 다음 말을 잊지 못하고 골이 난 표정이기도 해서 어머니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그 할머니보다 그 할머니 가족을 그렇게 만든 수구 정치인들과 보수 언론들의 오랜 행투를 떠올리며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다.
어제 저녁에는 올해 중3인 딸아이와 제법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딸아이는 색깔론의 정확한 뜻과 그 말이 쓰여지게 된 배경이며 유래 등을 알고자 했다. 자연히 제정 러시아의 볼세비키 혁명이며, 공산 혁명을 상징하는 소련의 적기(赤旗)며, 빨갱이 사냥으로 불리는 1950년대초 미국의 '매카시 선풍'이며, 우리 나라 해방 공간 시절의 좌·우 이념 대립이며, 1990년대 들어 촉발된 소련의 해체와 동구권 국가들의 공산주의 체제 붕괴며,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스 언론과 수구 세력이 오랫동안 획책하고 조장해 온 색깔론의 위력이며…어린 딸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을 수 없었다.
끝으로 나는 우리 나라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들에 대한 개혁과 사회 정의, 남북 교류와 평화 통일을 소망하는 내가 이미 인류의 보편적 삶에 소용가치가 별로 없음이 증명된 공산주의 이념과는 전혀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설명했다. 공산주의, 또는 공산 혁명을 표징하는 빨간 물과 상관없이 나는 몸 속에 붉은 피를 지니고 사는 사람이며, 몸 속의 붉은 피 때문에 가슴이 더욱 뜨거울 수 있음을 설명했다.
내 이야기를 다 들은 딸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재미있는 말을 했다.
"빨간 색을 그렇게 나쁘게 생각하고 혐오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 몸 속의 피가 붉다는 사실을 견딜 수 있을까요? 색깔론을 가지고 상대방을 의심하고 공격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몸 속의 피가 빨간 색이 아닌가 봐요. 그죠?"
"아냐. 그 사람들도 몸 속에 빨간 피를 가지고 있어. 그 사실을 잘 모르거나 일부러 망각하고 있을 뿐이지."
"그 사람들은 혹시 자기 몸 속의 피가 파랗거나 하얗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글쎄…. 어쩌면 실제로 그럴지도 모르지."
"그럴 거예요. 아무래도 피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북한 동포들을 돕고 서로 만나고 하는 일에 대해서도 그렇게 시비를 걸고 야단법석을 떠는 걸 거예요. 북한 동포들보다 미국이나 일본의 이익이 더 중요하고…."
"그래, 네 말이 맞다. 이제부터는 색깔론을 휘두르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일단 그들의 피 색깔을 의심해 보기로 하자. 우리네 보통 사람들과 피의 색깔이며 성분이 어떻게 다른가를 알아볼 수 있으면 알아보면서…."
그리고 오십대인 아버지와 십대 어린 딸아이는 즐겁게 웃었다. 요즘 또다시 기승을 부리는 색깔론이라는 것이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결론이었고, 우리는 그 결론이 몹시 즐거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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