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국 선생이 <친일문학론>을 펴낸 것은 1966년 8월 15일이었다. 나는 지금 두 권의 <친일문학론>을 갖고 있는데, 헌책방에서 먼저 사두었던 것을 다른 책들 사이에서 찾을 수가 없어 따로 하나를 애써 장만한 때문이었다.
내게는 이렇게 두 권씩 있는 책이 스무 권 남짓 한데 그것은 모두 그들 책에 대한 나의 존경과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찾는 눈앞에 그 책이 없을 때 나는 내 머리속에 어떤 공동(空洞)이 생겨나는 듯한 고통을 느낀다. 각설, 거기 <친일문학론>에 '자화상'이라 이름붙인 선생의 서문을 보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서푼짜리 자만심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이 책을 제일 흥미깊게 읽을 사람은 끝까지 붓을 꺽은 작가들이 아닐까 한다. 그들은 그들이 살아온 고난의 세월을 회상하면서 모든 유혹을 물리쳤다는 승리감에 새삼스러운 감격과 희열을 느낄지도 모른다. 이런 것이 철없는 생각이 아니라면 지금은 거의 작고한, 그러나 더러는 생존해 계신 그분들의 노후에 그런 감격이나마 드릴 수 있었다는 것을 필자의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겠다."
나는 국문학 전공자인 탓에 선생의 책을 빈번히 들여다 보지 않을 수 없었거니와 그 목차에 열거된 '친일문학인'들의 명단을 볼 때마다 깊은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가나다 순으로 세로로 무심하게 서 있는 이름들, 김동인, 김동환, 김문집, 김사량, 김소운, 김안서, 김용제, 김종한, 김팔봉, 노천명, 모윤숙, 박영희, 백철, 유진오, 이광수, 이무영, 이석훈, 이효석, 장혁주, 정비석, 정인섭, 정인택, 조용만, 주요한, 채만식, 최재서, 최정희……, 그리고 신인작가 기타, 그리하여 본문에서 명단은 계속 이어지는데, 곽종원, 김경린, 조연현 같은 알만한 이름들이 줄지어 서 있는 풍경을 바라보다 보면, 그것은 마치 수의를 입고 열지어 서 있는 죄인들의 이름같다.
이 이름들을 보면서 한국문학에 애정을 갖는 그 누가 고통을 느끼지 않으랴. 그러나 임종국 선생의 <친일문학론>은 바로 그렇기에 거대한 의미를 갖고 있다. 누군가 끝내 붓을 꺽고 있을 때 곡필을 행한 이들이 해방 후 버젓이 문단을 휘젓고 다니는 기막힌 현실 앞에서, 그러나 그들의 위세에 굴하지 않고 스스로 입신의 욕망을 꺽으면서 진실을 진실답게 드러낸 선생의 작업이야말로 해방 후 한국 비평의 가장 위대한 업적 가운데 하나이다. 그로써 문학인이 역사를 참으로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제 그 <친일문학론>으로부터 36년이 지났다. 조선이 일제에 병합되었던 만큼 긴 시간이 흘러갔다. 36년이라면 강산이 세 번 바뀌고 한 세대가 그 주류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퇴장할 만큼 긴 시간이다. 나는 생각한다. 임종국 선생 이후의 '친일문학론'은 어떤 형상을 가져야 하는가.
역사적 국면이 바뀔 때마다 부침을 거듭해온 '친일문학론'은 미당이 타계한 후 다시금 세인의 관심사가 되었다. 마침 올해는 대통령 선거가 있어 정국을 따라 더 그러하기도 하다. 그런 지금 나는 이제 <친일문학론>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20대 초반을 훌쩍 벗어나 30대 후반이 되었다. 그런 나는 오늘의 10대, 20대가 용케도 일제하 대일협력 행위의 심각성을 자각하고 민주주의적 가치를 신봉함을 보면서 다행스러움을 느낀다.
그렇다. 시대가 다소 편해졌다고 해서 의식이 더불어 녹스는 법은 없다. 오히려 열린 시대는 더 예민하고 근본적인 사유를 가능케 한다. 흔히 '친일'이라 운위되는 일제하 대일협력 문제는 앞으로 더 깊은 관심사로 떠오를테다.
그러면서 나는 임종국 선생 이후의 '친일문학론'이라는 것을 생각한다. 오늘의 문학인들은 그와 같은 중요한 문학적 주제에 무엇을 더 보탤 수 있을까. 그들 또한 그이처럼 실증적으로 '친일'을 행한 이들의 행적과 문필행위를 조사, 연구, 비판해야 할까? 나는 그와 같은 작업이 의미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한 작업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에피고넨의 작업이다. 1966년의 <친일문학론>이 세운 뜻을 넓혀갈 뿐 '친일문학론'의 차원을 높이는 작업은 되지 못한다. 또는 어느 작가, 어느 시인도 '친일'을 했더라는 쇄말성에 빠져 '친일문학론'의 함의를 오히려 좁혀 버리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나는 임종국 선생의 <친일문학론>에 담긴 가장 큰 뜻이 문학인의 역사감각을 회복시킴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왜 그런 부끄러운 행위를 범하고도 그렇게 떳떳이 백주를 활보할 수 있는가. 일제의 선전대가 되어 종군을 독려하던 이들이 다시금 권력을 쥐고 문단을 좌우하고, 저항했던 이들을 희롱하는 현실을 선생은 좌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같은 비판의식을 문학인의 '모랄' 문제에 관한 탐구로 심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앞에서 말한 그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도 있다.
"이제 친일문학론을 쓰면서 나는 나를 그토록 천치로 만들어 준 그 무렵의 일체를 증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신라, 고구려의 핏줄기인줄 알았던들 나는!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지나간 사실, 지나간 사실이기 때문에 지나간 사실로서 기록해둘 뿐인 것이다."
임종국 선생은 1929년생이다. 17세로 해방을 맞이했을 때 당신은 김구가 정치하러 조선에 들어온 중국사람인 줄만 알았다고 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각해 본다. 그것은 극한적인 상황 아래서 투쟁과 저항을 계속하고 있던 소수의 좌파 지하운동가들과 해외 망명객을 제외한다면, 한반도의 조선인들은 그이가 말한 그 '천치' 상태에 놓여 있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해방은 한밤 도둑처럼 그렇게 예고 없이, 준비 없이 찾아든 손님이었다.
그렇다면 일제하 문학인들은 그 정신의 백치 상태를 주도한 이들이었을까, 아니면 스스로 그 상태의 일원으로 그것을 구성하고 있었을 뿐일까. 나는 둘 다 맞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조선인들에게 징용과 징병을 선전한 이들이면서 동시에 그런 시류에 농락당한 이들이기도 했다.
임종국 선생은 엄정한 역사가의 시선으로 "지나간 사실이기 때문에 지나간 사실로서 기록해둘 뿐"이라고 했다. 나는 이 역사가의 시선을 존중하면서도 사실을 사실로써 기록함을 넘어 그 내적 의미를 탐구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어느 문학인이 대일협력의 죄를 범했다면 그것은 사실로써 죄임과 동시에 그 사람의 정신 균열의 문제이다. 나는 지금 그 죄를 물을 만큼, 또는 그보다 중요한 것이 그 정신 균열이 왜 초래되었으며 그들은 그것을 어떻게 초극하려 했는가를 묻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즉 제각기 다른 '친일'의 내적 논리를 탐구하고 그이들 각인이 그로써 공동체와 자기를 어떻게 다시 관계지우려 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와 같은 모랄의 문제가 '친일문학론'의 현단계가 되어야 한다. 왜일까?
우리는 손님처럼 닥쳐온 해방 앞에서 마냥 떳떳해서만은 안될, 바로 그 사회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과거가 현재에 대해 책임이 있다면 현재 역시 과거에 대해 책임이 있다. 현재를 구성하는 타자에게만 책임이 있고 '나'는 그 책임에서 면죄될 수 없듯이. '죄'를 비판하는 차원을 넘어 '죄'의 의미를 탐구하고 그것이 타자의 것일 뿐 아니라 내 속에 든 것일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할 때 비로소 문제의 해결은 시작된다.
나는 임종국 선생의 <친일문학론>을 교과서처럼 옆에 두고 읽는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간행된 1966년과 현재 사이에는 시간적 거리가 있고 그만큼 커다란 의미 차이가 있다. 이것을 구별하지 않는 흐름을 보면서 나는 그 일제하 대일협력이라는 문제의 난해성을 문자 그대로 실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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