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십자각의 밤 불빛을 바라보다

등록 2002.05.06 18:21수정 2002.05.06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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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복궁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도 유감이 많은 나이고 그곳 돌아보기를 무서워하는 나이다. 조선 왕조의 얼굴과도 같은 그곳의 오늘날 모습은 그야말로 만신창이, 넝마의 그것이라 해도 절대 과장이 아니다.

국립박물관이니 민속박물관이니 우람하게 지어놓기는 했는데 기실 그것들이야말로 천하에 더없을 추물이라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도대체 경복궁이 일개 놀이문화공간이란 말인가. 국립박물관을 지나쳐 더 들어가 보면 웬 서양식 건물이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는데 이는 경복궁의 남루함을 솔직하게 풍자하고 있는 듯하여 차라리 덜 답답하다.


기념품을 파는 가게며 휴식 공간은 왜 그렇게도 생뚱맞은가. 한 나라의 왕궁 안에 있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 거기 그렇게 부끄러움도 없이 버젓이 앉아 장사를 하고 있다. 궁궐 안은 파내려가 주차장을 만들었으니 이는 또한 어느 님의 발상인가. 하나씩 짓고 만들 때마다 경복궁은 오히려 모욕을 당하는 꼴이었으니, 최근의 복원 사업은 여러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한가닥 위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젯밤 나는 경복궁 돌담을 끼고 삼청동을 내려와 동십자각을 지나치고 있었다. 누군가 동십자각을 독도처럼 홀로 궁궐에서 떨어져 나온 전각이라 표현한 적이 있다. 본래 동십자각은 궁궐 안에 있어야 하건만, 궁궐이 오그라들고 길이 난 자리에 그것 혼자 외따로 서 있어 꼭 자동차 행렬에 갇힌 형국을 취하고 있다.

평소에 나는 이 전각을 경복궁의 누추를 증명하는 것으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어제는 달랐다. 대개 그 인근에 자리한 출판문화회관에서 저녁 행사를 마치고 사람들과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 동십자각을 스쳐 지나가던 때와는 달리 어제밤 나는 혼자였다.

혼자 물끄러미 바라본 동십자각은 밤불빛에 제 아름다운 단청빛을 비추며 외롭게 서 있었다. 노오란 전구색에 비친 동십자각 낡은 단청빛은 아름다웠고 신비로웠다. 그것은 아래에서 위로 쏘아올린 푸른 불빛에 드러난, 저 성수대교의 자태로는 절대로 따라갈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을 무엇이라 이름할 수 있을까.

말하자면 그것은 현대의 불빛에 드러난 고태(古態)였으니, 그 불빛이 없었더라면 동십자각은 일 개 음울한 '이조'의 전각에 불과했을 것이며, 동십자각이 없었더라면 그 불빛은 흔하디 흔하여 값싼 알전구빛에 불과했을 것이다.


낮에 광화문을 지나쳐가며 그 안쪽으로 새롭게 복원된 전각들을 보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위안을 삼을 때가 있다. 그러나 경복궁은 근본적으로 개조되고 복원되지 않으면 안되리라. 나는 그와 같은 일들이 서울 100년 계획을 요하는 긴 사업을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다고 믿는다.

서울은 어느 때보면 영낙없는 싸구려 장바닥 같다. 하지만 달리 보면 옛 정취가 곳곳에 숨어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정작 가슴 아픈 것은 그것들마다 상처를 입지 않음이 없음이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지 않는 곳에는 진정한 미래도 없을 것이다. 내일 역시 오늘의 수준을 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흉터를 안고 숨어 있는 옛것들을 보듬어 안고 치유하여 오늘의 존재로 되살려내지 않는다면 한국문화는 오래도록, 순간적인 현재만을 위한 문화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후진적인 문화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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