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 때 추억 한 토막

방민호의 <문화칼럼>

등록 2002.05.17 00:33수정 2002.05.18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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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중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성함이 전용숙이라고, 국어 선생님이셨다. 어제 스승의 날이었던 까닭에 우연히 옛날 일을 이야기하게 되었는데, 그러다 회상이 그분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나의 세대가 중학교를 다닐 때는 한 반의 학생수가 대개 칠십 명에서 칠십오륙 명까지 육박하는 콩나물교실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우리 2학년 8반은 학생수가 그 절반에 불과하였으니 이유인 즉슨 교실이 다른 반의 반토막 크기밖에 안되는 데 있었다. 교사(校舍)를 지을 때 그렇게 지은 건지 아니면 공간을 나눠 쓰다 보니 그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여하간 나의 2학년 8반은 다른 반에 비해 완연히 가족적인 분위기를 유지했다는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바로 그해 전용숙 선생님이 시집을 가셨다. 남편 되는 분은 병원에서 레지턴트 과정을 밟고 있었던 분이었고 두 분 다 아마도 가톨릭 신자였을 것이다. 우리는 선생님의 신혼을 위해 조그만 소반 하나를 선물해 드렸지 싶다.


이렇게 그분 이야기를 쓰다 보니, 따사로운 봄날 날씬하다 못해 마른 몸매를 지니셨던 그분이 즐겨 입으시던 흰 블라우스에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분홍치마가 지금 내 눈앞에서 가벼운 봄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것 같다.

학생수가 작아서 그랬는지 몰라도 1학기 때 선생님은 우리를 데리고 대전 교외의 산내리 쪽으로 반소풍을 가셨다. 우리는 학교 구기인 럭비 공을 하나 들고 시내 버스가 끝나는 종점에서 내려 재잘거리며 봄길을 걸어 봄의 들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러다 럭비 놀이를 하기에 안성맞춤일 싱그러운 풀밭을 하나 발견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풀밭으로 뛰어 들어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킥앤러시, 러시앤킥을 연발하며 누가 오는지 가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

한 시골 아낙네 분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달려와서는, 도대체 어떤 놈들이 남의 보리밭에 들어가 난장판을 만드느냐고, 우리들 옷자락이 잡히는 대로 손찌검을 하고 가방을 빼앗고, 보리 농사 다 망치게 생겼으니 집이 어디냐, 어디 다니는 놈들이냐, 돈 물어내라 하는 것이었다. 그날 산으로 도망가 그 다음날에나 만날 수 있었던 친구들이 여럿이었다.

그리고는 길가에 서서 우리들 노는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계시던 선생님을 향해 육두문자를 남발하며, 아니, 애들이 철이 없어서 남의 보리밭을 거덜을 내는 걸 보고도 말릴 생각도 안 하고 구경만 하고 있는 너는 도대체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냐 하는 식으로 따져대기 시작했다.


선생님도 우리도 대전이 그래도 명색이 도시라고, 봄철 보리밭 구경을 해본 적 없었던 것이 화근인 셈이었으니, 선생님은 얼굴이 새빨갛게 상기 되셔서는 아무 말씀도 못하신 채로 곤욕을 치르고 계시고 우리는 우리대로 선생님이 선생님인 것이 탄로가 날까 봐 어정쩡한 낯빛으로 아낙네분께 죄송하다는 말씀만 주억거릴 뿐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 그후에도 우리는 다른 데로 반소풍을 갔었던 것 같은데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 혼나던 일이 너무 인상적이었던 때문일 것이다. 우리들을 데리고 일요일을 쪼개 반소풍을 가신 선생님, 그 분이 아침 조회 때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은 칠판에 시 한 편을 쓰시고 우리로 하여금 낭송케 하는 것이었다.


몇 년 전 불현듯 선생님이 생각 나 인터넷 사이트를 뒤져 가며 그분이 계실 만한 곳을 찾아본 적이 있었다. 찾을 수 없었다. 아마도 선생님직을 그만 두시고 의사의 아내로 살아가고 계신 모양이었다.

생각하면 더 그리워지는 선생님이다. 어렸을 적 마마를 앓으셔서 얼굴이 살짝 얽으셨던 그 분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의 크기가 지금 이 순간 나의 마음을 먹먹하게 한다. 그렇겠다. 이런 분들이 계셔서 열악하기 그지 없는 교육환경 속에서도 소년들은 꿈을 꾸며 자라고 가슴 속에 봄날의 보리밭 한 자락 품은 어른이 되겠다. 선생님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계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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