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연못

<교육 장편 소설> 그 집의 기억 19

등록 2002.05.06 11:19수정 2002.05.07 12:57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여덟 시 이십 이분. 나는 후다닥 전철 개찰구를 빠져나온다. 잰 걸음으로 가면 오 분 남짓, 그러면 이십 칠 분. 아슬아슬하다. 오늘따라 늦잠을 잔 터라 마음이 더 급하다.


앞 차만 탔더라도. 그런 생각이 자꾸 든다. 어제 늦게까지 잠을 못든 탓이다. 읽다 둔 책을 끝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으니 늦잠을 자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자명종 시계를 눌러놓고 한참을 더 잤으니 아침은커녕 간신히 세수하고 나온 것만도 다행이다. 공교롭게 집사람까지도 함께 늦잠을 자버렸으니, 안 되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지는 법인가.

부부가 쌍으로 잠에 취해 있다 갑자기 팽팽하게 신경을 당기는 느낌에 깨나니 벌써 일곱 시 반이 넘어서고 있었다.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다. 그래도 완전히 정신을 잃고 자버린 것이 아니라 이 시간에라도 일어나게 신경줄을 잡아당겨주니.

학교 가는 길에 아이들이 하나도 없다. 이미 다 교실에 들어가 있으리라. 일곱 시 오십 분부터 시작하는 자율학습에도 못 들어가고 이제서야 허겁지겁 학교로 걸음을 재촉하는 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 보이는데, 그래도 햇살은 따사롭다.

평소에는 아이들로 북적거리던 이 거리가 정말 쥐 죽은 듯 조용하다. 아무도 없는 길을 따라 키 큰 포플러만 잎새를 흔들고 있다. 바람도 그저 심심해서 한 번 불어본다는 듯 느릿느릿하고, 잎새는 햇살에 몸을 말리듯 가끔 뒤척일 뿐이다.

개 한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길을 지나간다. 바쁠 것도 없다는 듯 포플러 나무 밑둥에 오줌 한 방울 지려놓기도 하고, 아이들이 등교길에 먹다 버린 빵부스러기를 큼큼대기도 한다. 아이들 모두, 선생들 다 시간에 쫒겨 정신없던 거리에 이제 정지한 시간만이 내려앉아 있다.


머리가 벗겨지고 키가 작달막한 문방구집 아저씨가 물뿌리개로 골목에 물을 뿌리곤 포플러 아래 파라솔에 앉아 조간 신문을 펴든다. 그도 한동안 정신없이 바빴으리라. 공책과 참고서와 문구를 한꺼번에 파는 그의 가게에는 등교시간이면 아이들이 뱀 꼬리처럼 길게 늘어서곤 했다. 미술 실기 준비물이 필요한 날은 더 그랬다. 늘 동동거리며 물건을 파는 그의 모습만 내 기억 속에 남아 있었는데, 오늘 그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세상의 모든 일을 젖혀둔 듯 그는 오늘 너무나 여유작작하다. 얼굴빛도 넉넉해 보인다.

나는 늦었다는 것도 잊고 그런 풍경들을 넋 놓고 바라본다. 갑자기 나 자신도 시간이 정지한 어느 낯선 마을에 들어선 느낌이다. 도시고속화도로 공사장 아래로 군데군데 웅덩이가 더럽다. 물빛이 검푸르다. 둑 아래쪽으로는 잡초들이 무성하다. 그 잡초에도 햇살이 늘어붙는다. 햇살이 시간을 잡아먹고 있는 느낌이다. 내 의사와 무관하게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의 톱니바퀴에서 벗어나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그때 갑자기 내 뒤쪽에서 바쁜 걸음이 들려온다. 먼 데서부터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어느 순간 후다닥 내 곁을 지나간다. 퍼뜩 정신을 차려 보니 한 녀석이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달려 교문으로 들어간다. 지각한 녀석인가보다.

그제야 나도 정지된 시간에서 돌아온다. 그 사이도 시간은 여지없이 흘러갔는지, 벌써 여덟 시 삼십 분이다. 어김없이 차임벨이 울린다. 자율학습이 끝나는 시간이다. 나도 허겁지겁 교문으로 달려든다. 큰 문은 이미 잠겼고, 쪽문만 마지못한 듯 열려 있다.

손수레에 운동장 쓰레기를 담아 치우던 아저씨가 그런 나를 보고 빙그레 웃는다. 나도 멋쩍게 웃고 얼른 교무실을 향해 달린다. 겨우 운동장 가로질러 뛰었다고 자리에 앉자 숨이 턱에 찬다. 막 교실에서 내려온 담임들로 교무실이 그들먹하다. 때맞춰 잘 들어왔군. 선생들이 많이 있는 바람에 교감도 내가 늦은 걸 모르겠지?

가슴을 쓸어 내리며 책상 위를 내려다보던 나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만다. 책상 위에 내 출근 카드가 오롯이 앉아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절반 쯤 붉은 도장이 찍힌 출근카드는 마치 오늘은 왜 내게 도장을 찍어주지 않았느냐고 묻는 것 같아 보인다.
"오늘 늦으셨지요? 교감선생이 정확히 여덟 시 반에 선생님 책상 위에 올려놓고 갔어요."
문 선생이 싱글거린다.
"허, 참. 다른 건 잘 안 지키면서 출근카드는 한 치도 틀림이 없다니까."
나는 힘들게 뛰어 온 게 허사가 되었다는 낭패감에 절로 이죽대는 말투가 된다.

팔십 년대 후반에 없어졌던 출근부가 어느 날부터인가 갑자기 부활되었다. 어쩌다 늦게 오는 경우가 있지만, 대개는 오히려 출근시간보다 더 일찍 오는 게 선생들의 상례였다. 자율학습이나 보충수업 때문에 사실 교사들은 정상 출근 시간인 여덟 시 반이 아니라 빠르면 일곱 시 늦어도 일곱 시 반까지는 오는 편이었다. 억지로 정상보다 일찍 출근을 강요하면서 조금만 늦어도 보란 듯이 출근카드를 선생 책상에 올려놓는 것은 무언의 협박이었다.

교무실을 대중탕처럼 크게 만들어 전 교사를 한군데 몰아넣고 한눈에 좌악 훑어보며 누가 무슨 말썽을 피우지 않나 감시하는 교감 교장의 눈초리가 교사를 장악할 수 있는 유효한 무기 중의 하나인 출근부를 폐기할 리가 없는 것이다. 교과별로 연구실을 따로 가지고, 비는 시간이면 머리를 맞대고 교육 내용을 토론할 수 있는 풍경은 그러므로 우리 나라 교육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괜히 화가 치밀어 도장을 꺼내 소리나게 출근카드의 오늘 치 칸에 쾅 찍는다. 마치 내 얼굴에 도장을 찍는 것 같다. 마침 빈 교감의 책상 위에 출근카드를 툭 던져놓고 자리로 돌아온 나는 그만 털썩 주저앉는다. 마치 퇴근 무렵처럼 몸이 지친다. 오늘 수업은 망칠 게 뻔하다. 수업을 망치면 하루가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다. 겨우 출근 도장 하나 때문에, 오 분 때문에 하루를 망쳐버리다니. 머리를 몇 번 쓸어본다. 머리카락도 내 기분처럼 제 멋대로다. 도대체 한 곳으로 쓸리지 않는다.

교무실을 한 번 휘둘러본다. 모두들 무엇이 바쁜지 부산하다. 겉으로 보기엔 살아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속에 들어가 보면 교무실은 아니 학교는 모두 죽어 있다. 일년 내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비슷비슷한 일이 이어지고, 해가 바뀌면 또 같은 일이 반복된다. 뻔한 일에 타성이 붙어 몇 년이 지나면 이제 모든 일이 심드렁해 진다.

문득 김민기의 <작은 연못>이라는 노래가 떠오른다. 깊은 산 오솔길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마을마다 연못이 하나 있다. 그 연못은 중학교다. 연못 속에는 많은 물고기가 살고 있다. 아이 물고기가 많고, 그 아이 물고기를 기르는 선생 물고기가 있다. 그런데 물고기가 살고 있는 물은 썩어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썩은 게 아니라 조금씩 조금씩 썩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물은 이제 더 이상 새 물로 바꿀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연못에 사는 물고기들 대부분은 자신이 살고 있는 물이 썩었다는 것을, 그래서 모두들 오래지 않아 숨쉬기가 힘들어 질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모르는 채 세월만 흘러간다.

나는 그만 한숨을 내쉬고 만다. 아침 출근길의 따사로운 햇살이 떠오른다. 포플러의 푸르른 잎새들, 느릿느릿 지나가던 개 한 마리, 문방구집 아저씨의 대머리에 내리던 햇살, 아이들이 사라져 텅 빈 길도 되살아난다. 늦게 출근했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에서 잠시 벗어났고, 그 바람에 학교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일까?

날마다 날마다 내 가슴에 화인처럼 찍히는 붉은 출근도장이라는 지칠 줄 모르는 시간의 덫으로부터 잠시 자유로웠던 오늘이 어쩌면 행복한 것은 아닐까? 햇살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교무실의 아침을 밀어내며 일 교시 시작종이 그때, 길게 울린다. 그 소리는 마치 시간의 그물을 다시 내게 휙 던져 씌우는 마법사의 주술처럼 나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게 한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징역1년·집유2년' 이재명 "이것도 현대사의 한 장면 될 것" '징역1년·집유2년' 이재명 "이것도 현대사의 한 장면 될 것"
  2. 2 수능 도시락으로 미역국 싸 준 엄마입니다 수능 도시락으로 미역국 싸 준 엄마입니다
  3. 3 의사 아빠가 죽은 딸의 심장에 집착하는 진짜 이유 의사 아빠가 죽은 딸의 심장에 집착하는 진짜 이유
  4. 4 "나는 폐허 속을 부끄럽게 살고 있다" 경희대 시국선언문 화제 "나는 폐허 속을 부끄럽게 살고 있다" 경희대 시국선언문 화제
  5. 5 미국에 투자한 한국기업들 큰일 났다... 윤 정부, 또 망칠 건가 미국에 투자한 한국기업들 큰일 났다... 윤 정부, 또 망칠 건가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