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가는 꽃

<교육 장편 소설> 그 집의 기억 18

등록 2002.05.02 09:09수정 2002.05.04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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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날, 아이들이 손에손에 꽃 한 송이씩 들고 나타난다. 가방이 없어 더없이 편한 표정이지만,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는 교사들의 표정은 괜히 쑥쓰럽고 어색하다. 몇몇은 아예 꽃바구니를 들고 온다.


나는 멋쩍어 하며 교무실로 미적미적 들어선다. 다른 날 같으면 쫒기듯 들어서는 출근 시간이 이날만큼은 느긋하다. 늦게 출근하고 일찍 끝나는 날, 그러나 일찍 끝나서 좋은 것이 아니라 억지 춘향으로 아이들에게 감사를 받는 날이라서 얼굴이 벌개지고 마음 한 구석 자괴감 같은 것이 드는 날이다.

교무실, 선생님들 책상 위 군데군데 꽃바구니가 놓여 있다. 내 자리에도 몇 송이 카네이션이 누워 있다. 카드도 눈에 띈다. 카네이션을 책꽃이에 꽃아 놓고, 카드를 펼쳐본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일 학년 7반 박민웅>
비뚤빼뚤한 글씨다. 그러나 한 바구니 꽃보다는 훨씬 정겹다.

"한만수 선생님 자리가 어딥니까?"
커다란, 너무나 커서 아름드리 꽃나무를 보는 것 같은 바구니를 든 잠바 차림의 사내가 우렁우렁한 소리로 묻는다.
"예, 거기, 왼쪽. 예 그 자립니다."

사내는 한 선생 자리에 우람한 꽃바구니를 놓고 사라진다. 한 선생, 평소 교장이나 부장들과 친하며, 적당히 아부도 잘하고, 술도 잘 마시고, 그에 못지 않게 아이들도 잘 때리는 사람이다. 늘 말 끝에 얼른 점수 따서 교감, 교장 해야된다고 하는 대로, 점수를 위해 논문도 쓰고 연수도 찾아다니며 듣는 사람이다. 덩치 또한 무지막지하게 커서 앉는 의자가 좁을 정도인데, 오늘 받은 꽃도 덩치만큼 우람하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큰 꽃을 다 받을 수 있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꽃을 바라본다.

그때 다시 교무실 문이 열리며 커다란 꽃이 굴러 들어온다. 그 꽃은 사람이 들고 오는 것이 아니라 정말 굴러오는 것 같다. 교무실 문 가득 밀고 들어온 꽃바구니는 온갖 종류의 꽃이란 꽃은 전부 모아 놓은 것 같다. 그 꽃더미 뒤에서 또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교무부장님 책상이 어딥니까?"
나는 너무 큰 꽃더미에 놀라 벌어진 입을 채 다물지 못하고 있다가 황급히 대답한다.
"거기 가운데 자리 제일 앞입니다."


그러자 꽃더미가 흔들흔들 걸어가 교무부장 책상 위에 턱 걸터앉는다. 꽃이 책상 위에 놓이자 비로소 그 꽃을 들고 온 사내 모습이 나타난다. 우렁우렁한 목소리와는 딴판으로 얼굴이 해사하고 맑으며 체구도 왜소하다.
"그럼 안녕히 계십쇼."
왜소한 체구와는 달리 역시 나오는 말투는 우렁차다. 그는 가져온 꽃을 놓고 고개를 꾸벅하더니 교무실 문을 밀고 나가버린다. 다른 선생들 책상 위의 꽃들을 비웃듯 교무부장 책상 위의 어마어마한 꽃이 홀로 눈부시게 빛난다. 매달린 리본을 보니 <축 스승의 날, 어머니회장>이라고 써 있다.

나는 그만 피식 웃고 만다. 갑자기 지난번 시험기간 중의 교직원 야유회 때, 교무부장과 한데 엉겨 돌아가며 부르스를 추던 모습이 떠올라서다. 그때 스피커가 몇 번 지직대더니 방송이 나온다.
"자, 학생들은 모두 운동장으로 집합하도록. 교실에 있는 학생들, 얼른 운동장으로 모여라. 빨리!"
방송이 끝나자 교무실 위 교실에서 책상 끄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그리고 아이들이 떼로 몰려나온다. 순식간에 운동장에 아이들이 가득하다.


"선생님들도 얼른 나가세요. 좋은 날인데 얼른 나가 꽃 한 송이씩 받으셔야지요."
교감이 웃으며 군데군데 앉아 있는 선생들에게 말한다. 괜히 또 낯이 뜨거워진다. 나는 그런 마음을 들키기가 싫다는 듯 일부러 느릿느릿 운동장으로 나간다.

국민의례를 하고, 각 반 회과 부회장이 달려나와 양복 웃저고리, 혹은 여선생 웃옷 앞 주머니에 카네이션을 한 송이씩 꽂아주고,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어쩌구 하는 아이들이 불러주는 노래를 낯뜨겁게 들으며, 내가 정말 아이들에게 은혜를 베푼 스승이기나 한 것일까 하는 자괴감을 짓씹고 있는데 행사가 끝난다.

교실로 들어가자 아이들이 칠판 가득 '선생님 감사합니다. 스승의 날 축하드려요.' 그런 따위 글씨를 색색 분필로 써놓았다. 색종이를 연결시켜 칠판 가득 호사스런 분위기도 만들어 놓았다. 나는 아무 할 말도 없다. 그저 어색한 웃음만 지을 뿐이다. 원래 이 시간은 명예 교사를 모셔다 특별 수업을 해야 하지만, 나는 그것조차 왠지 허례인 것 같아 그냥 아이들에게 간단한 몇 마디 말을 한 다음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한다.

아이들이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이더니, 이내 다른 반보다 일찍 끝나게 되어 좋은지 환한 표정을 지으며 교실 밖으로 달려나간다. 재훈이와 민웅이 두 녀석들이 괜히 미적미적대더니 내게 다가와 선물 몇 가지를 내민다.
"저, 이거..."
"엄마가 갖다 드리래요."
어제 선물 따위는 절대 가져오지 말라고 일렀지만, 그래도 그냥 넘어가기가 캥긴 모양이다. 일부러 가져온 것까지 돌려보내기가 뭣해 마지못해서, 그러나 겉으로는 아님보살 하고 받는다.
"그래, 고맙다."
그러자 두 녀석이 환하게 웃으며 교탁 위에 선물을 올려놓고서야 안심이 된다는 표정으로 "안녕히 계세요"하고는 사라진다.

교무실로 돌아오자, 선생들 책상마다 온통 꽃바구니와 선물로 가득하다. 비담임인 선생들에게 한두 가지씩 선물을 나누어주고, 한꺼번에 가져가기가 뭣해서 책상 아래에 쌓아두고, 이것저것 뜯어보기도 하면서 스승의 날이 지나간다.

저 숱한 선물과 꽃다발 중에서 진정 마음에서 우러난 것은 얼마나 될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나는 이제 그만 퇴근을 해볼까, 이럴 바에는 차라리 하루 선생들 편히 쉬게 해주는 공휴일을 만들어주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두서없는 생각에 빠져드는데 갑자기 굵직한 목소리가 울린다.
"선생님!"
덩치가 우람한 녀석과 몸피가 빼빼한 녀석 둘이서 내게 카네이션 다발을 내밀며 꾸벅한다.
"아니, 이거... 너희들이 어떻게..."
나는 의외의 인물 출현에 말을 채 잇지 못한다. 몇 해 전 담임했던 아이들이다. 이제는 대학에 입학하여 제법 어른 티까지 난다.
"선생님 전근하시면 뭐 못 찾아 뵙나요?"
녀석들이 빙그레 웃는다.

그날 나는 오랜만에 만난 제자 아이들과 코가 삐뚤어지게 술을 퍼마신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사지를 뻗는다.
"이건 스승의 날이 아니라 술 마시는 날이군요. 해마다..."
아내가 한마디했지만,
"그래도 찾아오는 아이들 있을 때 선생 노릇한 보람이 있는 법이요."
혀 꼬부라지는 말투로 그렇게 자랑삼아 대답을 한다.

다음날, 교무실 문을 열자마자 갇혀 있던 꽃향기들이 마구 밀려 나온다. 삼사월, 꽃 한 송이 없이 삭막하던 교무실에, 오월 꽃향기가 가득하다. 선생들 책상마다 의젓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꽃들이 밤새 참았던 향기를 풍겨내며, 어제가 스승의 날이었노라고, 잊지 말고 오래도록 기억해 달라고, 이 꽃을 보낸 사람을, 혹은 당신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맑디맑은 아이들을 잊지 말아달라고 말을 건네는 것 같다.

나는 일부러 코를 벌름벌름 해가며 꽃향기를 맡는다. 이건 장미, 이건 카네이션, 이건 백합, 그렇게 한데 어울려 있는 향기 속에서 각자의 것들을 분별해 보기도 한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출근하는 선생들마다 꽃향기 때문인지 모두가 환해 보인다. 날마다 몽둥이에 고함이 가득하던 교무실은 어제부터 전혀 다른 곳인 양, 그지없이 조용하고 안온하다.

그리고 또 다음날, 어제보다는 조금 덜하지만, 여전히 꽃향내가 가득한 아침이다. 그렇게 날마다 날마다 꽃향기는 교무실 구석구석을 날아다닌다. 그러나 처음 날보다, 그 전날보다 향기는 점점 옅어져 간다. 그리고 향기가 옅어지면 옅어질수록 교무실은 스승의 날 이전의 분위기로 돌아간다. 다시 고함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아이들과 승강이 하는 모습도 살아나고, 급기야 몽둥이를 드는지 엉덩이 깨지는 소리가 울리기도 한다. 그때쯤이면 이제 선생들 책상 위에 놓여있던 꽃바구니의 꽃은 거의 시들어버리고, 대부분은 쓰레기통 속에 처박힌다.

시들어 가는 꽃향기가 아쉬워 수돗가에서 꽃바구니에 물을 퍼붓기도 하지만, 그러나 어디 영원히 지지 않는 꽃이 있던가. 일주일이 채 가기도 전에 꽃은 시들어버리고, 낯 뜨겁고 쑥스럽게 진행된 스승의 날 행사조차 가물가물해 지고, 선생들과 아이들은 다시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일상으로 돌아와, 사막처럼 메마른 하루하루를 모래 씹듯이 보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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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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