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시기 사회주의'란 일찍이 이 책의 저자 정운영 씨가 1990년 한겨레신문 칼럼을 쓰면서 만들어낸 신조어이다. 무슨 말일까?
자본주의와 대립하는 사회주의의 대표적 특징 세 가지 항목을 꼽을 수 있다. 프로레타리아 독재의 존재, 중앙집중적 계획의 실시,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가 그것이다. 그런데 당시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개혁과 개방 정책에 의해 이 모든 사회주의 항목이 원칙도 없이 심하게 뒤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저자가 비꼬아 지칭한 말이 '거시기 사회주의'였다.
이 책은 저자의 그러한 문제의식 연장선상에서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왜냐면 저자는 아직 사회주의라는 간판을 포기하지 않는 중국 현지를 돌아보면서, 오늘 중국의 대외개방 정책과 발전을 줄곧 염려스런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잘 먹고 잘 사는 게 곧 사회주의라는 생각이 등소평 이후 중국인들을 강렬하게 사로잡고 있나 보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많은 심각한 문제가 야기될 수 밖에 없다. 중국의 개혁과 개방에 대한 저자의 평을 직접 들어보자.
"무엇이 운전기사를 그처럼 미친 듯이 달리게 했을까? 그 동력은 어디서 나왔을까? 아마도 그 답은 노력에 따른 보상이었으리라. 그러나 미구에 그는 소득이 노력에 비례하지 않고, 자본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죽을 둥 살 둥 달려봐야 더는 소용이 없다고 느낄 때, 그의 좌절은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여기 중국 경제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또 좌절이라도 좋으니 미친 듯이 한번 달려보고 싶다는 농민의 간절한 열망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한쪽의 과속, 그럴수록 심해지는 다른 한쪽의 무력감과 좌절! 거기 대격변의 명암이 교차되고 있었다."<13쪽>
저자가 만난 여러 인물들 가운데 청두의 탄씨해물탕의 러위평 부사장은 27살의 젊은 나이지만, 중국 요식업에 있어 재벌의 실력자였다. 그는 "인민에게 복무할 기회와 명예를 가지기 위해서" 곧 공산당에 입당할 계획임을 밝혔다.
현재 중국 공산당은 러위평 같은 '홍색 자본가'의 입당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한다. 이럴진대, 중국 공산당은 여전히 '공산당'으로 불릴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저자에 따르면, 중국 공산당은 맑스-레닌'주의'에서 모택동 '사상'으로, 모(毛)사상에서 등소평 '이론'으로 그 위계를 정하고 있다고 했다. 지금의 강택민 주석 자리는 정해지지 않았으나 그는 '3개 대표론'을 자주 거론하고 있다고 한다. 즉 공산당은 선진 생산력을 대표하고 선진 문화를 대표하는 데 이어 '광대 인민의 이익'을 대표한다는 것이 그가 말하는 3개 대표론의 골자다.
하지만, '광대 인민의 이익'을 대표하기 위하여 자본가의 공산당 입당이 정당화 될 수 있다면 그 공산당은 어떤 공산당이란 말인가? 결국 그들이 즐겨 말하는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라는 것도 자본주의의 다른 얼굴 외에 다름이 아니지 않는가? 다만 공산주의·사회주의라는 역사가 부여해 준 관성과 간판이 아직 폐기되지 않은 채 모호한 현실을 애써 감추려 하고 있을 뿐.
저자는 시장과 경제적 이윤은 부르되, 자본과 자본주의는 막는다는 발상을 '무모한 도박'이라고 규정한다. 역사적으로 레닌도, 티토도, 아옌데도, 마오쩌뚱도, 고르바초프도 모두 이 내기에서 졌기 때문이다.
자본주의화 초기 과정에 많은 나라들에서 나타나듯 중국도 관료 사회의 부정부패가 상당히 만연하고 있는가 보다. 그런데도 중국 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인민들의 신뢰는 대단하다고 한다. 국가 핵심 사업을 담당하는 관리들의 소양과 전문 지식이 뛰어나고, 그들의 헌신과 열정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바로 그 힘이 오늘의 중국을 버티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중국 대도시에 설치된 교통신호등의 역설을 말하면서 이 책을 정리하고 있다. 중국에서 세계 최초로 고안해냈다는 이 신호등은 빨간 불이 파란 불로 바뀔 때까지 몇 초가 남았다고 알려주는 스톱워치가 붙여 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여유와 질서가 정작 중국 사회 내에 없다는 게 중국을 돌아본 저자의 한탄이다. 중국이 저자가 바라는 바와 같이 '돌진적 근대화 혹은 돌진적 자본화'로 인한 제2의 타이타닉호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정운영의 중국경제산책
정운영 지음, 조용철 사진,
생각의나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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