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란 詩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것"

영화 속의 노년(34) - <일 포스티노>

등록 2002.06.26 16:59수정 2002.06.26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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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가 없어 식수 공급선이 한 달에 한 번씩 오는 작은 섬. 어부인 아버지와 둘이 사는 청년 마리오는 고기 잡는 일은 하고 싶지 않고, 미국으로 돈벌러 간 친구들이 부럽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 날, 칠레의 유명한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이 섬에서 망명 생활을 하게 되고, 그에게 세계 각지에서 우편물이 밀려 들자 마리오는 임시 우편 배달부로 취직을 하게 된다.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의 길, 마리오는 매일같이 우편 배달부 모자를 쓰고 자전거를 달려 우편물을 배달한다. 글이라고는 겨우 읽고 쓸 줄 아는 정도이지만, 그래도 파블로 네루다의 친구라고 자랑하고 싶어 책에 서명을 받는 마리오. 그러나 어느새 시를 읽고 있다. 그러면서 '은유'가 무엇인지도 배우고 파블로와 가까워진다.


베아트리체에게 한 눈에 반한 마리오는 그만 사랑에 빠지고, 파블로는 그런 마리오의 사랑을 기꺼이 돕는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누구나 다 시인이라고 했던가. 베아트리체에게 바치는 마리오의 찬사는 시 그 자체이다. 파블로의 시를 도용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지적하는 파블로에게 "시란 시를 쓴 사람의 것이 아니다. 그 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것이다"라고 말해 파블로를 놀라 웃음짓게 만들기도 한다.

마리오와 베아트리체의 결혼식에 증인이 되어준 파블로. 그러나 곧바로 파블로 부부는 고국 칠레로 돌아가게 되고, 파블로의 소식은 신문을 장식하지만 마리오에게는 편지 한 통 없다. 마리오는 '훌륭한 사회주의자도 아닌, 평범한 우편 배달부인 나를 기억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지만 솔직히 섭섭하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이 작은 섬을 다시 찾은 파블로 부부. 처음 마주친 아이의 이름은 파블리토, 바로 마리오의 아들이다. 사회주의자들의 집회에서 '파블로 네루다에게 바치는 시'를 낭독하기로 한 마리오는 진압 경찰에 쫓기는 군중들의 발에 밟혀 세상을 떠나고, 파블리토가 태어난 것. 마리오가 남긴 음성 편지를 듣는 노시인의 눈에는 눈물이 고인다.

마리오의 음성 편지에는 그 섬의 파도 소리, 바람 소리, 아버지의 서글픈 그물질 소리, 교회의 종소리,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들의 소리, 뱃속에 있는 파블리토의 심장 소리까지 모두 함께 담겨 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섬의 아름다움을 녹음한 것인데 이렇게 마리오는 파블로를 만나기 전까지는 제대로 알지 못했던,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자신의 감성을 온전히 담아 남겨 두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수없이 많은 만남 속에서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는 만남이 있다.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 곳에서 살아가야 하는 마리오에게 파블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만남이었고, 그 만남은 마리오의 인생은 물론 죽음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아마 그것은 껍데기가 아닌 존재와 존재의 만남이어서였을 것이다.


유명한 시인에게, 글을 겨우 깨친 바닷가의 촌스런 청년은 또 어떤 존재였을까. 들고온 책에 서명을 해주긴 해도 그저 그런 존재였을 뿐이다. 그러나 시를 읽고, 은유를 배워나가는 그는 너무도 순박해서 놀라운 감수성으로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물'에 알맞는 형용사를 찾는 파블로에게 마리오는 망설임없이 '서글프다'라고 한다. 그에게 아버지의 그물은 서글픈 것이었기에.

고국으로 돌아갈 날을 앞두고 마지막 인사를 할 때 파블로의 눈에 고인 눈물은 그래서 어쩜 그 노시인의 마음을 다 쓸어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편지를 하겠노라는 약속을 지키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어찌 보면 노시인을 향한 청년의 짝사랑으로 끝나는가 싶었는데 파블로는 다시 그 곳을 찾았고, 비록 목숨이 속해 있는 곳은 달랐지만 두 사람은 마음을 다해 쓴 시로, 자연의 소리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망명 생활을 하는 파블로의 모습은 고통이나 갈등보다는 잠시의 휴가를 즐기는 것처럼 낭만적이고 여유있어 보였는데, 처음에 마리오를 사무적으로 대하긴 하지만 결코 인격적으로 하대하거나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마리오도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나이, 국적, 지위, 재산 이런 모든 것을 떠나 사람을 사람 그 자체로 볼 수 있다면 시는 벌써 그 안에 자리잡는 것이 아닐지.

아름다운 풍경에 실린 노시인과 젊은 우편 배달부의 만남은, 귀에 익숙한 주제가와 함께 잔잔하게 마음을 움직이며 시를 그리고 인생을 생각하게 만든다. 지금의 사소한 마주침이 결국 나의 인생을, 그리고 우리의 인생을 뒤바꿔놓는 귀한 만남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함께 하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또 다시 시를 필요로 하게 되는가. 그럴 때 그 시는 바로 내 것, 우리 것이 되리라.

(Il Postino 일 포스티노 / 감독 마이클 래드포드 / 출연 필립 느와레, 마씨모 트로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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