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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정부 초기, 감사원장을 맡은 이회창씨의 대활약을 나는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다. 그때 그의 국민적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가 '대쪽'의 이미지를 확립해가던 그때가 그 자신에게나 국민들에게나 참으로 좋았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감사원장을 거쳐 국무총리에 오른 그가 좀더 대쪽의 뜻을 펴지 못하고 김영삼 대통령의 '정략'에 의해 너무 일찍 도중 하차했을 때 많은 국민들은 거기에서 김영삼 정권의 속성적 한계를 읽을 수 있었다. 나 역시 이회창이라는 대쪽을 저버리는 김영삼 정권의 소아적인 행태에 대해 큰 실망과 허탈감과 함께 분노마저 갖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김영삼 대통령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국민들 속에 굳게 심은 대쪽의 이미지를 발판으로 그가 더욱 강력하게 대쪽의 뜻을 펼치게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아울러 큰 기대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대통령 후보에 오른 그가 아들들의 병역 비리 시비에 휘말리게 되면서 나는 그 동안 잘 알지 못했던 그의 가려진 이면들을 폭넓게 조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5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그의 인격과 삶의 구석구석까지 거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고, 지금 이 순간에는 내면의 바탕까지 내 나름의 눈으로 측량도 해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우선적으로 그의 대쪽의 이미지가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순한 실망과 배신감이 아니었다. 그가 사람들의 눈을 가리며 휘황찬란하게 발휘한 거짓과 모순으로부터 실컷 우롱을 당했음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자신의 엄청난 비리를 감춘 채 '공직사회 비리 척결'의 칼을 휘두를 수 있었을까? 어떻게 자신의 굽은 것을 감추고 꼿꼿한 대쪽의 이미지를 창출할 수 있었을까? 그것 역시 고급스런 처세술의 산물이며, 기기묘묘한 요지경 속 같은 이 세상의 한 조화인 것일까?
그가 지금에 와서는 더욱 극렬하고 집요하게 진실과 언어를 농단하며 온 국민을 농락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다. 참으로 슬픈 심정이다. 그의 그런 태도로 말미암아 지금 다수의 국민은 여전히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진실과 옳음을 심도 있게 따지지 못하는 혼탁한 가치관의 미로에서 더 더욱 우왕좌왕하며 갈피를 잃고 있다. 저 군사 독재 시절보다 더욱 암울한 역사의 터널 속에서 자신의 무지와 미망(迷妄)조차 깨닫지 못하며 안개 같은 미망 속을 헤매고 있다.
그런 국민을 믿고 의지하여, 계속적으로 미망을 부추기고 이용하며 농락의 술수를 감행하는가? 그것이 언제까지 통할 수 있다고 보는가? 거기에서도 나는 그와 그들 집단의 미망을 본다. 연민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조악한 정치적 목적과 정치 술수의 관성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타락할 수 있고 추해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는다. 그 새삼스러운 의문 앞에서 크나큰 비애와 공포감마저 체감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회창 총재가 김영삼 정부에서 감사원장을 하며 높은 인기를 구가하던 시절, 그가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특정 종교를 거론하는 것이 일부 독자들의 반감을 사지 않을까 우려되지만, 나는 그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참으로 반가웠다. 이것은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으로서,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인지상정'일 것이다.
정말이지 나는 이회창 총재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은근히 자랑스러웠고, 그의 대쪽 성품은 저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강한 신앙심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잠바 차림에다가 고무신을 신고 도시락을 싸들고 출근했던 고(故) 김홍섭 판사처럼 살지는 않았을지라도, 대법관의 품위와 걸맞은 그의 '부유'가 결코 하느님 앞에 죄스러운 것은 아니리라는 생각도 하곤 했다.
그리고 나는 그가 불교와 개신교의 '행사'들에도 참석하곤 하는 것을 좋게 보았다. 다분히 표를 의식하는 정치인의 제스처적인 행동일 수 있지만, 그가 천주교 신자임을 잘 알기에, 그의 그런 행동 속에 타종교에 대한 이해와 존중의 뜻도 포함되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곤 했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별로 달갑지 않다. 그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놀라거나 의아스러워하는 사람, 또는 재미있게 생각하는 사람도 종종 만나는데, 그때마다 곤혹스러움을 느낀다. 또 때로는 나까지, 더 나아가 천주교 전체를 매도하는 시각이나 발언도 접하는데, 그때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죽게 하는 일은 형태도 다양하고, 참으로 많고 흔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곤 한다. 나는 그 모든 일이 괴롭다.
이 일과 관련해서는 김대중 대통령도 내게 괴로움을 안겨준다. 김대중 대통령이 같은 천주교 신자로서 이회창 총재보다는 좀더 확실하고 강한 신앙심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하여 그의 북한 동포들에 대한 측은지심과 통일에 대한 소망과 의지가 신앙심으로부터 더 많이 연유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무엇보다도 아들들을 잘못 가르치고 잘못 감시한 죄만큼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 그의 아들들도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 신자이거나 어머니 이희호 여사를 따라 개신교 신자일 터인데, 그것을 생각하면 같은 크리스천으로서 나는 모멸감이 더욱 크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 동안 이회창 총재의 언행들을 지켜보면서 아슬아슬한 느낌을 갖곤 했다. 천주교 신자로서 그가 제발 말만이라도 어떤 선을 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대했다. 그가 어떤 상황에서도 천주교 신자로서의 마지막 선만큼은 꼭 지켜주기를 두 손 모아 빌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의 간절한 바람과 기대를 '단호히' 배반했다. 그는 온 국민 앞에서 "자식들의 병역 문제와 관련해서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했다. 한껏 목에 힘을 주고 "그것을 분명히 밝혀둔다"는 부연도 달았다.
나는 놀란 가운데서도 이회창 총재 자신이 그것을 '분명히 밝혀둔다'고 해서 그게 과연 분명해지는 것일까 생각하며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한 순간 그가 앞으로 감내해야 할 짐은 더욱 커지고 말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그가 그런 말을 하면 할수록 하늘 우러러 부끄럽지 않은 짐은 한도 끝도 없이 커지고 무거워지리라는 것을….
부끄럽지 않다고 하는 것이 결국은 더 큰짐이 되고마는 인간 세상의 이 모순적 한계를 그가 앞으로 어떻게 지고 갈 것인지, 나는 큰 우려와 함께 슬픈 연민을 갖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 그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하늘'을 끌어들였다. '하늘'은 무엇인가? 그것은 신앙을 갖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또 다른 이름이다. 믿음과 외경심의 대상이고 초월의 세계이다. 사람이 머리 위에 하늘을 두고 사는 것은 늘 우러르기 위해서이고, 하늘의 빛으로 자신의 그림자를 살피기 위해서이다. 자신의 그림자 속에 묻혀 있는 작은 허물 하나도 하늘은 다 보고 있음을 알기에 사람은 늘 외경심을 가지고 하늘을 우러르며 자신의 삶을 부끄러워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삶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하늘을 우러르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이회창 총재는 진정으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는 것일까? 과연 그렇다면, 그는 부끄러움이 없는 만큼 자신을 너무 모르는 사람이다. 그가 자신을 얼마나 모르고 있는가를 우리는 참으로 손쉽게, '상식'의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179cm의 신장을 가진 20대 초반의 청년이 45kg의 체중을 갖는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이 의학계의 중론이고, 그것은 거의 절대 불변의 상식이다.
심각한 장애나 중증의 질병을 앓고 있을 경우에는 가능하다는데, 이회창 총재의 아들들은 그런 경우인가? 그렇다면, 그럴 만한 무슨 유전적 질환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만일 그것이 심각한 영양실조에 의한 것이라면, 일생을 부유함 속에서 호의호식하며 살아온 귀족 집안에서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가?
이회창 총재는 왜 아들들이 그 지경이 되도록 방치를 했는가? 그 지경에서 아들들을 병원에도 한번 데리고 가지 않았는가? 공직 생활이 워낙 바빠서 자식들의 모습을 눈여겨볼 여유조차 전혀 없었는가? 아들들이 병원에 간 적이 있다면, 심각한 미달 체중과 관련하는 진료 기록이 한 장이라도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설령 다른 비리는 없고 오로지 체중 감량 의지의 놀라운 결과로 병역 면제가 되었다면, 체중 감량 노력이 시간도 많이 걸리고 참으로 눈물겨웠을텐데, 이회창 총재는 그것을 몰랐단 말인가? 알면서도 모른 척한 것인가? 후에 그는 "아들들이 아버지께 누를 끼치고 있는 것을 크게 괴로워했고, 뒤늦게나마 사회 봉사를 했으니 그것으로 일단락이 되었다고 본다"는 말을 천연덕스럽게 했는데, 아들들이 괴로워한 이유나 반성 내용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눈물겨운 체중 감량 노력의 성과로 병역 면제를 받았다면, 나중의 사회 봉사와 상관없이 그것 자체로서 범죄를 형성한다고 보는데, 법관 출신으로서 자신의 그 천연덕스러운 말이 이 총재는 지금도 하늘 우러러 부끄럽지 않은 일인가?
어머니 한인옥 여사도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확대 증폭되어 버린 아들들의 병역 면제가 정말로 다른 비리는 일체 없고, 아버지도 전혀 모르는 가운데서 이루어진 본인들의 체중 감량 노력에 의한 것이라면, 아들들로 하여금 아버지의 명예를 살려내기 위해 다시 한번 체중 감량을 시도하게 할 생각은 없는가?
아들들이 아버지를 위해, 특히 장남 정연씨의 경우 체중을 45kg까지 감량해 보일 수가 있다면, 물론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끝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 눈물겨운 노력이 병역 의무를 치르기 위해 군에 가서 3년씩 고생을 한 이 땅의 보통 사람들에 대한 속죄는 될 것 같은데, 이회창 총재는 자식들에게 그 정도로 가혹할 수 있는가? 그런 용기를 갖지 않고도 하늘을 우러를 수 있으며,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가?
이회창 총재는 하늘을 모독했다. 따라서 천주교 신자로서 하느님을 능멸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도 부끄러움이 없다"는 말은 그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말이다. 절개를 지키며 오로지 우국 충정으로만 평생을 살아온 사람도, 가식과 허위로 철저히 자신을 분장하며 사는 사람도 여간해서는 입에 담지 못하는 말이다.
아무리 자신의 입지가, 변명이, 대권에의 꿈이, 손에 잡은 듯한 봉황이 중하고 또 중하다 하더라도, 하늘을 함부로 팔아서는 안 된다. 하늘을 함부로 팔면, 그것은 한결 중한 벌로 되돌아올 수 있다. 큰 꿈을 지닌 사람일수록 말 한마디 한마디를 중하게 알아야 하고, 진정으로 하늘을 의식해야 한다. 하늘에 대한 외경심을 지녀야 백성 두려운 줄도 알게 되고, 백성 두려운 줄을 알아야 하늘 우러러 부끄러움을 느끼게도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회창 총재는 하늘 우러러 한 점도 부끄러움이 없는(모르는) 단계에서 성큼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하늘을 걸고"라는 말을 했다. 아들들의 병역 문제에 관한 한 자신과 자신 가족의 결백함을 '하늘을 걸고 맹세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이회창 총재는 절대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말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망연 자실, 우두망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천주교 신자의 눈으로 볼 때 그의 그 말은 '십계명'의 제2계명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제2계명에는 하느님의 이름에 무엇을 함부로 걸지 말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하느님을 걸고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하느님을 신앙하고 두려워함에 있어서 가장 깊이 명심하고 있는 사항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자신의 결백을 스스로 확신하고 있기에 그가 단호히 그런 말까지 했으리라는 생각도 없지는 않지만, 나는 지금 몹시 아슬아슬한 심정이다. 그의 처지가 너무도 위태롭다. 따라서 그에 대한 연민이 배가되는 것을 어쩔 수 없다. 그리고 한나라당의 행태를 보노라면 우리나라 정치인들 수준의 조악함에 다시 한숨을 짓게 된다. 마치 발악을 하는 듯한 억지 강변들이 너무도 치졸하여 구제 불능임을 절감하게 된다.
한나라당 사람들이 이회창 총재의 '대세론'에 집착하는 것만큼 병역 비리 문제 역시 '대세'가 되어가고 있음을 그들은 알아야 할 것 같다.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면 칠수록 한번 빠져든 수렁은 점점 깊어져서 끝내는 자신을 삼키고 말 것이다. 그것은 하늘이 마련해주신 자연법칙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나는 이 시점에서 이회창 총재의 신앙관에 대해 큰 궁금증과 의문을 갖는다. 천주교 신자인 그는 어떤 신앙관으로 신앙 생활을 해 왔고, 지금은 어떤 신앙관으로 오늘의 '사태'를 보고 있는가? 검찰 서기로 일제에 봉사했던 아버지로부터 이회창 총재는 무슨 교육을 받으며 자랐을까? 그것에 이어 또 한 가지 내가 진심으로 알고 싶은 사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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