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년 상하이 파완런 구장앞에서 중국 매체와 인터뷰하는 치우미조창완
4반세기 동안 한국과의 경기에서 한번도 이기지 못해 공한증(恐韓症)을 갖고 있으면서도 중국인들이 축구를 집착하는 이유는 뭘까. 우선 중국인들이 축구에 집착하는 데는 역사가 있다. 마치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계기로‘축구’하면 뭔가 가슴에 팍 맺히는 게 생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집착은 승리의 환호보다는 패배의 탄식에서 나왔다는데 약간은 비극성이 있다.
현재 공인된 중국의 축구광(球迷)는 8천만명 정도. 이 가운데는 축구를 위해 이혼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경기장을 쫓아다니는 직업 축구팬들도 적지 않다. 멍판화(孟繁華)가 ‘중국, 축제인가 혼돈인가’에서 중국 축구팬 백서에서 소개한 축구 때문에 이혼한 세 남자와 결혼 안한 한 남자의 사례는 그저 특이한 사례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럼 언제부터 중국인들은 축구를 좋아하고, 이렇게 열광적이었을까. 축구 종가라는 논리에 대항해 중국인들은 자국이 축구 종주국이라고 생각한다. 중국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당(唐)나라 시대부터 축구와 룰이 비슷한 운동이 황실을 중심으로 있어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을 모두 인정하기는 그렇다. 서양식 룰이 적용하는 최근의 축구는 근대이후 서양문물이 들어오면서 함께 보급되기 시작했다.
중국 20세기 초반은 무얼 정비할 틈이 없는 만신창이였던 만큼 축구도 제대로 자리할 수 없었다. 따라서 1949년 공산화와 함께 중국의 축구역사도 시작됐다. 51년 톈진에서 처음으로 ‘전국축구경기대회’가 열렸고, 그해 군인으로 구성된 대표팀은 처음으로 체코에서 열린 국제대회에 참가해 불가리아에게 1:9로 지고, 체코슬로바키아에게 1:17로 졌다. 56년에는 지금은 분리된 유고슬라비아와의 친선전을 가졌다.
참패한 경기 후에 마오쩌뚱은 유고대표선수들을 만난 자리에서 “12년 후면 올림픽을 제패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자신했다. 하지만 58년 대만의 세계축구연맹 가입과 중국의 퇴출로 중국은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진다. 이후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들과만 경기를 가진다.
1967년 문화대혁명은 축구를 비켜가지 않았다. 이 결과 67년부터 71년까지는 중국에 축구가 완전히 사라지는 현상을 벌어졌다. 다행히 71년에는 12년 후 올림픽을 재패하겠다는 마오쩌둥의 교시가 떠오르면서 북한, 알바니아와 친선경기를 재개했다. 하지만 78년은 중국에게 쉽게 깨지지 않을 악몽이 시작되는 해이기도했다.(당시에 그들은 몰랐다) 다름 아니라 아시안게임 최종예선에서 한국에게 0:1로 진 것이다. ‘공한증’(恐韓症)의 시작이었다.
이후 중국은 월드컵과 올림픽만 열리면 축구 예선전을 통과하기 위해 온갖 신경을 곤두세웠다. 81년은 기대감에 부푼 한해였다.
월드컵 예선에서 중국은 북한에 4:2, 쿠웨이트에 3:0, 사우디아라비아를 4:2, 2:0으로 이기는 등 선전을 거듭했다. 특히 사우디에게 2:0으로 뒤지던 경기를 20분 남기고 4골 넣어 뒤집은 11월 12일 경기는 중국인들을 흥분에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82년 1월 10일 있었던 뉴질랜드와의 경기에서 1:2로 석패함으로써 모처럼 온 기회를 놓쳤다.
덩샤오핑의 지원과 소박한 결과
이런 패배의 역사였지만‘덩샤오핑’은 축구의 부흥을 위해 많은 투자를 했다. 프랑스 유학시절 축구 경기를 보기 위해 식비를 아껴가며 축구 표를 샀다가 공도 보이지 않는 자리에 앉아서 실망했다는 소회를 말할 만큼 덩샤오핑은 축구를 좋아했고, 축구를 보급시키는데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했다.
덩샤오핑은 축구가 중국인들의 마음을 합치는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특히 따리엔(大連)을 축구 육성의 중심도시로 만들고 싶어했고, 이 때문에 따리엔팀은 2002년 정규리그에 우승해 9년의 축구역사에 7번 우승을 이루는 위업을 달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