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펑더화이와 김일성. 김일성은 중국의 도움으로 사지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펑더화이망
린비아오(林彪)가 이끄는 해방군은 1949년 티벳을 침공했다. 중국은 해방이라고 불렀지만 티벳인들은 "누구로부터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인가"를 물었지만 중국은 대답해줄 리가 없었다. 티벳은 저항했지만 체계적인 군대와 전투 경험을 가진 해방군을 이길 수는 없었고, 1951년 완전히 점령된다. 중국은 티벳과 하이난다오(海南島)에 이어, 장쩨스가 도망간 대만을 점령하려 했다.
하지만 분열과 지지가 없는 중국에서의 대만과 위기감에 뭉친 채 미국의 암묵적인 지원을 받는 대만을 점령하는 일은 그리 쉽게 결정내리기 어려웠고, 이 기로속에 있던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대만을 치기 위해 저지앙(浙江)과 지앙시(江西)에 주둔했던 인민해방군은 한반도와 가까운 산둥반도와 동북3성으로 대대적인 이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9월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군이 밀리기 시작한다. 중국은 내부의 갈등을 겪었지만 11월말부터 대대적으로 공세를 취해 12월에는 다시 한국군과 연합군을 38선까지 끌어내렸다.
물론 조너선 스펜스는 <현대중국을 찾아서>에서 10월부터 25만명의 인민해방군이 북한에 들어가서 작전을 돕고, 11월말에는 70만명 이상으로 증가했다고 밝히지만, 인민해방군의 한국전 참전은 아직도 모든 과장이 뚜렷하지 않고, 갖가지 비화들이 쏟아지고 있다.
중국군과 북한군의 반격은 결국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설로 완전히 긴장상태에 돌입한다. 결국 모두를 위해 휴전이 성립된다. 하지만 중국으로서는 위협으로 인해 치루기에는 너무나 큰 희생이었다. 국가가 정비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너무나 큰 희생을 치렀다. 하지만 한국전쟁에서 돌아와 중국 정부가 무엇보다 먼저 추진한 것은 중국 내부에 남아있는 '반동혁명분자'의 색출이었다. 결국 국민당에 가담했거나 그렇게 의심받은 이들은 대대적인 검열을 당했고, 대부분은 공개적으로 처형됐다.
한국전쟁 등 외부의 상황이 정돈되고, 토지개혁 등 내부의 중대 사안이 정리되자, 국가산업 정비를 위한 1차 5개년 계획(53~57년)이 시작됐다. 다행히 첫 5개년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서양에게) 매맞는 문제를 해결한 이후 드디어 배고픈 문제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클 수밖에 없었다.
추락한 식량 공급, 2천만명 이상 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