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새벽 '수코타이'에 가다

세계문화유산답사 <태국편>

등록 2002.12.03 12:36수정 2002.12.04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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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치앙마이에서 탄 버스는 9시간이라는 지루한 여정길에 올랐다.

한참을 자다 소란스런 버스내의 분위기에 눈을 떠보니 어느덧 승객들이 하나둘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 버스에서 내려 도착한곳은 무앙카우(Muang Chau)였다.

'오래된 도시'라는 뜻의 무앙카우는 시내에서 12km정도 떨어져 있는데 바로 이곳에 타이족에 의해 건설된 태국 최초의 독립국가였던 수코타이의 유적이 숨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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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코타이에서 가장 큰 사원인 '왓마하탓' ⓒ 홍경선

수코타이라는 말의 의미는 "행복의 새벽"이라는 뜻이다. 그 의미에서 찾아볼수 있듯이 수코타이는 불교의 번성과 함께 100년동안 말레이반도를 지배할 정도로 강성했던 번영의 도시였다. 1378년 타이족에 의한 또다른 국가인 아유타야에 합병될때까지 영토확장, 불교의 번성은 물론 태국문자를 완성하는 등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다.

무앙카우에 위치한 수코타이 역사공원. 1991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이곳은 70평방km에 193개의 역사유적군이 자리잡고 있는 수코타이 최대의 유적지이다.

역사공원 내에는 왕궁의 유적지, 불교사원등이 산재해있는데 이외에도 곳곳에 잔디밭과 연못으로 예쁘게 조성되어 있어 조용히 거닐다보면 700년전 번성했던 수코타이 왕국의 향수를 느낄수 있다.

입장권을 산 매표소에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았다. 달리 들고다닐 방법이 없어서 매표소직원에게 가방좀 맡아달라고 하니 선뜻 응해준다. 살아숨쉬고 있는 역사의 현장에서 근무하고 있어서인지 역시 방문객들에게 친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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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수코타이 양식의 불상 ⓒ 홍경선

입구에 들어서자 마자 저멀리 푸른 잔디위로 붉은 벽돌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수코타이에서 가장 큰 사원인 '왓마하탓'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단순한 벽돌이 아닌 둥근 기둥이었는데 좌우 일렬로 주욱 늘어져 있어 마치 돌기둥으로 만들어진 숲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금새라도 무너질것 같이 위태로워보이는 기둥사이로 하얀 대리석 불상이 나타났다.

거대한 돌기둥들의 경호를 받으며 가만히 가부좌를 틀고 앉았있는 거대한 불상은 참으로 고요해보였다. 불상은 등을 곧게 핀 상태에서 오른손을 무릅아래로 살짝 내리고 있었는데 미끄러지는듯한 그 곡선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딱 벌어진 어깨와 두툼한 가슴 위로는 엄숙함이 밀려온다. 비록 얼굴엔 은은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지만 반쯤 감긴 눈에서는 빛이 났다. 쭉 늘어진 귀, 오똑한 코, 전형적인 수코타이의 불상이었다.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잠긴 자비로운 모습은 그렇게 고요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보는 이를 압도하는 엄숙함을 지니고 있었다. 비록 주위는 부서져 나간 파편과 불당의 흔적만 남아있었지만 그렇게 홀로 앉아 과거의 영화를 보존하고 있는 불상의 모습에서 찬란했던 수코타이 왕국의 흔적을 느낄수 있었다.

사원안에는 수코타이 양식 이외에도 롭부리, 아유타야, 스리랑카, 크메르양식의 불상도 있었다.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 계속 증축되어왔기 때문이란다. 비록 역사와 민족은 다를지라도 불교를 향한 진실한 믿음은 한결같았나보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이 위태로워보이는 불당의 돌기둥과 불상들은 한 왕조의 몰락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단지 벗겨져나간 금박의 흔적만이 찬란했던 옛 문명을 밝혀주었다. 돌기둥위로 듬성듬성 자란 잡초들에게선 역사의 허망함마져 묻어나온다. 왕국의 교체와 오랜 시간의 풍파는 그렇게 역사의 현장을 페허로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오히려 부서진 왕국의 흔적이 더욱 아름다운 이유는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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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코타이 역사공원 전경 ⓒ 홍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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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탓사원 뒤쪽에 있는 은 연못 사원(왓 뜨라팡 응언) ⓒ 홍경선

주위는 참으로 고요했다. 역사공원이라 그런지 넓은 부지에는 한가로이 거닐며 역사의 한페이지를 넘기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조용히 명상에 잠긴 불상들처럼 그들 역시 아무말이 없었다. 단지 발길따라 가는데로 700년전의 과거속을 헤매고 있을뿐이었다.

넓게 깔리 푸른 잔디위로 야자수 나무들이 우거져있다. 네모난 연못위에는 커다란 연꽃이 둥둥 떠다닌다. 늪지대처럼 보이는 그위로 붉은 사원들의 모습이 살짝 비춰진다. 물결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거리는 사원과 불상들. 바람 앞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오랜 풍파는 그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부서지고 뒹글고 불태워지면서도 방문객을 향해 엄숙한 자세로 살짝 웃고있는 그들의 표정이 자애로우면서도 왠지 쓸쓸해보인다. 그 쓸쓸한 미소에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다. 오랜 풍파와 맞서 싸워야했던 지난날들의 추억이 아려있다. 불상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들을 만든 수코타이인들의 최후를. 그렇게 그 자리에서 미동도 않은체 그들의 멸망과 역사의 흥망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욱 지켜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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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코타이 최고의 성군 람캄행 대왕상 앞에서 ⓒ 홍경선

어느덧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또하나의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여기 저기 불꽃을 터뜨리며 축제분위기를 자아내는 그곳은 더 이상 명상의 세계가 아니었다. 고요했던 명상의 시간에서 깨어나 마을주민들이 다같이 즐길 수 있는 놀이공원이 된 것이다.

람캄행 대왕상 앞 넓은 광장에서는 전통무예 공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경쾌한 소리에 맞춰 무에타이, 창술, 검술 등이 화려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또한 언제 생겼는지 공원 곳곳에서 꼬치구이를 파는 노점상과 기념품 가게는 물론 놀이기구들로 가득했다. 여기저기 폭죽을 터뜨리며 토요일밤의 열기를 만끽하고 있는 주민들. 으슥한 곳 주변엔 청춘남녀들의 진한 애정행각도 벌어지고 있었다. 역사와 함께하는 휴식같은 공간에선 누구나 편하게 즐길수 있는 여유가 허락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침묵을 지키는 이들이 있었으니.

한참동안 축제현장에 끼어 즐기다가 문득 사원의 야경을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 발걸음을 옮겼다. 저멀리 칠흙같은 어둠속에 무언가 하얀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은은한 조명을 받으며 살며시 모습을 드러내는 왓 마하탓사원. 밤에 비친 이곳의 풍경은 한낮의 쓸쓸함과는 차원이 다른 또하나의 세계였다.

양 옆에 늘씬하게 서있는 돌기둥들 사이로 누군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왠지모를 오싹함이 어둠을 가르며 온몸으로 전해졌다. 그 시선을 따라 위를 올려다보니 쓸쓸한 미소를 띠고 있는 불상과 눈이 마주쳤다. 조명속에 비친 두눈은 멀리서 보면 감은 듯 하나 가까이서 보면 보는이를 내려다보고 있다. 거대한 몸짓으로 한낱 중생에 불과한 하찮은 인간을 내려다보는 그 시선에서 왠지 모를 경건함이 묻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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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속에 비친 마하탓사원 ⓒ 홍경선

그렇게 어둠이 내려앉아 달이 차기 시작하면 드러나는 고대도시처럼 신비함을 간직하고 있는 수코타이 역사공원을 벗어나 생태우를 타고 수코타이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축제의 현장에서 아무말없이 그들 본연의 자세를 지키고 있는 수코타이의 불상들을 떠올리며 방콕행 버스에 오른다.

덧붙이는 글 | 2002년 1월에 시작한 40일간의 동남아 7개국 여행도중 태국 수코타이에서의 추억입니다.

덧붙이는 글 2002년 1월에 시작한 40일간의 동남아 7개국 여행도중 태국 수코타이에서의 추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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