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당 수수빗자루와 외삼촌

그리운 그 사람을 만날 수만 있다면 (11)

등록 2002.12.24 18:57수정 2002.12.25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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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 신발장에는 몽당 수수빗자루가 걸려 있다. 이 빗자루를 30년이나 써 왔기에 이제는 몹시 낡고 닳았다. 요즘 아내는 집안 청소를 할 때면 진공청소기를 많이 쓰지만, 현관 바닥이나 부엌 바닥에 다듬던 나물 찌꺼기를 쓸 때는 아직도 이 빗자루를 요긴하게 쓰고 있다. 나는 이 빗자루가 눈에 띌 때마다 외삼촌이 생각난다.


내가 산동네에다 문패를 걸었다는 얘기를 듣고 외삼촌이 일부로 오셔서, 당신이 손수 짠 왕골 돗자리 한 닢과 몽당 수수비 한 자루를 입주 기념으로 주고 갔다. 왕골 돗자리는 제사 때마다 쓴 탓으로 너덜너덜 낡아버려 몇 해 전에 없애버렸지만, 수수빗자루는 워낙 야물게 만들어서 지금은 크기가 애초의 반이나 줄어도 여태 제 몫을 다하고 있다.

내 어린 시절은 6.25 한국전쟁 전후라, 농촌에서는 하루 세 끼마다 밥 먹는 집이 드물었다. 아침밥은 그런 대로 지어먹지만 점심은 수제비나 멀건 갱죽(나물 죽)이나 콩죽, 저녁에는 국수나 호박범벅 따위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였다. 밥도 대부분 보리이고, 쌀은 미처 삼분의 일도 안 섞었다.

그 시절 나는 이른 아침에 부엌에서 솥뚜껑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부엌문을 통해 밥 퍼담는 걸 건너다보곤 했다. 밥솥 한 가운데 쌀이 많이 들어있는 부분은 할아버지 몫으로 놋쇠 주발에다 제일 먼저 담았다. 그 다음 내 몫이기를 바라지만, 어머니나 할머니는 매정하게도 주걱으로 밥솥 안의 보리와 쌀을 확 섞어 버린다.

할아버지가 진짓상을 물리면 그때에야 내 몫으로 그 상에만 놓인 찐 계란에 남긴 밥을 비벼 먹었다. 그 시절 우리 집은 잘사는 편이었는데도 그랬다. 정말 가난한 집에는 꽁보리밥이나 조밥, 콩밥을 지어먹었고, 밥을 할 때도 양식을 아낀다고 쌀, 보리와 함께 무, 콩나물, 배추 따위를 넣기도 했다.

또, 밥 위에다 감자나 고구마를 얹어서 부족한 밥의 양을 보충하기도 했다. 오직 명절날이나 제삿날에만 흰쌀밥을 구경할 뿐으로, 그래서 생긴 속담이 “조상 덕에 이밥 먹는다”였다.

가난한 집에 자식이 많으면 ‘사발 농사’라 하여 사내는 남의 집에 꼴머슴으로, 계집아이는 남의 집 식모(가정부)로 보내기도 했다. 아이들이 마당에서 뜀박질 놀이를 하면 어른들은 배가 쉬 꺼진다고 야단스럽게 뛰어 놀지도 못하게 했다.


특히 봄철 보리가 팰 무렵에는 대부분 농가에서는 양식이 떨어져 하루 한두 끼는 굶는 집이 속출해서 부황으로 누런 몰골의 사람이 많았다. 그때를 ‘보릿고개’라 하여 농촌에서는 가장 힘든 때였다.

지난날 우리나라의 농촌은 무척 가난했다. 그 까닭은 농촌 인구는 많은데 토지는 한정돼 있어서 식량이 절대 부족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곡식으로 백성들이 배부르게 먹을 수 없었다. 다른 산업이 보잘것 없어서 젊은이들이 마땅한 일자리가 없는 탓으로 오직 좁은 땅덩이에 매달렸지만, 생산량은 그에 비례하지 않았다.


또, 자작농보다 남의 땅을 부치는 소작농이 더 많았다. 소작인들은 피땀 흘려 농사를 지어서 ‘대 갈림’이라 하여 절반 가량은 지주에게 바치고, 나머지로 양식과 생활비로 쓰게 되니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수리 시설의 미비와 농사 기술이 매우 뒤떨어졌다.

내 고향 구미에서는 낙동강 상류 지대인 안동 지방에서 “처녀가 강물에다 오줌만 싸도 홍수가 진다”고 할 만큼 비가 조금만 와도 강물이 넘쳐서 애써 가꾼 곡식이 물에 잠기거나 토사에 휩쓸려 그 해 농사를 망치기 마련이었다. 그런가 하면 비가 한두 달만 오지 않아도 논밭이 거북 등처럼 갈라졌다. 해마다 농사꾼들은 홍수 아니면 가뭄으로 하늘에 빌거나 원망하며 살았다.

이렇게 너나없이 가난했던 시절, 외가는 늘 먹을거리가 풍성했다. 외가는 식구가 많기도 했지만 식객들로 늘 득시글거렸다. 외가는 전업 농가로 농토 외 다른 사업체도 있는 게 아니었다. 외가가 농사만 지으면서도 부자로 잘 사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처음 나는 옛날부터 부자였기에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그 후 내가 외가에서 머물며 보고 겪은 바는, 가족들의 남다른 근면성 때문이었다. 거기다 나의 외삼촌은 끊임없이 농사 기술을 개발하고, 농가 수입의 극대화를 위해 항상 연구하고 정보를 수집을 해서 남보다 앞서 가는 영농으로 잘 살게 됨을 알았다.

특히 가장인 외삼촌은 철저한 전문 농사꾼으로 남달리 부지런했다. 외가의 일과는 일년 내내 컴컴한 새벽부터 시작되었다. 조반 전에 벌써 한 차례 논밭에 다녀왔다. 눈비가 오는 날이나 농한기에는 농사에 관한 책을 보거나, 라디오나 티브이 영농 시간을 시청하면서, 새로운 농사 방법을 배웠다.

농사를 지어도 남달랐다. 한 예로 같은 고구마 농사를 지어도 그 즈음에는 드문 온상 재배로 모종을 길러 일찍 밭에다 심어 남보다 한두 달 일찍 출하를 해서 비싼 값에 팔거나, 아니면 늦은 재배로 낱알이 굵은 품질을 만들어 겨우내 뒷산에 토굴에 갈무리를 했다가 이듬해 봄, 시장에 고구마가 드물어질 때 비싼 값으로 팔았다.

또, 벼농사를 짓더라도 단보 당 전국 최고의 다수확을 목표로 짓기에 소출이 많게 마련으로 전국 다수확 경진 대회에서 몇 차례 수상한 바도 있었다.

외가는 벼농사뿐 아니라, 특용 작물에도 관심을 기울여 생강·양파·도라지·박하·포도·복숭아 따위로 고소득을 올리는가 하면, 모내기 전에 왕골 재배로 이모작을 하여 농한기에 돗자리를 만들거나 가마니나 새끼를 꼬아 가외 수입을 올렸다. 내가 수십 년 외삼촌을 지켜봤지만, 당신은 심심하다고 주막을 가거나 농한기라고 화투짝을 만지는 등 허튼 일을 하는 걸 보지 못했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 집안이 기울어져서 학비에 곤란을 받자 외삼촌은 졸업할 때까지 전담해 주셨다. 어느 하루 “사람이 백 번 잘 하다가도 한 번 잘못하면 그걸로 유감을 사는데, 너는 그런 사람이 되지 말거라”라고 말씀하시며, 혹이나 당신의 언행이 어린 마음에 상처를 줄까 지레 걱정하셨다.

4.19 혁명 덕분으로 지방 자치제가 실시되자 민선 어모면장이 되고서도 퇴근 후에는 농사꾼이었다. 그분은 늘 “나처럼 일하면 못 사는 사람이 없을 거다. 큰 부자는 하늘이 내지만, 작은 부자는 부지런하면 이룰 수 있다”라고 하시면서 게으름을 가장 경계하셨다. 당신은 일흔을 넘기고도 논두렁의 풀을 베고 들판을 지켰다.

외가 뒤뜰 감나무 아래서 외삼촌 내외분과 함께 (1971년 여름)
외가 뒤뜰 감나무 아래서 외삼촌 내외분과 함께 (1971년 여름)박도
외사촌 아우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버님이 몹시 편찮은데, 형을 보고 싶어합니다.”
주말에 외가로 달려갔다. 위암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평소 건장했던 외삼촌 체구가 초췌했다. 가족들이 입원시켜 드리려고 해도 당신이 막무가내로 거절해서 집에서 요양중이라고 했다.

“이제는 죽을병이 들었다. 살만큼 살았다. 이만큼 산 것도 조상의 음덕이다. 병원에서 명을 연장하면 도리어 욕이다.”
삶과 죽음을 달관한 자세였다.

어른들이 아이들 들을까봐 몰래 소곤대던 '6.25 한국전쟁 중 누구네 집 다락방에서 숨어 지내다가 살아났다'는 얘기가 되새겨졌다. 언젠가 서랍에서 본 보도연맹증도 떠올랐다.

이튿날 아침, 떠나오려는데 외삼촌이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나도 따라 목이 메였다. 문갑에서 돈을 꺼내 주셨다.
“내가 보고 싶어 불렀으니 돌아가는 차비다.”
내가 한사코 거절하면서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드렸다.
“그 봉투는 도로 가져가서 내 죽은 후 부조금으로 내거라.”

당신은 머리맡 문갑 서랍에다 돈 다발을 풀어두고, 문병 온 일가친척 모두에게 차비를 일일이 챙겨주신다고 했다.
“내가 죽기 전에는 오지 말거라. 너와 나, 이 세상에서 인사는 오늘로 끝이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발걸음이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마을을 벗어난 후 뒤돌아보니 그때까지 방문이 열려 있었다.

그해 연초에는 한지에다 손수 가첩을 일일이 만들어 집안에 한 권씩 나눠주시고, 당신이 보고 싶은 사람은 기별하여 마지막 이승의 정을 나누면서 담담히 저승사자를 기다렸다. 내가 외가를 다녀온 지 보름만에 외삼촌의 부고를 받았다.

외삼촌이 이승을 떠신 지 10여 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그분을 생각하면 땅거미가 진 어둑한 둑에서 당신이 땀으로 가꾼 작물을 내려다보며, 그 사랑스러움에 탐닉된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당신은 성실한 흙의 아들이었다. 대들보와 같은 인물이었는데 이데올로기 족쇄에 묶여서 당신의 뜻을 못다 편 채 이승을 떠났다.

나는 책을 펴낼 때마다 외삼촌의 산소에 바친다. 그때마다 흐뭇하게 미소짓는 외삼촌의 얼굴이 떠오른다. 당신은 흙 다음으로 글을 좋아하셨다.

이태원(李泰源) 외삼촌, 저승에 가면 꼭 만나보고 싶은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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