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가 뒤뜰 감나무 아래서 외삼촌 내외분과 함께 (1971년 여름)박도
외사촌 아우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버님이 몹시 편찮은데, 형을 보고 싶어합니다.”
주말에 외가로 달려갔다. 위암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평소 건장했던 외삼촌 체구가 초췌했다. 가족들이 입원시켜 드리려고 해도 당신이 막무가내로 거절해서 집에서 요양중이라고 했다.
“이제는 죽을병이 들었다. 살만큼 살았다. 이만큼 산 것도 조상의 음덕이다. 병원에서 명을 연장하면 도리어 욕이다.”
삶과 죽음을 달관한 자세였다.
어른들이 아이들 들을까봐 몰래 소곤대던 '6.25 한국전쟁 중 누구네 집 다락방에서 숨어 지내다가 살아났다'는 얘기가 되새겨졌다. 언젠가 서랍에서 본 보도연맹증도 떠올랐다.
이튿날 아침, 떠나오려는데 외삼촌이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나도 따라 목이 메였다. 문갑에서 돈을 꺼내 주셨다.
“내가 보고 싶어 불렀으니 돌아가는 차비다.”
내가 한사코 거절하면서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드렸다.
“그 봉투는 도로 가져가서 내 죽은 후 부조금으로 내거라.”
당신은 머리맡 문갑 서랍에다 돈 다발을 풀어두고, 문병 온 일가친척 모두에게 차비를 일일이 챙겨주신다고 했다.
“내가 죽기 전에는 오지 말거라. 너와 나, 이 세상에서 인사는 오늘로 끝이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발걸음이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마을을 벗어난 후 뒤돌아보니 그때까지 방문이 열려 있었다.
그해 연초에는 한지에다 손수 가첩을 일일이 만들어 집안에 한 권씩 나눠주시고, 당신이 보고 싶은 사람은 기별하여 마지막 이승의 정을 나누면서 담담히 저승사자를 기다렸다. 내가 외가를 다녀온 지 보름만에 외삼촌의 부고를 받았다.
외삼촌이 이승을 떠신 지 10여 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그분을 생각하면 땅거미가 진 어둑한 둑에서 당신이 땀으로 가꾼 작물을 내려다보며, 그 사랑스러움에 탐닉된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당신은 성실한 흙의 아들이었다. 대들보와 같은 인물이었는데 이데올로기 족쇄에 묶여서 당신의 뜻을 못다 편 채 이승을 떠났다.
나는 책을 펴낼 때마다 외삼촌의 산소에 바친다. 그때마다 흐뭇하게 미소짓는 외삼촌의 얼굴이 떠오른다. 당신은 흙 다음으로 글을 좋아하셨다.
이태원(李泰源) 외삼촌, 저승에 가면 꼭 만나보고 싶은 분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