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황 뭐까오쿠(막고굴)의 야경.둔황연구원
이런 불교에 대한 숭배는 거대한 불사들로 이어졌다. 타가와 준조의 ‘둔황석굴’에는 둔황의 탄생배경을 3세기 중엽 이 둔황에서 태어난 축법호(竺法護)에서 유래한다고 본다. 어려서부터 총명한 그는 경전을 얻기 위해 중앙아시아를 거쳐 인도를 여행하고, 장안(長安)으로 돌아와 175부를 번역하는 족적을 남긴 중국 불교의 거인이다. 그의 덕을 칭송해 ‘월씨보살’(月氏菩薩)이라 불렀는데, 그의 고향으로 인해 ‘돈황보살’(敦煌菩薩)로도 불렸다. 그가 죽은 후 50년 가량이 지난 366년 낙준은 지금이 막고굴 근처를 지나다가 금빛이 나는 것을 보고 굴을 열게 됐다. 이후 천년 가량 지속된 둔황석굴의 서막이었다. 6백여개의 석굴안에 수많은 불상과 불화, 벽화가 만들어진 둔황은 분명히 중국 불교문화의 꽃이다.
낙준이 굴을 연후 어떻게 굴은 만들어졌을까. 둔황 부근은 ‘돈황보살’ 시절에 진(晋)왕조의 땅이었다가 이후 피비린내 나는 격전을 거듭했기에 살육의 죄업을 벗고, 민중의 구원을 기원하는 불사의 소명감은 더욱 커졌을 것이다. 이후 불도징(佛圖澄), 구마라습(鳩摩羅什), 법현(法顯) 등이 둔황의 발전을 이끌었다. 439년에는 선비족이 세운 북위(北魏)가 이 지역을 지배하면서 한층 안정적인 석굴 작업에 들어간다.
북위는 선비족(鮮卑族)의 탁발부(拓跋部)가 중국 화북지역에 세운 북조(北朝) 최초의 왕조(386∼534)로 탁발 규(拓跋珪:후의 道武帝)가 나라를 재건하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위(魏)라고 고쳤다(386). 이어 내몽골, 후연(後燕)을 격파한후 국도를 평성(平城 지금은 산시성 다퉁(大同))에 정했다(398).
이후 세력을 넓혀 중원에 들어와 439년에는 강북지역 통일했다. 그 뒤 선비족의 한화(漢化)가 촉진되었는데, 특히 효문제(孝文帝)가 즉위하자 국도를 뤄양(洛陽)으로 옮겨(494), 호복(胡服), 호어(胡語)를 금하고 호성(胡姓)을 한인(漢人)처럼 단성(單姓)으로 고치게 했으며, 황족인 탁발씨도 원씨(元氏)로 개성(改姓)하였다. 효문제는 한화정책과 함께 봉록제(俸祿制), 삼장제(三長制), 균전법(均田法) 등을 창시하여 북위의 국력과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하지만 이런 북위의 변화는 북방민족 고유의 소박한 것을 좋아하고 무술을 숭상하는 기운을 잃게 했고, 사치스럽고 문약(文弱)한 경향이 일어났다. 이후 나이 어린 효명제(孝明帝)를 섭정한 영태후(靈太后)가 지나치게 불교를 존숭하여, 사탑(寺塔) 건축에 국비(國費)를 낭비함으로써 국정을 어지럽게 하였다. 따라서 도둑이 들끓고, 524년에는 북진(北鎭) 병사의 반란이 일어났다.
하지만 북위는 중국 석굴문화 발전에 절대적인 공헌을 한 왕조라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도교에 의거해 장안에서 폐불을 단행한 3대 태무제(太武帝 423~452 재위) 때를 제외하고는 불교를 국교로 거대한 불사가 단행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북주는 지나친 한화(漢化)로 인한 힘의 약화와 내분으로 534년 멸망한다. 이때는 둔황석굴은 물론이고 롱먼석굴이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는 시기였다. 둔황지역은 서위에 속하다가 다시 북주(北周)에 의해 지배된다. 북주 3대 무제(武帝)는 국력약화를 막기 위해 574년부터 다시 폐불정책을 시행한다. 그러나 무제의 아들 선제(宣帝)가 폭군이었기 때문에 민심을 얻지 못했고, 그 틈을 탄 외척 양견(楊堅)이 정권을 빼앗아 589년 수(隋)를 세웠다. 수문제는 불교를 숭상했고, 이런 불교숭상의 기운은 당(唐)나라까지 계속되고, 진행중이던 둔황과 롱먼 석굴의 건립도 그 깊이를 더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