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로 보는 중국사

4세기에서 수당대까지 번성한 불교의 위상과 좌절

등록 2003.01.08 16:59수정 2003.01.14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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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에 무엇을 조각한다는 것은 마치 뼈를 깎는 것과 같은 고통이 수반된다. 강한 바위를 정으로 깨는 고통도 고통이지만 한번의 실수로 수년, 수십년의 공덕이 물거품 될 수 있는데, 하물며 부처를 조각한다는데 그 마음은 어떨까. 중국에서 만나는 어지간한 유물에는 이제 그다지 놀라지 않지만 거대한 불교 문화 앞에서는 좀 주눅이 든다.

대장정을 마친 홍군의 정착지이자, 중화인민공화국의 기틀을 닦은 샨시(陝西)성 옌안(延安)에 있는 칭량산(淸凉山)의 동굴속에 가면 현기증이 날 정도의 거대한 석굴들이 나온다. 특히 만개의 불상이 사방에 조각된 만불동 등은 당시의 불심을 가늠할 수 있다. 중국 공산당은 옌안시절 이 동굴안에서 런민르빠오(인민일보)의 전신인 지에팡르바오(해방일보)나 신화사 등을 태동시켰고, 중국 최대의 서점망인 신화슈디엔(新華書店)을 탄생시킨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상한 인연으로 두 번이나 칭량산을 들를 기회가 있었던 기자에게 그곳은 공산의 성지보다는 한때 불국토로서 자리한 느낌이 더 강하다.

칭량산은 물론이고 따주스커(大足石刻), 마이즈산(麥積山) 석굴 등에서 이런 느낌은 마찬가지고, 특히 둔황, 윈깡, 롱먼 등 3대 석굴에 가면 그런 느낌은 더욱 강해진다. 4세기 중반에 건설되기 시작한 둔황석굴을 비롯해 윈깡, 롱먼 석굴은 불국토를 향한 인간의 간절한 염원이 살아있다. 도대체 무슨 힘이 이렇게 거대한 불사를 이룩하게 했을까.

불교가 유입되며 상층부부터 동화

a 중국 첫 사찰인 뤄양 바이마스

중국 첫 사찰인 뤄양 바이마스 ⓒ 조창완

중국 불교의 시작을 몇 볼 수 있는 곳은 뤄양(洛陽)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바이마스(白馬寺)다. 후한(後漢) 때인 BC 67년, 인도의 승려 가섭마등(迦葉摩騰), 축법란(竺法蘭) 등이 명제(明帝)의 사신 채음의 간청으로 불상과 경전을 흰 말에 싣고 뤄양에 온다. 1년후 명제는 마이마스를 세우는 등 믿음을 실천에 옮긴다.

이 때문에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 일본 불교계에서도 전래의 중요한 성지가 되어 많은 신도들이 찾는 것이다. 지금도 이곳은 중국 사찰 가운데 승려들이 남아서 예불을 올리는 한편 수행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사찰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당시만 해도 종교의 대다수를 무속신앙에 의존하던 사람들에게 불교는 너무나 세련된 종교였다. 고급 종교의 전파는 사람들의 가슴을 흔들었는데, 우선은 불경이나 불상을 통해 불교를 접한 최고위층을 흔들고, 간접적으로 불교를 만난 사람들을 흔들었다.


a 둔황 뭐까오쿠(막고굴)의 야경.

둔황 뭐까오쿠(막고굴)의 야경. ⓒ 둔황연구원

이런 불교에 대한 숭배는 거대한 불사들로 이어졌다. 타가와 준조의 ‘둔황석굴’에는 둔황의 탄생배경을 3세기 중엽 이 둔황에서 태어난 축법호(竺法護)에서 유래한다고 본다. 어려서부터 총명한 그는 경전을 얻기 위해 중앙아시아를 거쳐 인도를 여행하고, 장안(長安)으로 돌아와 175부를 번역하는 족적을 남긴 중국 불교의 거인이다. 그의 덕을 칭송해 ‘월씨보살’(月氏菩薩)이라 불렀는데, 그의 고향으로 인해 ‘돈황보살’(敦煌菩薩)로도 불렸다. 그가 죽은 후 50년 가량이 지난 366년 낙준은 지금이 막고굴 근처를 지나다가 금빛이 나는 것을 보고 굴을 열게 됐다. 이후 천년 가량 지속된 둔황석굴의 서막이었다. 6백여개의 석굴안에 수많은 불상과 불화, 벽화가 만들어진 둔황은 분명히 중국 불교문화의 꽃이다.

낙준이 굴을 연후 어떻게 굴은 만들어졌을까. 둔황 부근은 ‘돈황보살’ 시절에 진(晋)왕조의 땅이었다가 이후 피비린내 나는 격전을 거듭했기에 살육의 죄업을 벗고, 민중의 구원을 기원하는 불사의 소명감은 더욱 커졌을 것이다. 이후 불도징(佛圖澄), 구마라습(鳩摩羅什), 법현(法顯) 등이 둔황의 발전을 이끌었다. 439년에는 선비족이 세운 북위(北魏)가 이 지역을 지배하면서 한층 안정적인 석굴 작업에 들어간다.


북위는 선비족(鮮卑族)의 탁발부(拓跋部)가 중국 화북지역에 세운 북조(北朝) 최초의 왕조(386∼534)로 탁발 규(拓跋珪:후의 道武帝)가 나라를 재건하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위(魏)라고 고쳤다(386). 이어 내몽골, 후연(後燕)을 격파한후 국도를 평성(平城 지금은 산시성 다퉁(大同))에 정했다(398).

이후 세력을 넓혀 중원에 들어와 439년에는 강북지역 통일했다. 그 뒤 선비족의 한화(漢化)가 촉진되었는데, 특히 효문제(孝文帝)가 즉위하자 국도를 뤄양(洛陽)으로 옮겨(494), 호복(胡服), 호어(胡語)를 금하고 호성(胡姓)을 한인(漢人)처럼 단성(單姓)으로 고치게 했으며, 황족인 탁발씨도 원씨(元氏)로 개성(改姓)하였다. 효문제는 한화정책과 함께 봉록제(俸祿制), 삼장제(三長制), 균전법(均田法) 등을 창시하여 북위의 국력과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하지만 이런 북위의 변화는 북방민족 고유의 소박한 것을 좋아하고 무술을 숭상하는 기운을 잃게 했고, 사치스럽고 문약(文弱)한 경향이 일어났다. 이후 나이 어린 효명제(孝明帝)를 섭정한 영태후(靈太后)가 지나치게 불교를 존숭하여, 사탑(寺塔) 건축에 국비(國費)를 낭비함으로써 국정을 어지럽게 하였다. 따라서 도둑이 들끓고, 524년에는 북진(北鎭) 병사의 반란이 일어났다.

하지만 북위는 중국 석굴문화 발전에 절대적인 공헌을 한 왕조라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도교에 의거해 장안에서 폐불을 단행한 3대 태무제(太武帝 423~452 재위) 때를 제외하고는 불교를 국교로 거대한 불사가 단행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북주는 지나친 한화(漢化)로 인한 힘의 약화와 내분으로 534년 멸망한다. 이때는 둔황석굴은 물론이고 롱먼석굴이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는 시기였다. 둔황지역은 서위에 속하다가 다시 북주(北周)에 의해 지배된다. 북주 3대 무제(武帝)는 국력약화를 막기 위해 574년부터 다시 폐불정책을 시행한다. 그러나 무제의 아들 선제(宣帝)가 폭군이었기 때문에 민심을 얻지 못했고, 그 틈을 탄 외척 양견(楊堅)이 정권을 빼앗아 589년 수(隋)를 세웠다. 수문제는 불교를 숭상했고, 이런 불교숭상의 기운은 당(唐)나라까지 계속되고, 진행중이던 둔황과 롱먼 석굴의 건립도 그 깊이를 더해간다.

a 둔황 뭐까오쿠의 벽화

둔황 뭐까오쿠의 벽화 ⓒ 둔황연구원

특히 690년 당 고종(高宗)이 병이 심해지자 중국 최초의 여제인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제위를 찬탈한다. 또 그녀를 모델로한 롱먼 석굴 최대의 불상인 봉선사(奉先寺) 석굴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 봐도 무리하기 그지 없는 불사의 연속은 국력의 쇠퇴를 부른다. 당(唐) 무종(武宗)은 845년 도교 이외의 모든 종교를 금할 것을 명령한다.

물론 이후에도 둔황석굴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지속적으로 석굴은 만들어진다. 물론 이런 석굴은 국가 규모의 거대한 석굴보다는 불심에 기초한 석공이나 귀족의 불심에 의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공간 배경, 거대한 황토고원

그럼 석굴이 만들어진 지역은 어떤 특성을 갖고 있을까. 지리적으로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중국의 영토에 비하면 3대 석굴과 따주스커, 칭량산 석굴이 있는 지역은 비교적 집중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중심점은 중국 중서부에 위치한 거대한 고원이나 사막지형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샨시성을 포함해 깐수, 닝샤 등 서부의 중심부는 황토고원(黃土高原)이 있다. 해발 1000에서 2000미터에 위치한 이 고원은 이 지역의 황량한 지형에 영향을 준다. 거대한 협곡의 연속인 이곳은 마오쩌둥이 홍군을 이끌고 대장정의 종착점으로 삼을 만큼 적을 방어하기에는 적지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거대한 황토의 연속인 이곳은 적에게 노출되기 쉬워서 약점도 적지 않은 지역이다.

이 황토고원을 중심으로 한 지역의 생활환경은 극히 열악하다. 나무가 적고, 강수량이 적어서 농사가 어렵다. 2002년 초여름 이 지역에는 그다지 많은 비가 내리지 않았음에도 순식간에 백여명의 목숨을 잃는 홍수가 일어나기도 했다. 또 여름에는 기온이 40도 정도로 폭염이 계속되고, 겨울에는 영하 20도까지 떨어지는 등 혹서가 계속되는 지형이다.

또 이 지역은 서쪽으로 티벳, 북쪽으로 위구르, 선비, 몽골 등 강력한 힘을 가진 민족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런 민족들은 수시로 중국을 넘봤고, 수, 당등 한족의 국가는 화번공주나 불공정 거래를 통해 이들에게 조공아닌 조공을 바치는 형국이었다. 물론 한무제 등은 신장 위구르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한족은 무력하기 그지 없었다. 이런 상황은 당연히 어떤 절대적인 기원들을 불러 일으켰고, 때문에 사찰이나 석굴과 같은 불사들도 늘어났다.

3대 석굴의 역사와 현재

a 따통 윈깡스쿠

따통 윈깡스쿠 ⓒ 조창완

둔황석굴은 그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가장 긴 수축역사를 갖고 있다. 둔황이 위치한 실크로드는 이방 문화가 중국에 들어오는 절대적인 공간이었다. 시안(西安)에서 란저우(蘭州)를 거쳐, 진창(金昌)을 거치면 진대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지아위관(嘉峪關)에 닿는다. 이곳에서 조금 더 가면 안시(安西)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타리무(塔里木)분지 남쪽을 경유해 유럽으로 가는 길과 북쪽을 경유해 유럽이나 러시아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남쪽 길에 접어들어 얼마가지 않아서 둔황이 나온다. 그곳에 위치한 둔황석굴은 4세기 중반부터 13세기에 이르는 1000년 간 석굴 조영자(石窟造營者)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졌다. 이 벽화는 표면에 석회를 칠한 벽면 위에 짙은 채색의 불교회화를 치밀하게 묘사했는데, 제작 연대별로는 위대(魏代)가 22굴, 수대(隋代)가 90굴, 송대(宋代)가 103굴이 있다. 그 중에는 청대(淸代)에 들어와서 그린 것들도 있다. 여전히 보존과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이 유산은 ‘둔황학’이라는 학문의 카테고리를 만들었지만 아직도 그 전모의 상당수가 발견되지 않은 거대한 유산이다.

그럼 누가 이 굴들을 만들었을까. 수잔 핫필드는 과거 인물을 생생하게 재 구성해놓은 ‘실크로드 이야기’에서 둔황석굴을 만드는 데 평생을 바친 화가 둥바오더(965)를 부활시킨다. 당시는 실크로드 동쪽 절반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주변의 강국들, 즉 서쪽의 이슬람, 북쪽의 투르크와 위구르, 남쪽의 티베트, 그리고 동쪽의 중국이 쟁탈을 벌이는 상황. 화가 둥바오더는 석굴의 완성을 위해 자식은 물론이고 아내를 팔아가면서 자신의 목숨을 연명하면서 석굴을 완성한다.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둔황은 완성될 수 있었다. 하지만 불교의 쇠약과 더불어 둔황은 서서히 잊혀져갔다.

그리고 다시 둔황이 얼굴을 드러낸 것은 좀 비극적이었다. 당대 중국 문화학자의 대명사인 위치우위(余秋雨)는 스스로 “(둔황) 막고굴은 미칠 듯한 기쁨이자 해방이다. 그 품 안에서 신과 인간은 하나가 되어 시공을 날아오른다. 그리하여 인간은 신화와 우언(寓言)의 세계로, 신비한 우주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미칠 듯한 기쁨이 곧 천연의 질서가 되고, 해방이 천부의 인격이 된다. 예술의 천국은 바로 이러한 자유의 전당인 것이다”고 극찬한 그 유산의 대부분을 발견자 완원록의 욕심으로 문화유산을 탐내던 유럽 문화재 사냥꾼의 손으로 넘긴다. 때문에 지금은 거금을 주고 그 마이크로 필름을 사와 연구해야하는 상황이다.

a 윈깡스쿠 안 조상과 채색. 화려한 느낌이 살이있다

윈깡스쿠 안 조상과 채색. 화려한 느낌이 살이있다 ⓒ 조창완

북위의 불교 흥위와 더불어 시작된 따통 윈깡(云崗)석굴은 북위의 초기 국도인 따통(大同)의 서쪽 교외 우저우산(武周山)에 자리하고 있다. 460년부터 465년까지 저명한 승녀 담약(曇曜)의 주도로 이룩된 윈깡 석굴은 현재 53개의 동굴에 5만1천여의 석각이 남아있으며, 5굴의 조상은 높이 17미터의 거대한 석조좌상이다. 또 6번 굴에는 중앙에 15미터 높이의 장방형의 탑둥이 천장까지 닿아 있는데, 동굴의 측면과 탑을 장식하고 있는 소벽에는 부처의 탄생에서 열반에 이르기까지의 일생을 묘사한 정교한 조각들이 새겨져 있다. 이 두 동굴 장식은 윈깡석굴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그 규모도 규모이지만 섬세함이 돋보이고 색채의 현란함도 전혀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한다. 희미한 조명속에 떠오르는 부처의 얼굴 하나 하나에서 순진무구한 미적 감각을 느끼게 함은 물론이고, 시대를 초월한 다른 차원으로 유혹하는 듯하다. 윈깡석굴은 1500년이 넘은 석굴로 롱먼 석굴에 비해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상대적으로 척박하고, 인적이 적은 곳에 있어 손실이 덜하고, 또 예상외로 석질이 단단해 아직까지 상당수의 불상들이 비교적 온전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북위는 494년 국도를 따통에서 뤄양(洛陽)으로 천도한다. 이미 한족 문화에 깊숙이 침윤된 효문제의 이 천도로 불교계도 뤄양으로 따라온다. 이에 따라 뤄양 교외에 있는 이허(伊河)를 마주보고 있는 향산(香山)과 롱먼산(龍門山)에 석굴이 세워지기 시작한다. 북위에 시작된 석굴은 이후 불교를 숭상했던 동주, 동한, 조위, 서진, 북위, 수, 당 등의 시간은 물론이고 민중에 불교가 뿌리 내리기 시작한 북송(北宋)시대의 유산까지도 포괄하고 있다. 때문에 롱먼 석굴의 건축사는 당대 문화를 바라보는 가장 좋은 바로미터의 역할을 하고 있다.

롱먼 석굴의 가장 두드러지는 불상은 봉선사(奉先寺)의 중심에 자리한 노사나대불(盧舍那大佛)은 측천무후를 모델로 해선지 불상이 아닌 미인상이라고 할 만큼 아름다운 자태를 하고 있다. 또 주위 불상들이 상당수 파괴된 데 반해 거의 훼손된 흔적이 없는 등 독특한 느낌을 자아낸다. 몇 개의 불상을 제외하고 상당수의 불상이 훼손된 것은 도시와 가까이 있어 사람의 흔적을 많이 탄 탓도 있지만 롱먼석굴은 윈깡의 사암에 비해 조각이 쉬운 만큼 부식이 빠른 회색 석회암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번성한 불교, 하지만 봄날은 가고

a 뤄양 롱먼 석굴의 불상

뤄양 롱먼 석굴의 불상 ⓒ 조창완

수 당대에 왕실에서부터 번성한 불교는 하지만 중국 사상이나 종교의 주도권을 영원히 쥘 수 없었다.
당말에 무종(武宗)이 도교 이외의 모든 종교를 금지시키는 불교에 대한 금지가 시작됐고, 북송시대에는 유교 이념들이 정치를 지배하면서 상대적으로 불교는 위축됐다. 특히 북송 때인 1073년 주돈이(周敦頤) 등에 의해 성리학(性理學)이 형성되고, 남송 때인 1175년 주희(朱熹)가 성리학을 완성하면서 상대적으로 불교는 더욱 위축된다.

불교의 위축은 정치사상으로 주로 작용한 유교나 토착사상과 결합한 도교의 번성 등 다양한 원인이 있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초기에는 神異, 기적 및 주술, 기도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사로 잡을 수 있었지만, 그것이 고도의 문화적 전통을 가진 중국의 풍토에 적응하면서 사상계를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직면하는 난관이 있었다. 그것은 위진(魏晋)시대 지식인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노장사상’과의 관계를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것이었다.”(金谷治 ‘중국사상사’ 가운데) 이 과정에서 불교는 도교나 토착사상을 상당수 수용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불교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서서히 잃기 시작했다.

결국 수, 당대에 가진 긴 영화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민중의 마음에는 도교가, 정치인의 마음에는 유교가 더 크게 자리했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상에 절대적으로 몰입할 것을 주창하는 불교의 사고관은 어떤 사상이든 자신들에게 흡수시키려는 불교와 근본적으로 맞지 않았을 수도 있다. 다만 도교에 비해 휠씬 종교적 성향이 강한 불교는 중국적 성격이 강한 선종(禪宗) 불교로 자리했고, 훗날 라마불교의 형태로 다양하게 숭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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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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