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18

혈겁의 시작 (3)

등록 2003.01.14 13:29수정 2003.01.14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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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범을 보여준 지 이제 겨우 한 시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 마치 석 달은 연마한 사람처럼 봉을 다루었던 것이다.

"아니야! 넌 정말 잘한다. 자, 그럼 이번엔 이렇게 해봐. 아까 넌 이렇게 했었지? 자, 발을 이렇게 한 다음에 손은 이렇게, 그리고 이때 어깨는 이렇게 해, 시선은 어디를 가격할 곳을 향하고, 다음에 이렇게 손목에 힘을 주면… 봤지? 아까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는 느낌이지? 자, 이제 한번 해봐."


이번에도 왕구명의 시범을 눈 여겨 본 이회옥은 지체하지 않고 봉을 휘둘렀다. 그러자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한 탄성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한 달 후, 이회옥은 봉을 제 몸 다루듯 움직이고 있었다. 회전할 때면 제법 예리한 파공음도 터져 나왔다. 한참 봉을 휘두르고 있을 즈음 왕구명이 무엇인가를 들고 나왔다.

"좋아, 그 정도면 되었어. 자, 그럼 이번엔 이걸 한번 해봐!"

왕구명의 말에 이회옥은 의아하다는 눈빛을 발했다. 다리가 부러진 탁자를 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후! 이게 뭐냐고? 널 봉술의 대가로 만들어 줄 거지. 자, 봐라. 여기 못 대가리들이 튀어 나와 있지? 지금부터 너는 그 봉으로 이 못을 박아야해. 알았지?"
"알았어. 형! 그 정도쯤은 문제없어."
"후후! 쉬울 것 같지? 자만하지 마라. 결코 쉽지 않을 테니까."


왕구명의 말에 이회옥은 그래도 자신이 있다는 듯 안광을 빛냈다. 그리고는 즉각 봉으로 못 대가리를 겨냥하고는 찔렀다. 하지만 봉은 못 근처에도 못 갔다. 겨냥한 대로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탁자 위로 튀어나온 부분은 두 치 가량 되었다. 그런데 그 못을 맞추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을 소비하지 않았다. 수십 번이나 찔렀는데 한 번도 제대로 맞추지 못했던 것이다. 때로 못 대가리를 가격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겨냥했던 못이 아니었다.


오기가 생긴 이회옥은 이를 악물고 연신 찔러댔다. 저녁나절 왕구명은 탁자를 보고 빙그레 미소지었다. 열 개 중 제대로 박힌 것은 불과 두 개였고, 나머지는 모두 볼썽사납게 굽혀져 있었다.

"여기 이 못들이 왜 이렇게 꺾여 있는지 알아?"
"그건, 빗맞아서…"
"맞아! 정확하게 가격하지 않으면 이렇게 못이 꺾여 버리지. 고수가 되려면 이런 못이 있어서는 안 돼!"
"……!"

말이 없는 이회옥을 바라본 왕구명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강호에 신창(神槍)이라는 외호로 불리는 고수가 있었지. 현재 점창파 장문인인 철혈신창 문인걸의 사조지. 그 사람은 뾰족한 창 끝으로 못을 박았는데 일 각만에 천 개를 박았다고 한다. 하지만 단 한 개도 구부러진 것이 없었다고 한다."
"우와! 일 각에 천 개…? 그것도 끝이 뾰족한 창으로…?"
"그래, 봉이나 창이나 끝이 다를 뿐 길이는 비슷하지, 하지만 봉은 창보다 끝이 훨씬 뭉툭하니까 더 쉬울 거야. 안 그래?"
"으음…!"

낮은 침음성을 내며 고개를 끄덕인 이회옥은 손끝으로 봉의 끝을 더듬고 있었다. 불과 열 개의 못을 박아 넣는데 걸린 시간이 거의 반나절이었다. 그 가운데 팔 할은 구부러져 있었다.

그런데 신창이라는 사람은 천 개의 못을 불과 일 각만에 하나도 구부러트리지 않고 박아 넣었다고 한다. 이 말에 질렸기에 침음성을 내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하! 무얼 해? 왜, 너는 못할 것 같아서? 신창도 사람이고 너도 사람이야. 그 사람도 했는데 못할 이유가 없지? 그럼, 한번 해봐. 노력해서 안 될게 뭐가 있냐? 알았지?"

이회옥의 등을 두들긴 왕구명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 신창 어쩌고 하는 것은 순전히 지어낸 말이었기 때문이다.

'후후! 녀석, 일 각만에 천 개를 박는 사람이 어디에 있냐? 크크! 고생 깨나 하겠군. 크크크크…!'

행여 자신이 웃고 있다는 것이 들킬까 싶은 왕구명은 서둘러 밖으로 향하였다. 이회옥의 시선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당도한 그는 배를 움켜쥐고 데굴데굴 구르면서 키득거렸다.

지금껏 무공을 익히는데 있어 자신의 예상을 번번이 깨던 이회옥이었지만 이번에는 절대 못할 것이며, 손에 물집이 잡히도록 고생을 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한편 홀로 남겨진 이회옥은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물고 있었다.

"좋아!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했지? 죽어라고 노력하면 나도 할 수 있을 거야. 반드시 해내고야 말 거야! 흥! 일 각에 천 개? 좋아, 난 일 각에 천 개하고도 한 개를 더 박아 넣겠어."

잠시 후 이회옥은 탁자에 못을 박기 시작하였다. 다음 날 천 개 하고도 한 개의 못이 더 박힌 탁자를 바라보는 이회옥의 눈에는 투지가 불타고 있었다. 이것은 신화(神話)의 시작이었다.

"얍! 얍! 야아압!……"

청룡무관의 연무장 한편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한 이 기합성은 비가 오나 폭풍우가 몰아치나 한결 같이 터져 나왔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밥 먹는 시간과 자는 시간, 그리고 책을 보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에 터져 나왔다. 하루 중 적어도 세 시진은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이는 왕구명이 독서하기를 강권하였기 때문이었다.


"우와! 너, 너 정말…!"

본격적으로 봉술을 익히기 시작한지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왕구명은 신기에 가까운 솜씨를 보고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야아압!"
쿵!
"얍! 얍! 얍! 야하압!"
쿵! 쿵! 쿵! 쿵―!

봉이 전진할 때마다 못이 잔뜩 박혀 있는 탁자가 조금씩 뒤로 밀리고 있었다. 물론 못은 대가리만 남기고 있었다. 구부러진 못은 단 하나도 없었다. 고슴도치가 연상 될 정도로 수 없이 많이 박혀 있던 못이 순차적으로 박혀드는 모습은 가히 신기(神技)라 할만하였다.

최근 몇 달 동안 왕구명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무천장에서 새로 내린 임무 때문이었다. 전에는 최하위라 할 수 있는 수문위사였는데 몇 달 전에 무천장 주위를 도는 순라(巡邏)로 승차(陞差: 승진) 하였다. 글자 그대로 무천장 주위를 돌면서 혹시 수상한 자가 접근하는 가를 살피는 것이 임무였다.

벌써 몇 달이나 되었지만 새로 맡은 임무에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몹시 피곤하였다. 게다가 귀가하면 밥을 먹기 바쁘게 청룡검법 후반부를 연성하느라 여념이 없었기에 수련을 마치고 나면 골아 떨어지기 바빴다. 하여 이회옥의 봉술에 크나큰 진전이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야하압!"
쿵―!
짝짝짝!
"우와! 정말 잘했다. 잘했어! 이 정도로 일 줄이야… 하하! 이게 바로 사별삼일즉당괄목상대(士別三日卽當刮目相對)군."
"어! 혀, 형 언제 왔어?"

박혀든 못 가운데 구부러진 것이 없나 살피느라 미간을 좁히던 이회옥은 등뒤에서 터져 나오는 박수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이 녀석! 넌 정말 무학의 천재인 것이 틀림없어. 가만 있자 작년 이맘때쯤 시작했으니까 일 년만에… 우와! 넌 정말 천재임에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왕구명은 박혀든 못 대가리들을 일일이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확인하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설마 일 년만에 이토록 장족의 발전을 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형, 그런데 조금 전에 말한 거 사별삼일즉당 어쩌고 하는 건 무슨 뜻이야? 그게 무슨 소린지…"
"뭐라고? 아직 사별삼일즉당괄목상대라는 말도 몰라? 안 되겠다. 이 녀석 그 동안 봉술을 익히느라 학문을 게을리 했구나. 좋아, 이번엔 설명을 해 주지. 사별삼일즉당괄목상대란…"

왕구명은 오랜만에 자신의 학식을 뽐낼 기회를 찾았다는 듯 신나서 입을 열었다.

삼국시대 초엽, 오왕(吳王) 손권(孫權)의 신하 가운데 여몽(呂蒙)이라는 장수가 있었다. 그는 본시 무식한 사람이었으나 혁혁한 전공(戰功)을 쌓아 장군이 된 입지전 적인 인물이었다.

어느 날 여몽은 손권으로부터 공부하라는 충고를 받았다. 이에 그는 전쟁터에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手不釋卷)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 후 중신 가운데 가장 유식한 재상 노숙(魯肅)이 시찰을 나섰다가 오랜 친구인 여몽을 만났다. 그런데 노숙은 대화를 나누다가 박식해진 여몽을 보고 너무나 놀랐다.

"아니, 이보게 언제 그렇게 공부했나? 자네는 이제 오나라에 있을 때의 여몽이 아닐세 그려(非復吳下阿蒙)."

그러자 여몽은 이렇게 대꾸했다.

"후후후! 무릇 선비란 헤어진 지 사흘이 지나서 다시 만났을 땐 눈을 비비고 대면할 정도로 달라져야 하는 법이라네(士別三日卽當刮目相對)."

노숙이 병사하자 여몽은 그 뒤를 이어 오왕 손권을 보필하여 국세를 신장시켰다. 그는 촉(蜀) 땅을 차지하면 형주(荊州)를 오나라에 돌려주겠다던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유비(劉備)의 촉군(蜀軍)을 치기 위해 손권에게 은밀히 위(魏)나라의 조조와 화해, 제휴할 것을 진언하여 이를 성사시켰다.

그러던 중 형주를 관장하고 있던 관우(關羽)가 중원으로 출병하자 여몽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출격하여 여러 성을 하나 하나 공략한 끝에 마친 내 관우까지 사로잡는 큰공을 세운 장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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