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25

첫 눈에 반했어. (5)

등록 2003.01.21 13:39수정 2003.01.21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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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옛날에 어떤 구두쇠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가을날, 그 집 하인이 병에 걸렸다고 한다. 오한, 구역질이 나타나며 삭신이 쑤시고 먹지도 못했다. 학질이란 병이다. 구두쇠는 약값이 많이 들 것 같자 하인을 내쫓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으음! 정말 나쁜 사람이군요."
"허허! 녀석…"


북의 목재충은 성질 고약한 구두쇠에게 화가 난다는 듯 안광을 빛내는 장일정을 바라보며 소탈한 웃음을 지었다. 불의를 보고도 화를 낼 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기 때문이다.

"흐음! 어쨌든 그 구두쇠는 하인에게 더 이상 필요 없으니 나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하인은 천지간에 오갈 데라곤 아무데도 없는 천애고아이니 한번만 봐 달라고 통사정을 했지."
"에이…! 저 같았으면 더럽고 치사해서 그냥 나왔을 겁니다. 설마 산 입에 거미줄 치겠습니까?"
"허허! 말을 더 들어 보아라. 아무튼 구두쇠는 기어코 하인을 쫓아내고 말았다. 하인은 그동안 소처럼 일을 했는데도 쫓겨나자 서럽기 그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쩌겠느냐? 이미 쫓겨난 것을…! 갈 곳이 없어진 하인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걸어가다가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고 한다."
"어휴! 불쌍해… 사부님 그 하인이 너무 불쌍해요."

북의는 불의에 화를 낼 줄 알고 불쌍함이 무엇인지를 아는 제자가 대견하다는 듯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무릇 참된 의원이 되려면 여러 도리를 지켜야 하는데, 그 가운데 으뜸이 환자를 긍휼히 여겨 구휼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허허! 녀석도…"
"사부님,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요? 그 하인은 죽고 구두쇠는 천벌을 받았나요?"
"허허! 아니다. 그 하인이 쓰러진 곳은 어느 연못가였다고 한다. 한참 후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 하인은 일어나려고 했으나 도저히 일어날 수 없었다고 한다."
"에구, 불쌍해…!"
"허허! 아무튼 그 하인은 배는 고픈데 일어날 수 없자 연못가에 있던 풀뿌리를 캐서 질겅질겅 씹었다고 한다. 그렇게 칠 주야를 지났을 무렵 열도 내리고 춥던 것도 없어졌다고 한다."
"우와! 그럼 그 뿌리가 영험한 약재라도 되었나요?"
"허허! 녀석, 이야기를 더 들어 보거라. 병이 낳자 그 하인은 다시 구두쇠네 집으로 돌아갔단다."
"왜요? 병이 다 낳았으면 다른 데로 가지. 세상에 그 구두쇠네 집 밖에 없는 것은 아니잖아요."
"허허! 글세 그걸 어찌 알겠느냐? 아무튼 그렇게 했다고 한다. 구두쇠네 집에서 그 하인은 또 소처럼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구두쇠의 칠 대 독자가 학질에 걸렸다고 한다."
"우와! 만세. 그 구두쇠가 드디어 천벌을 받았군요."
"허허허! 그 구두쇠는 자식이 학질에 걸리자 하인이 그 병에 걸렸었다는 것을 생각해 내고는 어떻게 나았느냐고 물었단다."

장일정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절대 가르쳐 주면 안 돼요! 그 나쁜 구두쇠더러 전 재산을 내 놓으면 가르쳐 준다고 해야 해요."
"쯧쯧…! 이 녀석아, 그러면 안 되지. 사람이 아픈데…"

북의는 잠시 제자를 바라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하인은 자신이 쓰러졌던 연못가에서 풀뿌리를 캐 가지고 와 달여 먹였다고 한다. 물론 구두쇠의 아들은 거뜬히 일어섰지."
"에이,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그 하인은 바보였나 봐요."
"그 풀뿌리가 바로 시호(柴胡)라는 약재이다. 시호는 학질 이외에도 견비통이나 뼈마디가 결리는데 사용한다. 그리고 아까 말했지만 가을에 채취하는데 주로 물가에 많이 있단다."
"시호요?"
"그래. 시호는 추웠다 더웠다를 반복하는 한열왕래(寒熱往來)와 내외열이 안 풀리는 것을 주로 치료하며, 뼈마디가 아픈 것을 낳게 하는데 특히 학질에 좋다. 발산하는 성질이 있는 약재이기 때문이니라. 이러한 발산을 돕기 위하여 술의 힘을 빌리기도 하는데 술로 씻어서 사용한다. 특히 보중익기탕(補中益氣湯)…"

사부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장일정은 부지런히 붓을 놀리고 있었다. 지난 일 년간 이렇게 탕약의 원료가 되는 약재에 대한 설명을 받아 적은 것만 하여도 족히 열 권은 되었다.

북의의 가르침은 이처럼 알기 쉽고 이해하기 쉬웠다. 한번 들으면 다시는 잊지 못하도록 재미있는 이야기를 곁들였기 때문이다.

한참이나 시호에 대한 설명을 받아 적던 장일정은 끝났나 싶어 고개를 들었다. 더 이상 설명이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든 그는 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부의 모습을 보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사부의 뽑아드는 회초리 때문이었다.

북의는 여간해서는 체벌을 가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번 체벌을 가할 때면 따끔하다 못해 평생 잊지 못할 정도였다. 그렇기에 자신이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가 싶었던 것이다.

"썩, 종아리를 걷고 서지 못할까?"
"사, 사부님!"
"네 이노옴! 이 사부가 늘상 하던 말이 무엇이더냐?"
"……!"

장일정은 아직 자신이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눈만 멀뚱거리고 있었다.

"네 이놈! 너는 조금 전에 그 하인이 어디에 약재가 있는지 가르쳐 주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

사부의 지적을 들은 장일정은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였는지를 깨닫고는 흠칫거렸다. 사부는 의원에게 있어 환자를 돌보는 것은 은자를 버는 수단이 아니라고 하였다.

의술을 배운 이상 그것은 단지 의무일 뿐이라 하였다. 그러면서 환자의 빈부(貧富)나 관직의 유무 등은 모두 쓸모 없는 것이라 하였다.

따라서 환자가 왕후장상(王侯將相)이거나 거지이거나 상관하지 말고 한결 같은 마음으로 돌봐야 한다 하였다. 설사 살부살모를 저지른 원수라 할지라도 환자로서 찾아왔다면 마땅히 고쳐 주어야 한다 하였다. 그것도 지극한 정성을 들여서!

그렇기에 자신이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깨달은 장일정은 두말하지 않고 스스로 종아리를 걷었다.

북의는 의원이라 할지라도 사람인 이상 약재를 잘못 써서 환자를 중태에 빠트리거나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 하였다. 고의가 아닌 이상 이러한 것은 용서가 될 수 있다 하였다.

하지만 사사로운 욕심이나 원한으로 재물을 밝히거나 치료할 수 있는 환자를 방치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 하였다.

평상시에는 자애스런 할아버지 같은 사부이지만 이러한 원칙에 어긋나는 언행을 하면 가차없는 체벌로 다스리곤 하였다. 그렇기에 스스로 종아리를 걷고 있는 것이다.

"흐으음! 네 녀석 스스로 무엇을 잘못 하였는지를 깨닫고 종아리를 걷었으므로 특별히 용서하여 백 대만 때리도록 하겠다."
'백 대? 으윽, 오늘 죽었다. 하지만 휴우…!'

사부의 말에 장일정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을 잊지 않았다. 특별히 용서하여 백 대를 때리겠다는 것은 엄청나게 화가 났다는 것과 같다.

얼마 전에 종아리 오백 대를 맞고 열흘이나 기어다닌 적이 있었다. 사부의 금창약이 없었다면 무진장 고생했을 것이다.

종아리의 살이 온통 터져 나가 선혈이 줄줄 흘렀지만 사부는 추호도 용서하지 않고 예정된 오백 대를 채웠다. 이때 장일정은 형틀 같은 것에 묶여 있었기에 꼼짝없이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그 고통을 어찌 잊으랴! 필설로는 형용할 수 없을 고통 속에서 수십 번이나 혼절의 나락으로 떨어져 내렸었다. 하여 다시는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수없이 맹세하였건만 오늘 그 맹세가 깨진 것이다.

휘이이익! 차악―!
"으으윽!"

쐐에에에에엑! 챠악―!
"크흐으윽!"

단 두 번의 매질이었지만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장일정의 아랫입술은 터져 있었고,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너무도 고통스러웠기에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던 것이다.

북의의 손에 들린 것은 어린아이 손가락보다도 가느다란 버드나무 가지였다. 그것은 살을 파고들기라도 하려는지 종아리에 착착 감기면서 엄청난 통증을 유발시키고 있었다.

"정아야! 오늘의 이 고통을 부디 잊지 말아야 한다. 이는 네가 미워서 때리는 것이 아니다. 사부는 네가 평생토록 의원의 본분이 무엇인지를 잊지 말라고 때리는 것이다. 그리고 의술을 모르면 모르되 이왕 알려면 제대로 알고, 진정으로 환자를 불쌍하게 여기는 심의(心醫)가 되도록 노력해라. 알겠느냐?"

쐐에에에에엑! 챠아아악―!
"크으으으으윽! 아, 알았습니다."

장일정은 극심한 통증을 느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애원한다고 중간에 그만둘 사부도 아니지만,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기 위하여 끝까지 참으리라 결심하였기 때문이었다.

백 대를 모두 채운 후 마치 불로 지지는 듯한 극심한 통증을 억지로 참던 장일정의 종아리 살은 마치 넝마처럼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선혈이 뒤범벅이 되어 웬만한 비위를 가진 사람이라면 바로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였다.

"으으음! 많이 아팠느냐?"
"예! 사부님. 으윽! 아, 아파요."

침상에 엎드린 장일정은 금창약을 발라주는 사부의 손길에 극심한 틍증을 느끼고 이마를 잔뜩 찌푸렸다.

"허허허! 녀석… 사부가 원망스러웠지?"
"아, 아닙니다. 으으윽! 제자가 잘못했는걸요. 사부님의 가르침을 잠시나마 잊었으니 맞아도 쌉니다. 으윽! 아, 아파요. 으윽! 아프다니까요."
"허허허! 대견하구나. 이 사부는 너를 천하제일의로 만들고야 말겠다. 남의(南醫)가 이 부근에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내게 탕약을 배우고 그에게 침구를 배운다면 명실상부한 천하제일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에 그를 한번 찾아보거라. 알겠지?"
"예! 사부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으윽! 거기 아파요."

북의는 아직 어리다면 어린 제자인 장일정에게 병 주고 약을 주고 있었다. 금창약을 골고루 펴 바른 뒤 깨끗한 천으로 종아리를 감싸는 것으로 모든 치료는 끝났다.

워낙 신묘한 효능을 지닌 것이니 상처가 덧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또한 흉터 역시 생기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열흘만 지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말끔하게 날 것이다.

졸지에 천애고아가 되었던 장일정은 이렇게 사부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출중한 능력을 지닌 의원으로 성장해 가고 있었다.

의술에는 탕약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가 바로 침구(鍼灸)이다. 둘째는 웬만한 의원은 감히 꿈도 못 꾸는 부술(剖術)이다.

오래 전 화타는 마비산(痲痺算)이라는 것을 이용하여 환자를 혼절케 한 후 오장육부를 갈랐다가 다시 꿰매 놓았다고 한다. 화살 맞은 관우를 치료한 것과 지독한 두통에 시달리던 조조에게 머리를 절개하겠다고 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탕약과 침구, 그리고 부술은 배우기만 하면 누구든 가능하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진기로 치료하는 내가진기술만은 불가능하다. 의원 본인에게 내공이 없으면 시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으으음! 결국 그를 만나야 하는가?"

북의는 제자를 천하제일의로 만들기 위하여 오십 년 전에 헤어진 어떤 남녀의 영상을 떠올렸다.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그들은 혼례복을 걸치고 마냥 행복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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