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26

北醫와 南醫 (1)

등록 2003.01.22 14:29수정 2003.01.22 15:25
0
원고료로 응원
오십 년 전, 긴 한숨을 내쉬며 침울한 표정으로 곤륜산 깊은 계곡을 내려서는 한 인물이 있었다. 젊은 시절의 북의 목재충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공통점이 있다면 이마가 훌렁 벗겨졌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불과 이십의 나이였지만 오십은 족히 먹은 중늙은이처럼 보였다.

허름한 의복을 걸친 그의 품에는 오늘 날 북의라는 명성을 얻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한 권의 서책이 있었다.


전국시대 때 뛰어난 의술로 한 시대를 풍미한 진월인(秦越人)은 하북성(河北省) 임구(任邱) 사람이다. 하지만 세상사람들은 그의 본명보다 화타(華陀)와 더불어 전설처럼 전해지는 신의(神醫)인 편작(扁鵲)이라는 외호를 더 잘 알고 있다.

태사령(太史令) 사마천(司馬遷)이 저술한 사기(史記)에 기록되어 있기를 편작은 죽었던 호(號)나라 태자를 살려냈다고 한다. 맥진(脈診)에 정통하여 이 방면의 시조로 추앙 받는 그는 여러 방면에 두루 뛰어났다고 한다.

조(趙)나라를 지날 때에는 대하의(帶下醫: 산부인과 의사)로, 주(周)나라를 지날 때에는 이목비의(耳目鼻醫: 이비인후과 인사)로, 진(秦)나라를 지날 때에는 소아의(小兒醫: 소아과 의사)로 명성을 떨쳤다.

그런데 진나라 태의령(太醫令) 이함은 자신의 의술이 편작만 같지 못함을 시기하여 그를 살해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의 저서로는 편작내경(扁鵲內經)과 편작외경(扁鵲外經)이 있었다고 하는데 내경은 탕약에 대한 것이고, 외경은 침구에 관한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다 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목재충의 품에 있는 것은 편작내경이었다.


침울한 표정을 짓는 그의 뇌리에서 마냥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청년은 하루라도 안 보면 죽을 것 같던 사매와 혼례를 올린 사제 호문경(湖們景)이었다.

어렸을 때 둘은 전란(戰亂) 중에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었다. 곤륜산에서 멀지 않은 작은 촌락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며 비럭질로 연명하던 둘은 곤륜신의(崑崙神醫) 옥원군(玉元君)에 의하여 한날 한시에 거둬졌다.


이후 둘은 친형제처럼 가까워졌다. 서로가 서로를 어찌나 아끼는지 어떤 사람들은 둘이 친형제일 것이라고 단언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곤륜신의는 천하절색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여인 하나를 데리고 왔다. 멀리 무공을 익히러 떠났던 월궁옥녀(月宮玉女) 옥란희(玉蘭姬)였다. 그녀는 곤륜신의의 금지옥엽(金枝玉葉)이자 장중주(掌中珠)이며 무남독녀였다.

목재충과 호문경은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그녀를 처음 보는 순간 한눈에 반해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워낙 출중한 미모를 지닌 여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한편, 제자들이 여식을 좋아한다는 것을 눈치 챈 곤륜신의는 한 가지 제안을 하였다. 둘 가운데 의술의 경지가 더 깊은 자와 여식이 혼례를 올리도록 하겠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좀더 의술에 정진하지 않을까 하는 순수한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이 때문에 친형제처럼 서로를 아끼던 둘은 견원지간(犬猿之間)으로 변모해 버리고 말았다.

조그만 일에도 으르렁대면서 서로 월궁옥녀와 가까이 지내려 온갖 수를 썼다. 이때 그녀는 내기가 진행 중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두 사형 모두에게 친절하게 굴었다. 이것을 자신에 대한 애정으로 착각한 둘은 점점 외골수가 되어갔다. 그러는 사이 둘의 의술은 경지를 더해갔다. 북의는 탕약을 남의는 침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파고들었다.

이러한 모습을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곤륜신의는 짐짓 둘 사이의 경쟁심을 점점 더 부추겼다. 이렇게 함으로서 자신이 오르지 못한 경지에 제자들이 오르기를 바랬던 것이다. 다시 말해 청출어람 했으나 청어람 하기를 염원한 것이다.

그러는 사이 세월이 흘렀고 곤륜신의는 몹쓸 병에 걸리게 되었다. 그것이 웬만한 의술로는 도저히 치유시킬 수 없는 고질이라는 판단이 선 그는 제자들을 불렀다.

그리고는 자신의 몸을 내어 줄 터이니 치료를 해 보라 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을 치유시키는 제자가 월궁옥녀를 얻을 것이라 하였다.

먼저 곤륜신의를 진맥한 사람은 북의 목재충이었다. 진맥 결과 사부의 병은 편풍(偏風)이었다. 편풍이란 마비로 인하여 한쪽 팔과 다리를 쓰지 못하고, 입과 눈이 비뚤어진 것이다.

이것은 속명탕(續命湯) 같은 탕약이 좋기는 하나 그것만으로는 완치시킬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그의 안색은 좋지 못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먼저 치료를 하기로 하였으므로 온 정성을 다하여 탕약을 다렸다. 하지만 예상대로 약간의 차도만 보였을 뿐이다.

한편 뒤에서 기다리던 호문경은 내심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편풍을 다스림에 있어 먼저 탕약을 쓰고 후에 침구(鍼灸: 침술과 뜸)를 하면 능히 완치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반년이 넘도록 별다른 차도가 없자 북의는 손을 들었다. 기다리고 있던 남의는 불과 한 달만에 사부를 완치시켰다. 이는 그에게 뛰어난 침술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그 근원은 북의가 처방한 탕약 덕분이었다.

사제의 치료가 진행되는 동안 북의는 내기에 진다는 것을 직감하고 술로서 세월을 보냈다. 사매를 죽도록 사랑하건만 맺어질 수 없다는 괴로움 때문에 절망한 그는 날이면 날마다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마셨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괴로워서 미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병석을 털고 일어난 곤륜신의는 고주망태가 되어 쓰러져 잠들어 있는 북의를 서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사실 편풍이 고질이기는 하나 그의 능력이라면 스스로를 치유시킬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제자들을 시험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서로 월궁옥녀를 얻기 위하여 애를 쓰는 동안 그녀의 마음은 남의에게 기울어져 갔다.

당시 그녀의 나이 열여덟이었다. 그 나이의 여인들이 그러하듯 이마가 훌렁 벗겨져 오십은 족히 되어 보이는 대사형보다는 준수한 외모와 서글서글한 성품을 지닌 작은 사형이 더 좋아 보였던 것이다.

그러던 중 남의로부터 자신을 걸고 내기가 진행중이라는 것을 알아낸 그녀는 부친을 끈질기게 졸랐다. 그녀는 대사형이 내기에서 이긴다면 목을 매달겠다고도 하였고, 남의에게 이미 청백을 내어줬다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니 반드시 남의가 이길 수 있는 문제를 내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고심하던 곤륜신의는 결국 탕약으로는 다스리기 힘든 편풍을 문제로 낸 것이다. 제자도 중요하지만 여식의 행복이 더 중요하다 판단한 것이다.

북의는 사제와 사매가 천지신명에게 부부가 되었음을 고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심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런 그에게 다가간 곤륜신의는 아무런 말도 없이 한 권의 서책을 건넸다.

그것이 바로 편작내경(扁鵲內經)이었다. 그동안 구술(口述)로만 전수해줄 뿐 단 한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의서(醫書)였다.

곤륜신의가 이것을 전해 준 것은 자신의 그릇된 처사로 인하여 제자가 심적인 고통을 느끼는데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친족이 아니면 절대 전수해 주지 말라는 조상들의 명을 어기고 그것을 건넨 것이다.

한편 그것을 받아든 북의는 사매의 행복을 위해 떠나달라는 뜻으로 오인하였다. 하여 모두가 잠든 새벽에 곤륜산을 내려와 강호에 발을 디뎌놓은 것이다. 이때가 바로 남의와 월궁옥녀가 처음으로 합환(合歡)을 하던 때였다.

이후 강호로 나온 목재충은 혁혁한 의명(醫名)을 떨쳤다. 그가 북의라는 외호로 불리면서 천하인들의 흠모 속에 천의장을 건립할 즈음 강남에 또 하나의 신의가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을 수 있었다.

남의(南醫)라 불린 그는 제아무리 고질이라 할지라도 침 몇 방이면 언제 아팠느냐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나게 만든다 하였다. 목재충은 그가 사제인 호문경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당금 천하에서 그만한 침술을 지닌 사람은 그뿐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단 한번도 그를 찾은 적이 없었다. 그를 만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의는 달랐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북의를 만나기 위하여 여러 번 장강을 건넜다.

한편 목재충은 이런 소문이 들릴 때마다 약초를 캐겠다며 심산유곡으로 들어갔다. 사랑하는 여인을 앗아간 그와 대면(對面)하는 것조차 싫었던 것이다.

이후 세인들의 존경을 받던 북의는 참한 규수를 만나 혼례를 올렸고 단란한 가정을 꾸몄다. 그러던 중 오른 손목을 잘리고, 멸문지화를 당한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안내 말씀]

앞 부분을 보지 못하신 분은 이 글 바로 아래에 있는 <제갈천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를 클릭하십시오. 전체 리스트를 보실 수 있습니다.

메인 화면에서 기사검색을 클릭하시고 기자명에 "제갈천"을 입력하셔도 전체 리스트를 보실 수 있습니다.

"<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는 문화면 좌측 중간쯤에 있는 연재실 목록에서도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오늘도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덧붙이는 글 [안내 말씀]

앞 부분을 보지 못하신 분은 이 글 바로 아래에 있는 <제갈천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를 클릭하십시오. 전체 리스트를 보실 수 있습니다.

메인 화면에서 기사검색을 클릭하시고 기자명에 "제갈천"을 입력하셔도 전체 리스트를 보실 수 있습니다.

"<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는 문화면 좌측 중간쯤에 있는 연재실 목록에서도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오늘도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땅 파보니 20여년 전 묻은 돼지들이... 주민들 경악 땅 파보니 20여년 전 묻은 돼지들이... 주민들 경악
  2. 2 재취업 유리하다는 자격증, 제가 도전해 따봤습니다 재취업 유리하다는 자격증, 제가 도전해 따봤습니다
  3. 3 윤 대통령 10%대 추락...여당 지지자들, 손 놨다 윤 대통령 10%대 추락...여당 지지자들, 손 놨다
  4. 4 '기밀수사'에 썼다더니... 한심한 검찰 '기밀수사'에 썼다더니... 한심한 검찰
  5. 5 보수 언론인도 우려한 윤석열 정부의 '위험한 도박' 보수 언론인도 우려한 윤석열 정부의 '위험한 도박'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