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행렬은 산해관을 지나면서부터 경계심이 늦춰지게 될 것이다. 이때부터는 황무지의 연속이 아니라 제법 잘 닦인 관도로 이동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고, 관병들의 힘이 미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기회를 노려 급습을 한다면 성과가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하여 비적들은 양민들처럼 의복을 갈아입고 미리 산해관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급습하기 가장 알맞은 장소를 찾았다. 그 결과 방금 이회옥이 지난 곳을 택했다.
이곳은 오르막길이다. 그리고 급격하게 길이 꺾이는 곳이기에 앞에서 공격을 당하더라도 뒤에서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는 곳이다. 게다가 좌우에 펼쳐진 울창한 숲은 공격을 마친 후 도주로로 사용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이곳에서 은신하고 있다가 척후가 오면 그를 제압하려 하였다. 척후가 되돌아오지 않으면 앞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 판단한 사신행렬은 방심한 채 다가올 것이다. 이때를 노려 급습하면 목적한 바를 쉽게 이룰 것이라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척후가 부상당한 채 왔던 길로 되돌아갔으니 행렬은 잔뜩 긴장한 채 다가올 것이다. 이제 막대한 인명 피해를 각오하지 않는 한 섣불리 공격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래서 투덜거린 것이다.
"두목 어떻게 하지?"
"임마, 뭘 어떻게 해? 놈들의 실력을 모르는데… 일단 이곳에서 지켜보기로 한다. 봐서 아니다 싶으면 후퇴한다."
"그럼 포기하는 거야?"
"미친 놈! 왜 포기하냐? 아직 기회는 많아. 놈들이 황도에 당도하려면 아직 멀었다. 그 안에 또 기회를 만들면 된다."
말을 마친 두목을 따라 비적들은 일제히 숲 속으로 사라졌다.
"이 보게. 정신 차리게."
"으으으! 으으으…! 아, 아버지! 아버지…? 허억! 누구세요?"
이회옥은 꿈결처럼 들리는 부친의 음성에 눈을 떴다가 화들짝 놀라며 일어났다. 낯선 사람이 내려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하하하! 이제야 정신을 차렸는가? 여긴 안전한 곳이니 마음놓아도 되네."
"……!"
무슨 영문인지를 알 수 없던 이회옥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은 사십 정도로 보였는데 얼굴 가득히 미소가 어려 있었다.
"어, 아저씨는…? 아까 본 조선의…?"
"하하! 그렇다네. 사신 행렬을 따르는 무관(武官)이네. 조관걸(趙寬傑)이라 하네. 헌데 자네의 성명은…?"
"저, 저는 이회옥이라고 해요."
"이회옥…?"
조관걸은 이회옥이라는 이름을 듣고는 잠시 말을 잇지 않았다. 이것을 자신이 제대로 알아들었느냐는 것으로 받아들인 이회옥은 얼른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예! 이회옥 맞아요."
"이회옥이라고…? 하하! 반갑네. 그나저나 어찌된 일인가? 멀쩡하게 가더니 갑자기 이런 꼴로 돌아와 몹시 놀랐네."
"이런 꼴이요? 무슨 꼴…? 아앗!"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이회옥은 무심결에 머리를 더듬다가 나직한 비명을 터뜨렸다.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던 것이다.
"이런, 아직 만지면 안 되네."
"으윽! 아파요. 헌데, 제 머리가 왜 이렇죠?"
"허어! 머리가 그 지경이 되었는데도 몰랐는가? 자넨 혼절한 채 되돌아 왔네. 하마터면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네. 어디에 세게 부딪친 듯한데 이마가 아니라 뒤통수인 것이 조금 이상하네. 말에서 떨어진 것도 아닌 듯한데… 어찌 된 영문인가?"
"……!"
이회옥은 무슨 영문인지를 생각해 내려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산해관을 통과한 이후 오랜 여독(旅毒)을 떨치기 위하여 휴식을 취했던 사신 행렬이 다시 출발한 것은 조금 전이었다.
떠나기 직전, 이조참판 정현서(鄭賢瑞)는 지금까지는 척후를 미리 보내 전방의 상황을 살피느라 시간을 많이 지체하였으나 더 이상 시간이 없으므로 척후 없이 출발하라 하였다.
행렬의 호위를 책임 진 무관(武官)들의 우두머리인 조관걸은 반대하였지만 상단에서 시간이 더 지체되면 약령시가 끝난 후에나 당도한다면서 빨리 가자고 성화를 했다.
상단은 사신 행렬에 적지 않은 지원을 하였기에 제아무리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세도가인 이조참판이라 할지라도 거절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하여 처음으로 척후 없이 출발하였다.
행렬이 막 길을 출발하였을 무렵 한 필의 말이 다가왔다. 조선에서는 본적이 없는 상당히 덩치가 크면서도 잘 빠진 말이었다. 말에 대해서 문외한이 보더라도 명마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원래는 행렬 중간에 아무도 끼어 들 수 없도록 하여야 한다. 하지만 이곳은 조선이 아닌 중원이다. 따라서 상대의 신분을 정확히 모르는 이상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일이다.
타고 있는 말로 보아 절대 범상치 않은 신분인 듯하였다. 게다가 마상(馬上)에는 무장(武裝)하지 않은 소년이 타고 있을 뿐이었다. 하여 말이 먼저 지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런데 잠시 후 선혈이 낭자한 채 혼절한 소년을 태운 말이 맹렬한 속도로 되돌아오자 행렬에는 작은 동요가 생겼다. 워낙 드센 기세로 달려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호위무사 가운데 하나가 신기에 가까운 솜씨로 말을 세우는 모습을 보며 감탄하였기 때문이었다.
비룡 때문에 행렬이 흐트러지고, 놀라운 솜씨에 탄성을 지르는 것은 잠시였다. 말을 타고 가다 전면을 제대로 살피지 않았을 경우 나뭇가지 같은 데 부딪쳐 혼절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상처는 이마이기 쉽다. 그런데 소년의 상처는 뒤통수에 있었다. 이런 상처는 말에서 떨어질 경우에 생기는 상처이다.
상처의 정도로 보아 말에서 떨어졌던 소년이 다시 말 위로 올랐다고는 볼 수 없었다. 따라서 누군가에 의한 암습을 당한 것으로 판단되었기에 행렬은 즉각 멈췄고 삼엄한 경계망이 펼쳐졌다.
어찌 된 영문인지를 살피기 위하여 행렬을 따르던 내의원 의관이 즉각 나서서 치료를 하였다. 하여 뒤통수의 상처에서 흐르던 선혈은 곧 멈췄다. 그리고 잠시 후 이회옥이 깨어난 것이다.
"어찌 된 영문인지 기억이 나는가?"
"자세히는 몰라요. 그냥 가는데 갑자기 뒤통수가 아팠어요."
"흠! 그래? 이 앞에는 무엇이 있는가?"
"이 앞에요? 앞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저잣거리가 있는데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흠! 이상하지 않은가? 아무것도 없는데 자네의 뒤통수에는 적지 않은 상처가 생겼네. 그렇다면 이 부근에 비적이나 마적들이 자주 출몰하는가?"
"비적이나 마적이요? 여긴 산해관 안쪽이라 없을 텐데…"
이회옥은 조관걸이라는 장한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비적이나 마적은 인적이 뜸한 곳에 있기 마련이다.
이곳처럼 관(官)의 힘이 직접적으로 미치는 곳에 있다가는 언제 토벌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곳엔 강력한 힘을 지닌 무천장이 있다.
정의수호대원들이 수시로 돌아다니는데 미치지 않고야 어찌 산해관 안쪽에 발을 들여놓겠는가! 그들에게 걸리기만 하면 뼈도 못 추릴 것이다.
"흠! 그렇다면 누군가와 원한이 있는가? 그렇지 않고야 어찌 아무것도 없다는 곳에서 이런 상처를 입었겠는가? 안 그런가?"
"그, 그거야…!"
이회옥은 잠시 할말을 잃었다. 태어난 이후 원한을 맺은 사람은 결단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공격을 당했다. 그렇다면 품속에 있는 은자를 노렸거나, 비룡을 노렸다는 이야기이다.
자신의 행동이 즉흥적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누군가가 은신한 채 지나는 행인을 노렸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비적이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잘 모르겠어요. 제가 지나가는데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았어요. 그리고는 혼절한 것 같아요."
"흐음! 알았네. 앞에 누군가가 있는 모양이네."
"……!"
말을 마친 조관걸은 뒤에 있던 장한들에게 무엇인가를 지시하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자네는 이제 그만 가도 좋으네. 아직 상처가 완전하게 나은 것이 아니니 조심하게. 알았는가?"
"고맙습니다. 아저씨!"
이회옥은 왠지 조관걸의 말에서 정을 느낄 수 있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진심으로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 주는 듯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하! 그런데 소형제. 혹시 자네의 말을 팔 생각은 없는가? 대단한 명마로 보이던데. 값은 후하게 쳐줌세."
"예? 비, 비룡을 팔라고요…?"
느닷없는 제안에 이회옥은 말끝을 흐렸다. 전에는 비룡을 팔려고 하였지만 최근에는 그런 생각조차 품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하! 아닐세. 괜히 한번 해본 말이네."
"고, 고맙습니다. 이 은혜 반드시…"
"하하! 은혜는 무슨… 내게도 자네 만한 여식이 있네. 그러니 그런 소릴랑 말게. 알겠는가?"
"그래도…"
"하하! 그럼 나중에 또 봄세. 자, 이만 가자!"
"예!"
조관걸의 말에 행렬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홀로 남겨진 이회옥은 사라지는 사신 행렬을 머릿속에 각인시키고 있었다.
작고한 부친인 이정기는 틈날 때면 늘 하던 이야기가 있었다. 만일 남에게 쌀 한 톨의 은혜를 입거든 반드시 한 말로 갚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것이야말로 사람의 도리라고 하였다. 물론 이것은 물질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이야기함으로 해서 누구에게 어떤 은혜를 입던 반드시 갚으라는 의미였고, 은혜도 모르는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사람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이정기가 태극목장의 제일목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것이 저변에 깔려 있기 때문이었다.
오갈 데 없는 고아인 자신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딸까지 내어 준 장인을 위해서라면 뼈가 부서져도 좋다는 일념에 정말 열심히 일을 한 결과였다. 그렇기에 이회옥은 사라지는 조선 사신 행렬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잠시 후 행렬은 삼엄한 호위 속에서 구비를 돌아갔다. 이회옥은 갑자기 홀로 남겨졌다는 느낌에 맥이 탁 풀렸다.
"휴우…! 또 혼자가 되었군. 용아, 오늘 당근 사려던 것은 천상 취소해야겠구나. 자, 이만 가자."
히힝! 히히히히히힝―!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였다는 듯 비룡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회옥은 터덜터덜 걸어서 청룡무관으로 돌아갔다.
덧붙이는 글 | [안내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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