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는 동네 아이들 불꽃잔치, 대보름 불깡통 돌리기

정월대보름 불깡통 돌리던 풍경을 떠올려 보라!

등록 2003.02.08 21:45수정 2003.02.09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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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은 정월 초하루부터 시작하여 정월 대보름까지를 말한다. 그러니 ‘설날’은 음력 정월 초하루 만을 지칭하는 게 맞다. 중국은 '춘절(春節)’이라고 하여 근 보름간을 설 명절로 보낸다. 이게 그들만의 풍속이라고 생각하면 사실을 크게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 설 풍습도 불과 20년 전까지만 거슬러 올라가도 중국의 민족 대 이동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정월 초하루부터 정월 대보름까지를 설이라 하고 갖가지 농사와 관련된 민속놀이로 기나긴 축제를 벌였다. 하지만 요즘 같이 바쁜 시절에 설을 이렇게 보냈다가는 사회적 지탄을 자초하고 낙오병 취급 받기에 사람들은 차 막히는 걸 피해 설날 아침 서둘러 고향을 도망치다시피 한다.

심하게 말하면 정월초하루인 설날은 설의 시작에 불과한 날이다. 이날부터 색동옷을 차려 입고 친지를 찾아 세배를 하고 쥐불놀이와 달집 태우기, 논두렁불대기, 연날리기, 윷놀이, 널뛰기 등 전통놀이를 매일 같이 즐겼다. 놀이에 음주 가무가 빠질 수 없었으니 춘궁기에 어려운 시절을 보내더라도 이 때 만큼은 풍족하고 마음 씀씀이도 너그러웠다. 이 기간 중에 ‘머슴날’도 끼어 있었던 걸 보면 농사가 시작되기 전인 이 때가 한껏 여유를 부릴 알맞은 시기였다.

아이들은 설을 쇠고 또 한번 자신들 위주로 펼쳐질 축제를 벌이기 위해 즐거운 준비를 시작한다. 먼저, D-day를 정월 대보름 전날인 열 나흗날로 잡고 만반의 준비를 개시한다. 평소 나무하러 다닐 때 하나하나 봐뒀던 나무 끄렁(그루터기가 썩은 껏) 중 소나무를 유심히 봐뒀다가 관솔을 ‘굳혀 놓아야’만(하나하나 모아 나간다는 뜻) 안심이다. 따로 관솔을 하러 나가는 것 보다 나무 하러 가서 지게에 한두 개 얹어 오면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하루하루 날이 다가오면 일을 다 마쳐놓고 해질녘에 산을 헤매기도 했다. 눈 밭에 빠지기도 하고 혹은 눈 녹은 수렁에 빠지기도 하면서 앙상하게 뼈다귀처럼 남은 나무 뿌리를 괭이든, 낫이든 가능한 모든 도구를 활용하여 뿌리째 뽑는다. 더러는 자신의 힘만 믿고 잡아당기다 쏙 하고 덜렁 올라오는 바람에 엉덩이가 나무 끄렁에 똥침 맞기 일쑤였다.

관솔은 나무를 벤지 3년 이상 지난 소나무 밭에 가야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행운이다. 해마다 동네아이들이 쓸고 다니면서 족족 캐와 버리기도 하거니와 소나무 밑둥을 잘랐다고 해서 다 관솔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대개 툭 한 번 차면 허무하게 부슬부슬 넘어가는 경우는 관솔이 생성돼있지 않다.


나무가 살았을 때 직경이 20cm는 되고 벤 뒤 다소 길게 그루터기를 남겨야 윗 부분에서 흘러내려간 송진이 부분 노출된 뿌리부분에 엉겨 붙어 껍질에 가까운 변재 부분은 썩어 문들어져 말라 비틀어지고, 땅속에 뭍힌 내부 심재 부분 실(實)한 것만 남아서 단단한 송진뼈다귀가 만들어진다. 진한 갈색을 띤 소나무 등걸이 곧 ‘관솔’이다.

이 관솔을 캐면서 이리저리 비틀다 보면 대단한 향을 느낄 수 있다. 머리가 지끈할 지경으로 향이 진하다. 산 속에서 맡았을 때는 석유 냄새와 별로 다르지 않다. 단단하기도 이를 데 없어 낫으로 잘라도 날이 들어가지 않고 툭툭 튄다. 도끼로도 옆으로는 들어가지 않는다. 잘게 나누려면 도끼로 비스듬하게 조금씩 떼어 낸다고 생각하며 공략해야 한다. 손가락 굵기나 닭 다리 뼈 정도 크기로 잘라 마루 밑에서 하루쯤 두면 된다.


관솔이 한 망태 이상 준비되면 녹슬지 않게 창고에 걸어뒀던 깡통 하나를 꺼낸다. 못 하나, 망치, 철사 줄 3~4m도 필수품이다. 깡통 안에 들어갈 만한 나무를 한 개 마련하여 끼워두고 못으로 불 구멍을 빙빙 둘러가며 곳곳에 뚫는다. 안에 나무를 대야만 못으로 구멍을 뚫어도 깡통이 찌그러지지 않고 원형에 가깝게 유지된다. 마지막으로 깡통 바닥을 조금 얼기설기 뚫고 양쪽에 철사를 두 줄로 접어 자신의 팔 길이보다 약간 길게 늘이면 ‘불깡통’도 준비되었다.

아직 찰밥이 쪄질 시간이 덜 되었으므로 있던 밥 한 그릇 대충 먹고 서둘러 집을 나선다. “저녁밥 묵게 얼릉 오거라와~” 하시는 어머니 말씀을 뒤로 하고 망태나 비료 푸대자루에 담아 둔 관솔을 들춰 메고 들로 나간다.

오후 2시 밖에 안되었는데 벌써 한 두 군데 논두렁에 불을 지르는 동무들이 있다. 건너 마을에서도 연기가 피어 오른다. 급한 김에 논두렁도 아닌 보리밭을 가로질러 뛰어갔다. 로터리쳐서 너른 두룩을 만든 보리밭은 그래도 넘어지는 경우가 덜했지만, 소 쟁기로 한 줄 씩 연이어 갈았던 보리밭은 겨우내 땡땡 얼어붙어 한 번 넘어지면 무릎이 사망 직전 고통으로 다가와도 신이 나서 높은 둔덕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논두렁에 불을 붙이니 “타닥, 톡!” 하며 애벌레와 알집이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두어 시간 놀았을까, 차차 날이 어두워지자 불깡통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불놀이 판이 열렸다. 한 학년에 예닐곱은 되었기 때문에 연배가 비슷한 서너 학년 모으면 20여 명은 족히 되었다. 불이 모이기 시작했다. 타닥타닥 소리도 없이 진한 그을음만 잔뜩 남기고 바람과 불이 마찰하는 “슁슁” “씽씽” 소리만 귓전을 때린다. 간혹 불통이 설에 형이 사온 새 옷에 떨어져 불총을 내놓고 만다. 어떤 아이는 너무 ‘뽀짝’ 다가와 위험스럽게도 한다.

아랫 송단마을은 불꽃 숫자로 보아 열 대엿 명쯤 돼보이고, 건너 강례마을은 열 너덧 쯤 출전을 한 듯 하다. 숫자로는 이미 우리 양지마을이 앞서 있다.

같은 시각 고학년과 중학생 형들은 대밭에 가서 생 대를 베어 마을 어귀로 끌고 나왔다. 저녁 6시를 넘겨 대나무에 불을 붙이니 마을이 환해졌다. 생대나무인데도 한 번 불이 붙자 기세 좋게 불꽃을 내며 잘도 탄다. 대나무가 타며 내는 소리는 고요한 온 마을을 불꽃 놀이 때 처럼 요란하다. 이날 마을 근처에는 짐승들이 접근 할 수도 없다. 쥐와 새도 둥지에 숨기 바쁘다.

“타닥, 탁!”
“톡!”
“틱!”
“팅!”
“톽!”
"쫙!"

소리가 제 멋대로다. 남도 사람 아니면 이 소리를 기억하기도 힘들거니와 상상하기도 어렵다. 생대나무가 줄기가 콧물을 질질 흘리며 타들어 가고 댓잎이 또르르 말리며 힘없이 주저앉아 재로 바뀌는 광경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8시 쯤에 이르러서는 다른 마을로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 형들로 원정대를 짜서 마을대항 대불싸움을 즐겼다. 인도의 한 지역에서 돌멩이를 던지며 하루 내내 박 터지게 싸워 이기는 쪽에 풍년이 든다는 것처럼 우리네 풍습도 이와 비슷해 이기기 위한 싸움은 격렬했다. 대와 나무로 길게 작대기를 만들어 한밤에 휘둘러 대기도 하고 으름장을 놓기도 하는 데 썼다. 내 기억으로 우리마을은 한 번도 진적이 없었다.

승전보가 울려오고 싸움이 끝나면 잉걸만 남은 불깡통을 하늘 높이 날려 불꽃놀이의 대미를 장식했다. 이윽고 자발적으로 싸움에 참가한 30명이 넘는 마을 대표 악동들은 대불을 피웠던 곳으로 몰려들었다. 그날 성과와 노획물을 보고하고 평가하며 배를 채우기 위해서다.

두 형은 미리 몰래 찰밥을 시루째 훔쳐와서는 불 옆에서 함께 나눠 먹도록 배려했지만 그 다음 일은 나도 모른다.

몇 년 지나자 아이들이 게을러지면서 관솔 대신 고무신, 장화 등 고무를 대신 쓰기 시작하더니 그 아름답던 풍경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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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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