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으음! 여긴 아무것도 없으니 마냥 이러고 있을 수는 없지. 한번 내려가 보자. 가면 무슨 수가 나겠지. 아래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면 어쩌면 생각보다 상황이 좋을지도 몰라."
"……!"
비접나한과 이회옥은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 없이 냉혈살마의 뒤를 따랐다. 완만한 경사를 이룬 갱도는 끝이 없는 듯하였다.
대략 십여 장에 하나씩 작은 횃불이 밝혀져 있기에 사물을 식별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지옥거를 타고 오는 동안 어둠에 익숙해져 있는 상황이었기에 별 불편함은 없었다.
천천히 갱도를 따라 내려가는 동안 냉혈살마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그런 그의 손은 연신 갱도의 벽을 더듬고 있었다. 갱도의 벽은 암반이되 보통 단단한 것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 단단한지 알아보기 위하여 시험삼아 곡괭이 질을 할 때마다 불꽃이 튀는 것으로 미루어 아주 단단한 철광석으로 이루어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으으음! 이러니 아무도 탈출을 못했지. 으으으음!"
냉혈살마는 연신 침음성을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입구를 철판으로 막아 놓은 것도 예상치 못하였지만 갱도의 벽면이 이토록 단단한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깊은 밤을 틈 타 갱도 입구를 통하여 도주하거나, 최악의 경우 암굴(暗窟)을 뚫고 도주할 생각을 품었었다. 그러려면 어둠을 뚫고 사물을 식별할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내공을 모두 잃어 그럴 수 없었기에 이회옥에게 운기심법을 전수해 준 것이다.
입구에서 곡괭이를 주자 잠시 눈빛을 반짝이기도 하였었다. 예상보다 훨씬 쉽게 도주할 수 있으리라는 상념이 스치고 지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이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곡괭이로 암굴을 뚫는다는 것은 웬만한 공을 들여서는 불가능해 보였다. 차라리 손가락으로 철판을 뚫는 노력을 하는 편이 났다 생각될 정도로 단단한 암반이었던 것이다.
이 순간 이회옥 일행이 전혀 모르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이 갱도를 뚫는데 천여 명의 죄수가 꼬박 이십 년 동안 밤낮으로 곡괭이 질을 하였다는 것이다. 말이 천여 명이고, 말이 십 년이지 엄청난 공력을 요구하는 대 역사나 마찬가지였다.
이 굴을 뚫는 동안 오백여 죄수들이 세상을 떠났다. 고된 작업과 굶주림, 그리고 혹독한 매질 덕분이었다. 닿아서 없어진 곡괭이의 수효만 해도 만여 자루가 넘었다.
아무튼 갱도는 그렇다 치더라도 입구는 옥졸들이 지키고 있는데다가 두꺼운 철판으로 막아 놓았으니 현재로서는 탈출할 방도가 전혀 없는 셈이다. 하여 냉혈살마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진 것이다.
이곳 지옥갱에는 가급적 짧게 머물고 싶었으나 어쩌면 오래 있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자 그의 눈빛은 절망감마저 내비치고 지났다.
"형님! 우리가 여길 탈출할 수 있을까요?"
"탈출? 아암! 탈출할 수 있고말고…"
"……!"
일행 가운데 가장 연장자이며 정신적인 지주였던 냉혈살마의 음성은 왠지 자신이 없었다. 그것을 느낀 둘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말 없이 그의 뒤를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
"저, 형님! 자, 잠깐만요. 이제 더 이상 내려가지 맙시다. 밑에 어떤 작가들이 있는지도 모르는데…"
비접나한의 음성은 겁 때문인지 떨리고 있었다.
"그럼 여기서 굶을 죽을래? 일단은 죽던 살던 내려가야 해. 그리고 우리가 온 것을 밑에서 알고 있을지도 몰라. 만일 늦게 내려갔다가 그것을 트집 잡으면…"
"아, 알았어요. 내려갈게요."
비접나한은 여전히 겁먹은 듯한 음성이었다. 한편, 말 없이 뒤따르던 이회옥은 쓰라린 이마를 슬쩍 더듬고 있었다. 비접나한과 냉혈살마의 이마처럼 자신의 이마에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숫자가 새겨졌다 생각하니 억울하면서도 분했다.
자자형(刺字刑)은 극악무도한 죄인이나 대역죄를 범한 죄수들에게만 시행하는 형벌이다. 그래서 관에서도 전후사정을 면밀히 따져본 후 죄가 확실하다 판단될 때에만 시행하는 것이다.
말 도둑의 경우에는 아무리 많이 훔쳐도 자자형에 처해지지 않는다. 단순한 절도범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마에 숫자가 새겨졌으니 원통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이곳은 무림지옥갱이라는 곳이다. 세상에서 온갖 흉악한 짓을 저지른 자들을 가둬두는 곳이다. 한번 들어가면 죽어서야 나올 수 있다는 곳이기에 더 없이 억울하였다.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태극목장을 그 지경으로 만든 자들에게 복수를 해야하는데 이곳에 갇혀 있으면 불가능하다. 하여 이회옥의 눈에서는 남몰래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흐흑! 아버지, 어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태극목장의 식솔들을 비명횡사케 한 흉수를 찾아 원수를 갚아야 하는데… 원수를 갚아야 하는데… 못난 소자 이곳에 갇혀… 흐흐흑! 아버지!'
갱도 아래에서는 퀘퀘한 냄새를 동반한 후덥지근한 공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 * *
"아씨…!"
보타암에 머물 것을 명하는 추수옥녀 여옥혜의 표정이 경직되어 있다는 것을 느낀 왕구명은 그럴 수 없다고 하고 싶으나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왕 시위. 아버님께는 전서구(傳書鳩)로 소식을 전할 터이니 이곳에 머물며 본녀를 호위하도록 하세요."
"으음! 알겠습니다!"
왕구명은 한쪽 무릎을 땅에 대는 군례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무천장은 상명하복(上命下服)이 철저한 곳이다. 만일 상전의 명을 거역하면 최고 참수형에 처해지게 된다.
이곳으로 오기 전, 장주인 사면호협이 말하길 혹시 불편한 점이 없나 살펴 그런 것이 있다면 어떻게든 해결해 주라 하였다.
그러면서 추수옥녀의 명은 자신의 명과 같으니 추호의 어긋남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며 어떠한 명이라도 받들겠다는 다짐까지 하게 하였다. 따라서 현재 여옥혜는 장주인 사면호협과 마찬가지이다. 그렇기에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군례를 올린 것이다.
'젠장! 이럴 줄 알았다면 그 녀석을 데리고 올 것을… 혼자 잘 지내고 있을까? 남겨두고 온 것이 마음에 걸리는구나.'
왕구명은 이회옥을 떠올릴 때마다 왠지 불안했다. 청룡무관에서 무공을 익히고 있다면 불안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매달 급료를 지불 받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둔 바 있으니 먹고사는데도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 까닭 모를 불안감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어제는 밤새도록 악몽에 시달렸다. 청룡무관에 화재가 발생하여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되는 꿈을 꾼 것이다. 그래서 얼른 돌아가고 싶은데 못 가게 되니 마음이 편치 못한 것이다.
한편 추수옥녀는 안색이 어두워진 왕구명을 보면서 내심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른 전각에는 호위무사가 있는데 산해각에만 없다면서 머물라고 하였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백만근 천애화의 협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로 하여금 보타암에 머물도록 한 것이다.
그녀는 백만근이 어떤 의도로 왕구명을 호위무사로 남겨두도록 하라 하였는지 짐작이 갔다. 이곳에 온 이후 다른 전각의 호위무사들과 노골적으로 놀아나는 것을 여러 번 목도하였기 때문이었다.
처음 그것을 본 날 추수옥녀는 밤새도록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청백지신(淸白之身)인 그녀에게 있어 그것은 일대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이곳에 온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추수옥녀는 백만근이 머무는 금릉각 부근을 지나치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월동창 사이로 그녀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백만근이 워낙 거친 숨소리를 내고 있었기에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 그녀는 벌거벗고 있었다. 게다가 어디가 심하게 아픈 사람처럼 신음을 내기 시작하였다. 하여 놀란 눈으로 안쪽을 살펴보았다.
사람이 아파서 신음을 내는데 어찌 모르는 척하겠는가! 그렇기에 자세히 안을 살피던 추수옥녀는 아미를 찌푸렸다. 별로 아름답지 않은 백만근의 나신 때문이었다.
살찐 돼지도 그런 돼지가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투실투실하면서도 거대한 둔부와 유방이 출렁이는 모습은 같은 여자로서도 별로 보기에 좋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아래에는 웬 사내가 깔려 있었다. 물론 그 역시 벌거벗고 있었으나 다행히도 백만근의 살에 가려져 머리만 보일 뿐이었다.
처음엔 깔고 앉아 목을 조르는 줄 알았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그게 아니었다. 하여 놀란 눈으로 바라보던 추수옥녀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둘의 표정으로 미루어 아파서 신음 소리를 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너무도 징그럽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황급히 자신의 처소로 향하던 추수옥녀는 다른 여인들 몇이 소곤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호위무사의 주인인 여인이 투덜대는 소리였다.
그러던 중 백만근과 호위무사가 하던 일이 바로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事)인 운우지락(雲雨之樂)을 나누는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날밤 잠 못 이룬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알리는 말씀]
풍자무협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달고도 풍자는 없다는 어떤 독자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하여 앞으로 연재될 부분 중 일부를 미리 발췌하여 보았습니다.
풍자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뒷부분이 이러하니 지금은 재미없더라도 꾹 참고 읽어 달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이것을 보시려면 메인화면 좌측 아래쪽에 있는 "<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항목을 클릭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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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말씀드리지만 제 글에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과 문파명 등은 실제로 존재하였거나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이나 단체, 국가 등과 전혀 무관합니다.
참, 앞에서부터 천천히 읽고 계시는 중이시지요?
이제부터 등장인물들이 많아지기 시작합니다. 앞 부분을 안 보시면 뭐가 뭔지 알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천천히 앞 부분부터 읽어 주십시오.
제갈천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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