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옥녀는 심한 혐오감을 느꼈다. 하지만 항의할 수는 없었다. 백만근의 강한 무공 때문이기도 하지만 먹고살려면 그녀와 반목(反目)해서는 안 된다는 소리를 들은 바 있기 때문이었다.
따지고 보면 백만근이 피해를 준 것은 없었다. 자신이 몰래 들여다보았기 때문이다. 하여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날 이후 추수옥녀는 절대로 금릉각 주변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혹시 볼 일이 있어 그 앞을 지나야 할 경우라도 반드시 돌아서 갔다. 다시는 그런 꼴을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자연 추수옥녀의 표정은 싸늘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얻은 외호가 얼음귀신이라는 의미를 지닌 빙귀(氷鬼)였다. 이곳에서 빙귀는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거나 친목을 도모하지 않으려 하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그래서 외톨이였다.
그러던 차에 오늘 아침 백만근의 방문을 받았다. 그것은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녀는 이곳 보타암에서 무공을 연마하는 여인들 가운데에는 가장 연장자였다. 게다가 가장 강한 무공의 소유자였다. 따라서 누군가에게 용무가 있으면 늘 금릉각으로 불러들였다.
지금껏 그녀가 직접 다른 전각을 방문한 것은 전혀 없었다. 그것은 계산된 행동이기도 하였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기 마련이다.
아쉬운 것이 없는데 찾아갈 이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함으로서 자연스럽게 이곳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만일 그녀의 요구를 거절하면 그날부터 고난의 연속일 것이다. 모든 음식을 스스로 해결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런 그녀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자신의 처소를 찾았다는 것에 무슨 일인가 싶었던 추수옥녀는 어이없는 요구에 한동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부친의 서찰을 들고 온 왕구명을 산해각 호위무사로 임명하라는 것이었던 것이다.
이에 추수옥녀는 호위무사는 필요 없다고 하였다. 이곳이 얼마나 안전한 곳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는 육지에서 한참 떨어진 절해고도(絶海孤島)이다. 따라서 오랜 시간 동안 험한 파도를 헤쳐야 올 수 있는 곳이다. 게다가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이던가!
무림천자성이 천하를 완벽하게 장악할 수 있도록 천하 각지에 설치한 무천장 장주의 여식들이 정의수호대원이 되기 위하여 불철주야(不撤晝夜) 무공을 연마하는 곳이다.
아직 관문을 돌파한 것은 아니지만 모두들 적지 않은 화후에 올라 있다. 그렇기에 호위무사의 존재가 전혀 필요 없다.
그런데도 왕구명을 호위무사로 임명하라 강권(强勸)하자 추수옥녀는 백만근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왜 남의 전각에 와서 밤 놔라, 대추 놔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섬전처럼 뇌리를 스치는 상념이 있었다.
얼마 전 오랜만에 차를 마시려 다루(茶樓)에 나간 적이 있었다. 그때 다른 탁자에 있던 여인들이 소곤대는 소리가 있었다.
"어휴! 미쳐, 내가 정말 미쳐!"
"어머! 왜?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너, 우리 호위무사 중에 제법 우락부락하게 생긴 장팔(張八)이라는 놈 알지?"
"응! 알지. 얼굴에 흉터 있고, 제법 힘 좀 쓰게 생긴 놈!"
"그래. 글쎄 그놈이 어젯밤에 쌍 코피를 터뜨리며 들어왔어."
"어머! 왜? 누구랑 싸웠대?"
"아냐! 누구랑 싸워서 그렇게 되었다면 말이나 안 하지. 그놈 더러 저잣거리에 나가서 뭐 좀 사오라고 시켰어.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잖아. 하여 단단히 벼르고 있었지."
"어떻게 하려고?"
"흥!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들어오기만 하면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놓으려고 그랬지. 그런데 오밤중에 쌍 코피를 질질 흘리면서 흐느적거리며 돌아오더라고…"
"에이, 왜 그랬냐니까?"
"글쎄 백만근한테 끌려갔었대."
"뭐? 백만근? 왜? 어머! 그, 그럼…!"
"그래. 백만근한테 끌려가서 동정을 잃고 왔댄다. 글쎄!"
"호호! 난 또… 너, 아직 몰랐니? 백만근은 서생들은 싫어해. 대신 우락부락한 호위무사들만 좋아하지. 이 섬의 호위무사들 가운데 제법 괜찮은 것들은 이미…"
두 여인의 소곤대는 소리를 듣던 추수옥녀는 차를 마실 기분이 싹 달아났다. 너무도 혐오스런 소리였기 때문이었다.
'흥! 후안무치(厚顔無恥)한 계집 같으니! 에이, 더러워!'
더러워진 기분을 떨치기 위하여 그날 추수옥녀는 무려 세 시진 동안이나 혼신을 기울여 검을 휘둘렀다. 덕분에 울창하던 수풀 하나가 완전히 초토화되어 버렸다.
아무튼 백만근의 의도를 깨달은 추수옥녀는 호위무사가 필요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였다. 그러면서도 몹시 불쾌하였다. 같은 여인이지만 어쩌면 이토록 노골적으로 색을 밝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여 모르는 척하며 여러 번 거절하였지만 만일 자신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앞으로는 직접 농사지어야 할 것이라는 소리를 하고 사라지는 백만근의 뒷모습을 보면서 잠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에 온 이유가 무엇이던가! 부친이 계속하여 무천장 장주로 머물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여 이곳에 도착한 이후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오로지 무공 연마에만 박차를 가하였다. 하루라도 빨리 관문을 돌파하기 위함이다.
남들은 오 년이 걸리지만 삼 년 후에 관문에 도전할 생각이었다. 만일 실패한다면 일 년을 더 수련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오 년 동안 정의수호대원으로서 활동하면 모든 의무는 끝난다.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스물두 살이나 스물세 살이 되어야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대부분의 처녀들이 열일곱만 넘으면 혼례를 치르니 혼기를 넘겨도 한참 넘긴 나이가 된다.
아직 어린 나이이지만 여옥혜는 평생 홀로 늙어갈 생각이 없었다. 반드시 혼례를 올려야한다는 의무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친은 사대(四代) 독자이다. 그리고 자식이라곤 자신 밖에 없다. 따라서 대가 끊긴 셈이다. 그렇기에 여옥혜는 반드시 혼례를 올리되 데릴사위와 혼례를 올릴 생각이었다.
하여 그와의 사이에서 사내자식을 보면 여(呂)씨 성을 주어 대를 잇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독한 마음을 품고 무공 연마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찾아 온 왕구명 때문에 심란해진 것이다.
한참을 고심하던 그녀는 결국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임무를 마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면 세상의 어떤 사내도 자신을 거들떠보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지금껏 고생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그렇기에 왕구명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를 호위무사에 임명한 것이다.
물론 백만근의 노골적인 접근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왕구명을 잡아먹는 것은 아니기에 생명을 잃거나 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계산도 저변에 깔려 있었다.
그녀가 왕구명에게서 더 이상의 흥미를 느끼지 못할 때 그때 보내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되면 아무런 마찰 없이 지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첫 번째 관문 도전에 실패한다 하더라도 앞으로 사 년 이상은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돌아가면 피해에 대한 보상을 충분히 해주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여긴 안전한 곳이에요. 그러니 특별한 위험을 없을 터이니 크게 마음쓰지 않아도 될 거예요. 특별히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무엇을 하던 마음대로 해도 좋아요. 단, 본녀의 무공 수련을 방해해서는 안 되요. 아셨죠?"
"알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나가보세요."
"알겠습니다. 아씨!"
밖으로 나온 왕구명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금방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던 기대가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었기 때문이다.
'으음! 아씨의 말대로 여긴 안전하기 그지없는 곳이다. 아씨의 성품상 멋으로 호위무사를 임명하지는 않았을 터. 대체 무슨 영문으로 날 여기에 붙잡아 둔 거지? 으으음!'
한동안 골똘히 생각하던 왕구명은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흐음! 그러고 보니 방이 한 칸 뿐이군. 그럼 우선은 내가 머물 방이라도 만들어야 하는데… 으음! 어디 보자. 목재를 구해야 하는데… 흠! 저기가 좋겠군. 좋아, 오랜만에 힘 좀 써 볼까?"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제법 울창한 송림을 본 왕구명은 상의를 벗어제친 후 한쪽 구석에 있던 도끼를 들고 그곳으로 향하였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하루에 적어도 한 시진 동안은 열심히 무공 수련을 하였기에 왕구명의 상체는 잘 발달되어 있었다.
영웅건(英雄巾)으로 머리카락을 질끈 동여매고 도끼를 든 그의 모습은 임풍옥수라고 하기엔 다소 부족한 감이 있지만 어쨌든 늠름하게 보이긴 하였다.
그런 그의 모습을 담장에 뚫린 구멍을 통하여 은밀히 감상하며 침을 삼키는 여인이 있었다. 천하의 색녀인 백만근 천애화가 그녀였다.
'꿀꺽! 예상대로 정말 멋진 사내군. 역시 난 사내 보는 눈이 있어. 호호! 앞으로 며칠은 봐줄게. 아직 여독(旅毒)도 안 풀렸지? 호호! 그나저나 얼음귀신 같던 계집이 말을 안 들으면 어떻게 하나 했는데 잘 되었군. 호호! 하긴 여기서 살아가려면 우리 금릉각을 무시하면 안 되지. 아암, 그렇고 말고!'
백만근은 당장이라도 왕구명을 덮치고 싶었으나 지금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하필이면 오늘 달거리를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맛이 있는 음식은 천천히 음미하면서 먹어야 제 맛을 알 수 있다는 것을 그간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을 전혀 모르는 왕구명은 연신 도끼질을 하고 있었다. 허공으로 솟았던 도끼가 낙락장송의 밑동에 박힐 때마다 솔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때마다 왕구명의 근육은 물결치듯 꿈틀거리고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무공 연마를 한 덕에 그의 신체에는 군살이라곤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보통 나무꾼이 적어도 백여 번 이상 도끼질을 해야 간신히 쓰러트릴 낙락장송이 불과 이십여 번의 도끼질만에 맥없이 쓰러졌다.
어디를 어떤 각도로 내리쳐야 되는지를 훤히 꿰고 있기 때문이었다. 능숙한 솜씨로 잔가지를 친 왕구명은 콧노래를 부르면서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몇 년 전, 청룡무관에 큰 화재가 있었다. 드넓은 연무장을 땀방울로 흠뻑 젖게 하던 제자들 모두가 무천장 호위무사로 간 직후였다. 그래서 왕구명의 부친은 홧병으로 병석에 누워 있었다. 따라서 복구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고 복구를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제자들이 머무는 숙소가 불에 탔기 때문에 새로운 제자들을 받아들이려면 반드시 복구해 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완전 복구를 하려면 많은 분량의 목재가 필요했는데 그것을 사려면 적지 않은 은자가 필요했다. 하지만 제자도 없는데 은자를 물쓰듯할 수는 없었다.
언제 새로운 제자들이 입문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부친의 병구완을 하느라 적지 않은 은자를 소모하였기에 그럴만한 여력도 없을 때였다. 그때 목재를 조달한 사람은 다름 아닌 왕구명이었다.
혼자서 수백여 그루에 달하는 낙락장송을 쓰러트리고 다듬어 좋은 목재로 탈바꿈 시켰던 것이다. 덕분에 청룡무관은 제 모습을 찾았다. 그래서인지 왕구명의 손길은 무척이나 능숙하였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보던 백만근 천애화는 아랫도리를 비비틀면서 연신 비음을 토해냈다.
'어머! 어머! 저 근육 좀 봐! 어머! 저 근육. 난, 미쳐… 호호! 이제 며칠만 있으면… 호호호호! 며칠만 기다려.'
천애화는 연신 희열에 찬 교소를 터뜨리며 슬그머니 물러섰다.
덧붙이는 글 | [알리는 말씀]
풍자무협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달고도 풍자는 없다는 어떤 독자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하여 앞으로 연재될 부분 중 일부를 미리 발췌하여 보았습니다.
풍자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뒷부분이 이러하니 지금은 재미없더라도 꾹 참고 읽어 달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이것을 보시려면 메인화면 좌측 아래쪽에 있는 "<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항목을 클릭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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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말씀드리지만 제 글에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과 문파명 등은 실제로 존재하였거나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이나 단체, 국가 등과 전혀 무관합니다.
참, 앞에서부터 천천히 읽고 계시는 중이시지요?
이제부터 등장인물들이 많아지기 시작합니다. 앞 부분을 안 보시면 뭐가 뭔지 알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천천히 앞 부분부터 읽어 주십시오.
제갈천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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