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맛있는 쑥국 끓여주께"

<내 추억 속의 그 이름 55> 보리밭 메기

등록 2003.02.27 11:20수정 2003.02.27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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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제일 먼저 보리밭으로 찾아온다
봄은 제일 먼저 보리밭으로 찾아온다창원시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저녁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박화목 작시, 윤용하 작곡)


지금 우리 농촌에서는 보리농사를 잘 짓지 않는다. 여기 저기 여행을 다니면서 봄이 오는 들판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파아란 보리싹이 이랑마다 가지런히 솟아있는 그런 들판을 만나기가 그리 쉽지 않다. 대부분의 들판에는 지난 가을에 추수를 하고 남겨진 벼밑둥만 가지런하게 줄을 서 있을 뿐이다.

아싸~ 저게 보리밭이 아닌가, 싶어 가까이 다가가 보면 그건 보리싹이 아니라 벼밑둥을 따라 가지런하게 솟아나고 있는 새파란 잡초들이다. 그래서 요즈음 봄 들판을 바라보면 웬지 배가 고프다. 봄이 되어도 들판은 여전히 짚빛 얼굴을 감싸안은 채 겨울잠을 쿨쿨 자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나 자란 우리 마을에는 모두 이모작을 했다. 논뿐만 아니라 산비탈의 다랑이 밭에도 보리와 밀 등을 심었다. 노는 땅이 하나도 없었다. 겨우내 새끼를 꼬고, 누우런 볏짚으로 가마니나 덕석을 만드시는 부모님의 부지런한 손놀림처럼 논과 밭 또한 놀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간혹 이모작을 하지 않는 논들도 있긴 있었다. 그러나 그런 논들은 늘 물이 질퍽하게 나는 무논이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농사를 직접 짓지는 않았지만 봄이 되면 무논과 일반 논을 금새 구분할 수가 있었다. 무논은 앞산가새에 아지랑이가 어지럽게 피어오르고 연분홍빛 진달래가 피어도 마치 버려진 뺑덕이네 집처럼 새파란 풀들만 무성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해마다 2월이 오면 우리 마을 아이들은 학교를 마친 뒤 신작로 변에 있는 보리밭을 메러 가야만 했다. 특히 춘계방학이 있는 2월 하순에는 온 들판이 보리밭을 메는 마을 사람들과 아이들로 득실거렸다. 언뜻 보면 초록빛으로 물드는 들판에서 때 이른 모내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봐라! 지난 겨울에 보리를 매매(잘) 밟아놓았으니까 보리가 알라(아기) 엉덩이맨치로 통실통실하게 살이 쪄 있다 아이가"
"보리는 만다꼬(왜) 밟아주야 잘 커는 깁니꺼?"
"척 보모 모르것나. 겨울이 되모 보리밭이 얼어가꼬 흙이 뒤집어 진다 아이가. 그라모 마악 뿌리를 내린 보리가 우째 되것노? 같이 뒤집어 질 꺼 아이가. 그렇제?"
"아~ 그래서 보리로 밟아주야 되는 기구나. 그라모 사실은 보리로 밟는 기 아니고 흙을 밟는 기나 마찬가지네예?"
"하모. 그라이 보리를 밟을 때 너무 세기(세게) 밟지 말라 안 카더나."


우리 마을의 봄은 제일 먼저 보리밭으로 찾아왔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마을을 꼬불거리며 흐르는 냇가의 얼음이 녹아 내리기 시작하면 마을 사람들이 제일 먼저 찾아가는 곳이 보리밭이었다. 또 이맘 때가 되면 마을 어머니들과 가시나들은 누구나 부엌칼을 담은 소쿠리를 들고 들에 나가 쑥과 달래를 캐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우리 마을에서는 보리밭 메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또 해마다 이맘 때 보리밭을 메주지 않으면 잡풀이 보리보다 더 웃자라 그해 보리농사를 망치기 때문이었다. 보리밭은 주로 마을 어머니들과 아이들이 멨다. 하지만 마을 아버지들은 삽이나 곡괭이로 이랑을 새롭게 일으켜 세우고, 흙을 한 뭉텅이 달고 뽑히는 벼밑둥의 흙을 털거나 단단하게 뭉쳐진 흙덩이를 깼다.

보리밭을 메기 위해서는 호미가 필요하다. 끝이 뾰쪽한 호미는 보리 틈새 교묘하게 숨어 있는 잡초를 뿌리채 뽑고 보리밭을 메기에 아주 편리했다. 하지만 끝이 다 닳아 뭉텅해진 호미는 보리밭 메기에는 조금 불편했다. 그래서 그런 호미는 주로 보리밭 이랑을 고르거나 흙덩이를 깨는데 사용했다.

"야가~ 야가요. 벌시로 잔꾀가 살살 나오나? 숫제 보리만 다 뽑고 있는 거로 보이."
"잡초가 보리 속에 도둑놈처럼 숨어 있어서 그란다 아입니꺼. 그렇찮아도 뽑힌 보리는 다시 숭굴(심을) 낍니더."
"허리 아푸제? 쪼매만 참고 열심히 메거라. 저녁에 맛있는 쑥국 끓여주께."
"쑥국예? 진짜지예?"
"하모. 누구메(네 엄마)가 오데 거짓말 하는 거 봤나?"

마을 들판을 전봇대 그림자처럼 일직선으로 갈라놓은 신작로... 그 신작로를 등뼈로 삼아 마치 갈빗대처럼 나란히 펼쳐진 들판... 그 들판에서 제법 시퍼런 줄기까지 언뜻언뜻 내보이며 쑥처럼 쑥쑥 자라나는 보리... 그리고 그 보리밭에서 매화꽃처럼 환하게 피어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보리밭은 메도 메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철로가에서는 봉림산과 비음산을 마구 휘어감는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저만치 앞서서 보리밭을 메고 있는 어머니의 수건에서도, 저만치 논둑을 새롭게 고치고 있는 아버지의 보릿대 모자에서도 아지랑이가 마치 지렁이처럼 꼬물꼬물 피어올랐다.

"저어기~ 좀 보거라. 상남역에 푯대가 내맀는가 우쨌는고."
"좀 전에 푯대가 철컥카고 내맀는데예?"
"그래. 그라모 오늘은 이 고랑만 다 메고 너거들은 먼저 집에 가거라. 누구메는 쑥하고 냉이 좀 캐 가꺼마."

그랬다. 쌀보다 보리가 더 많이 섞인 점심을 배불리 먹고 보리밭을 메러가면 늘 오후 1시에 상남역에서 진해로 출발하는 기차가 연기를 푹푹 내뿜으며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산쪽 하늘로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 으레 오후 5시 기차가 빠아앙 소리를 내며 마산쪽으로 철커덕 철커덕 달렸다.

우리 마을의 들판 중간에는 마산과 진해를 오가는 철로가 놓여 있었다. 그 철로 중간에 마산과 진해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는 상남역이 있었다. 그리고 그 상남역에 서 있는 푯대가 내리면 곧 기차가 들어오고 있다는 신호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기차가 몇 번 지나갔느냐에 따라 정확한 시간을 짚어냈다.

당시에는 시계가 귀했다. 상남역에 서 있는 빨간 줄이 그어져 있는 그 푯대가 우리 마을 사람들의 유일한 시계였다. 물론 그 푯대가 아니라 하더라도 시간은 대충 짐작할 수는 있었다. 장복산으로 내려앉는 해를 보고도, 우리들 배가 꼬르륵 거리는 소리를 들어도 시간은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상남역에 서 있는 그 푯대는 시간을 보다 정확하게 알려 주었다.

"허리가 많이 아푸제?"
"지는 괘않심니더. 옴마는 예?"
"나는 밤새도록 보리밭을 메도 괘않타"

보리밭은 메도 메도 끝이 없었다. 또한 우리들은 주로 엎드려서 보리밭을 맸다. 그러다 보니 허리가 몹시 아팠다. 하지만 마을 어머니들은 대부분 쪼그리고 앉아서 보리밭을 맸다. 그래서 우리들도 마을 어머니들처럼 쪼그리고 앉아서 보리밭을 메 보기도 했다. 하지만 순식간에 다리가 저려오기 시작했다.

"아나! 퍼뜩 받아라. 뜨거버 죽겄다"
"그기 뭐꼬?"
"우리 옴마가 쑥국 끼맀다꼬(끓였다고) 너거 집에 갖다 주라 카더라"
"고맙다. 그라고 니 새끼 손가락 좀 펴봐라"
"와?"
"내가 니한테 줄 끼 있다 아이가"
"뭔데?"
"이거"
"이기 뭐꼬? 구리 반지 아이가?"
"......퍼뜩 가라. 배 고푸것다"

그날 단발머리를 한 그 가시나가 내게 준 것은 노오란 구리 반지였다. 그런데 그 가시나의 새끼 손가락에도 내게 준 것과 꼭같은 구리 반지가 저녁노을에 반짝 하고 빛나고 있었다. 어스름이 지는 붉으스럼한 하늘에서는 철새떼들이 한무더기 북녘하늘로 날아가고 있었다. 구리반지와 철새떼를 번갈아 바라보던 나는 그날따라 몹시 어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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