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다가와요

<내 추억 속의 그 이름 54> 막내딸의 시와 편지

등록 2003.02.24 16:55수정 2003.02.24 21:38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막내딸 빛나의 시

막내딸 빛나의 시 ⓒ 이종찬

봄이 다가와요
매서운 바람도 추위도
모두 모두 가버리고
향긋한 꽃들이 많이 피지요
따뜻한 바람이 불지요
봄이 다가와요
이젠 옷 걱정 추위 걱정
할 필요 없어요
봄이 다가오니까요


(이빛나 "봄이 다가와요" 모두)

"아빠!"
"왜?"
"그냥"
"아빠아~"
"왜에에~"
"그냥"

오늘은 둘째 딸 빛나의 열두 번째 생일이다. 아침에 눈을 비비자마자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빛나가 또다시 장난질을 시작한다. 일요일인 어제 내내 아주 다급한 듯이 나를 불러놓고는 슬며시 "그냥" 이라며 말꼬리를 빼며 깔깔거리더니 제 생일인 오늘 아침부터 또 장난질을 시작한다.

어젯밤 내내 온 방을 축구공처럼 이리저리 뒹굴며 내 잠을 설치게 한 빛나. 나는 새벽녘에 깜빡 잠이 들었다. 근데 하도 답답해서 부시시 눈을 떠보니 요녀석의 발이 내 얼굴 위에 척 걸쳐져 있었다. 하지만 요녀석은 세상 모른 채 쿨쿨 자고 있었다. 하여간 요녀석의 잠버릇은 못말릴 노릇이다.

"요녀석! 니 몸이 축구공이냐?"
"왜에?"
"밤새도록 온 방을 바퀴벌레 잡듯이 구르고 다녔잖아"
"내가 언제?"


씨익 웃는 얼굴에 장난기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근데 저렇게 철없는 녀석이 쓴 시를 읽어보면 그래도 대견스럽기만 하다. 제법 "시화" 라고 분류까지 해놓고 쓴 봄에 관한 시를 읽어보면 재미 있다. 특히 "옷 걱정 추위 걱정/할 필요가 없" 다는 부분에서는 제법 어른스럽기까지 하다.

영 철없는 녀석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어찌 보면 나 역시 그동안 막내딸을 늘 어린 아이 취급만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봄이 다가와요" 란 시는 그동안 빛나의 교실 벽에 붙어 있었던 시란다. 근데 이제 새 학년에 올라간다며 담임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모두 돌려준 것이란다.


나는 빛나가 학교에서 가지고 온 여러 가지 과제물들 중에서 또 하나 놀랄 만한 것을 발견했다. 그건 다름 아닌 지난 해 유월에 빛나가 쓴 '부모님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들' 이란 편지였다. 그런데 왜 이 편지를 지금에서야 읽게 되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도 당시 학교에서 수업 중에 쓴 편지인 것 같았다.

"부모님 안녕하세요? 저 빛나예요. 요즘 하고 싶은 것이 무척 많아지고 있어요. 내가 어제 책 사러 갔을 때, 옷들이 너무 이뻤어요. 그리고 꼭 사주란 말은 아니에요. 엄마가 이때까지 매일 이쁜 옷도 많이 사주셨잖아요. 너무 고마운 일이에요.

a 빛나의 편지

빛나의 편지 ⓒ 이종찬

그리고 아빠! 아빠는 왜 존댓말을 쓰면 하지 말라고 해요? 네? 그냥 왜 평소대로 하라고 해요? 네? 전 그게 궁금했어요. 그리고 엄마는 존댓말 쓰면 좋아하는데 왜 아빠는 싫어하죠? 그리고 아빠! 나 아빠가 그래도 난 할래요. 왜냐하면 존댓말 쓰면 내 기분이 좋거든요.

그리고 부모님. 저 제가 꼭 사고 싶은 책이 있어요. 그리고 옷하고 신발... 제가 어제만 해도 내가 꼭 갖고 싶은 물건들을 어제 우연히 보았거든요. 그리고 저 언니랑 절대 안싸울게요, 어젯밤에 아빠께서 싸우지 말라 하고, 그런 의미에서 목표까지 써 주셨잖아요.

그런데 부모님. 저 00학원 끊으면 안될까요? 어차피 다니면 뭐해요? 어차피 학교에서 배웠던 걸 다 배우잖아요. 그러니까 저 학원 딱 한군데만 끊을께요. 네? 엄마, 아빠. 저 00학원은 꼭 끊고 싶었어요. 피아노는 안 배우니까 피아노는 열심히 배울게요.

제발 끊게 해 주세요. 네? 전 00학원만은 꼭 끊고 싶어요. 엄마... 학원회비도 만만치 않잖아요? 전 그럼 이만 줄일게요.

2002년 6월 14일 금요일

-빛나 올림-"


나는 빛나의 편지를 다 읽고 나서 몹시 놀랐다. 한편으로는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무엇보다도 학원에 그만 다니려는 이유에 대해 나름대로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대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4학년이라고 해서 나는 빛나를 아주 어린애 취급했다. 그동안 아이들의 속내를 너무나 모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또한 나는 푸름이와 빛나에게 아버지, 어머니란 말을 쓰지 말고 그냥 평소대로 아빠, 엄마라고 부르라고 했다. 왜냐하면 조그마한 녀석들이 그렇게 부르는 걸 듣고 있으려니까 사실 좀 징그러웠다. 하지만 학교에서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르라고 가르쳤던 모양이었다.

그렇다. 아이들은 어른의 아버지라고 누가 말했던가. 아이들은 겉으로만 바라보면 그저 천진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그 속내는 다른 것 같았다. 어찌보면 아이들도 우리 어른들 이상으로 주어진 어떤 일에 대해 정확하게 궤뚫고 있는 것 같았다.

학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곳이 학원이다. 그렇다고 보내지 않을 수도 없다. 왜냐하면 한때 누군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즈음에는 학교에 가면 선생님이 어떤 문제에 대해 잘 가르쳐 주지 않는다고. 학원에서 다 배웠지 하면서 그냥 대충대충 넘어가고 나머지는 모두 아이들에게 숙제를 내 준다고.

하지만 아이들의 교육을 무조건 어른의 잣대에만 맞추어서는 안된다. 아이들의 마음을 충분히 파악한 뒤에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한다. 무조건 따라가는 식의 그런 교육은 더 이상 안된다. 막내딸 빛나의 말처럼 학교에서 다 배우는 것이고, 학원비도 그리 만만치는 않다.

"빛나야! 너 학원 다니지 않고도 학교수업 따라갈 수 있겠니?"
"응"
"그래, 알았다"
"아싸! 아빠 진짜지? 00학원은 안가도 되지?"
"그래"
"아싸! 아싸아싸!"

빛나의 생일로 인해 오랫만에 우리 가족 네 명 모두가 한 상에 마주 앉았다. 고봉으로 생일밥을 받은 빛나의 눈빛은 오늘따라 더욱 생기가 돌았다. 빛나의 생일상에서 빛나가 쓴 시처럼 봄이 다가오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동안 찰밥을 싫어하던 푸름이도 찰밥 한그릇을 거뜬하게 비우고 이제는 한술 더 떠 더 달라고 했다.

"아빠!"
"에이~ 이젠 안 속아!"
"그게 아니라니깐. 아빠아~"
"왜?"
"그냥"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2. 2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3. 3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4. 4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5. 5 쿠데타 막다 옥살이, 63년 만에 무죄 받아든 아들의 한탄 쿠데타 막다 옥살이, 63년 만에 무죄 받아든 아들의 한탄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