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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과 출산율의 저하
"많이 낳아 고생 말고 적게 낳아 잘 키우자”던 60년대 구호가 70년대에 들어서“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로 바뀌더니 80년대 들어“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이라고 바뀌었다.
가임 여성 한 명이 출산할 수 있는 아이의 수도 한국전쟁을 치르고 난 50년대 5.4명에서 1970년 4.5명, 1983년 2.1명으로 급격한 감소를 보이다가 2001년에는 1.3명이다. OECD 국가 가운데 하위권을 기록하고 있는 실정이다.
상식적으로 두 사람이 결혼했으니 2명은 낳아야 현상 유지를 하는 것이므로 인구가 줄지도 않고 늘지도 않아 적정한 선에서 인구정체가 유지되려면 최소 2.1명은 되어야 한다.
30년 만에 인구의 급격한 감소를 염려하는 소리가 많다. 부랴부랴 정부에선 출산장려 대책을 마련하고 있고 여성계 등 사회단체에서는 복지대책 강구를 촉구하고 있다.
마침 새 정부에서는 육아비의 절반을 지급한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를 낳아도 돈도 돈이지만 양육 조건과 사회 시스템의 미비로 얼마나 실효를 거둘지 지켜볼 일이다.
이장집에 가면 콘돔이 있다
산아 제한이 한창이던 70년 대 중반 우리 동네 이장님 댁에는 콘돔이 쌓여있었다. 콘돔을 가져가라는 마을 방송도 한 달에 한 번은 들려왔다. 정부 이야기도 잊지 않았고 포스터에 나온 구호도 설명을 해줬다.
당시 깬 신혼 부부는 반상회 때 한 통씩을 받아갔지만 30대 후반부터 40대 중반까지의 아버지나 삼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하나라도 더 낳아야 된다는 욕심이 팽배했던 시절 콘돔이라는 것은 방해자일 뿐이었다. 최소 대여섯 명은 되어 줄줄이 달고 다녔지만 여기서 멈출 수 없는 집착을 보이던 때.
몰래 받아와도 남편이 허락할 리 없다. 그러니 받아 온들 소용이 없다. 아이들이 볼라 옷장 깊은 곳에 꼭꼭 숨겨둬야 한다. 다시 한 번 남편에게 그 얘기를 꺼냈다가는 정말 쫓겨날 판이었다. 후처를 들여서라도 아이와 아들을 낳겠다는 시절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을 콘돔'이란 말인가?
큰 아이와 막내가 아버지와 자식 뻘이 될 지경으로 터울이 벌어지면 필시 큰 아이들의 눈치를 보아가며 아이를 생산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과 한 방을 쓰면서도 거침없이 순풍순풍 우리들을 낳았다.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 집요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신비롭다. 전기가 없던 시절이었으니 밤에 잠만 자는 것이 아니었나 보다. 하여튼 지금 생각해도 존경스럽다.
고통스러웠던 어머니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심했다가 5년 만에 늦둥이를 가진 바람에 죽을 고비까지 넘겼던 서른 아홉 되시던 72년 어머니. 그 해 막내 딸을 얻으신 내 어머니도 예외가 아니었다. 콘돔을 사용하지 않았던 어른들은 어머니가 마흔 다섯을 넘긴 상태에서도 애 떼러 간 사실을 쉬쉬했다.
어머니 당신께서는 1년에 한 번, 어떤 해는 두 번까지 아버지 몰래 병원이 있던 읍내로 평일을 골라 나갔다 오신다. 이런 날 빼고 한 번도 대낮에 누워 계신 적이 없던 당신은 막내아들인 내가 "엄마, 어디 아푸요?" 하고 물으면, "절대 니 아부지한테 말하면 안된다와~" 어머니께서 병원에 갔다왔다는 것을 말씀하시지 않았지만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그걸 미리 알고 "예, 알았어라우~"하며 안심시키고 끝까지 비밀을 지켜드렸다.(어머니는 마흔 아홉에 일찍 세상을 뜨시는 바람에 약속을 지키는 셈이 되었다. 아직 살아계신다면 우스갯소리로 한 번 여쭤볼 테다. 대체 몇이나 떼었는가요?)
새벽같이 출발하여 점심 때쯤 돌아오신 뒤로 서너 시간을 누워 계셨다. 아버지께 들킬까 봐 내색도 못하고 미역국도 끓여 먹을 수 없다.
세째로 누나를 낳으셨다고 미역국도 끓여주지 않으셨던 아버지의 아내였던 어머니. 내 눈에 비친 어머니는 정말이지 출산의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해 옴짝달싹 못하는 '고양이 앞에 쥐' 신세였다. 초췌한 그 힘없던 모습이 아른거린다.
70년대 콘돔은 아이들의 놀이개였다
요즘처럼 형형색색에 향긋한 젤까지 발라지고 쾌감을 늘려주는 울퉁불퉁하고 신축성이 뛰어난 기능성 콘돔은 아니었다. 음식 만들 때나 작업시에나 손가락에 낄 법한 도톰한 것, 상해서 누리끼리한 우윳빛을 띤 고무였다.
이 콘돔이 시골 아이들에게 들어온 첫 놀이기구였다. 콘돔을 서너 봉지 들고 나온 이장집 아들 '병주'라는 친구는 우리에서 다섯 개씩 나눠주었다. 7명의 아이는 요 신기한 것을 손으로 만져보기도 하고 쫙 늘여도 본다.
성에 차지 않자 풍선을 분다. 누가 더 큰 풍선을 만드는가 내기를 해도 반투명으로 바뀔 뿐 속이 들여다보이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얼마나 질긴지 절대 터지는 법이 없었다. 잘 보인 아이는 덤으로 얻기도 했으니 놀이에 있어서 병주는 절대 강자였다.
간혹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새색시가 영문도 모르고 건전한 놀이를 즐겼던 우리 옆을 쏜살같이 지나치면 그제서야 '어젯밤에 뭔가 수상한 짓을 했구만…'하며 우리끼리 키득거렸다.
돼지 오줌보로 축구를 즐겼던 우리는 고작해야 1년에 두어 번 밖에 구경할 수 없었으니 당연 대용품을 찾기에 급급했다. 콘돔이 무용지물에 불과한 어른들과 달리 쓰임새를 찾은 우리는 고무 안에 물을 가득 채우고 발로 차며 동네를 싸돌아다녔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하니리포터, 조인스닷컴, 뉴스비젼21에도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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