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꽃 필 무렵

<내 추억 속의 그 이름 56> 딸들의 봄

등록 2003.03.03 17:23수정 2003.03.03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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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봄은 매화 꽃망울 속에 숨어 있나 보다

봄은 매화 꽃망울 속에 숨어 있나 보다 ⓒ 우리꽃 자생화

"이보슈~ 학생! 사진 찍는 거는 좋은데 꽃가지는 꺾으모 안돼요오?"
"아, 예"
"다음 주에 오모 꽃이 활짝 피가(피어서) 무릉도원이 따로 없을 낀데... 아직 사진 찍기는 좀 이르거마는"
"그래도 꽃망울이 몽올몽올 할 때가 더 이쁘지 않습니까?"
"그래도 꽃은 활짝 피어야 제격이지"


비음산 아래 올망졸망 붙어 있는 과수원은 온통 매화꽃이 잔치를 벌이는 듯 하얗게 피어나고 있었다. 그 과수원 주인 말마따나 매화꽃이 만개를 하려면 일주일 정도 더 있어야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가지마다 하얀 눈망울을 동글동글 맺고 있는 매화나무를 바라보면 다가오는 봄이 모조리 매화나무 가지에 붙들려 꽃망울로 매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군데군데 짚더미가 덮힌 다랑이 밭에서는 파아란 배추가 마른 옷자락을 땅에 끌며 고개를 내민다. 향긋한 봄내음이 묻어나는 미나리꽝에서는 미나리를 베는 아낙네들의 손길이 바쁘기만 하다. 간혹 피어나는 매화꽃을 시샘이라도 하는 듯 제법 쌀쌀한 바람이 둘째 딸 빛나의 머리칼을 헝클며 제법 짖궂게 불고 있다.

여기 저기 밭둑에서는 60대 남짓한 할머니들의 손끝에서 파아란 쑥과 날씬한 몸매의 냉이가 연이어 예쁜 몸매를 드러내고 있다. 할머니를 따라 나온 대여섯 살 남짓한 꼬마들도 제 딴에는 쑥을 캔다고 밭둑을 마구 헤집고 있다. 하지만 꼬마들의 손에 들려져 나오는 것은 쑥이 아니라 검불뿐이다.

"아빠! 저것도 좀 찍어"
"저게 뭔데?"
"까치집 말이야"
"까치집은 왜?"
"그냥"

a 몽올몽올 맺힌 매화나무 가지를 바라보면 동그란 그 꽃몽오리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

몽올몽올 맺힌 매화나무 가지를 바라보면 동그란 그 꽃몽오리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 ⓒ 우리꽃 자생화

하여튼 둘째 딸 빛나의 눈에는 모든 것이 다 신기하게만 보이는 모양이었다. 어떤 대상이 조금만 색다르게 보인다 싶으면 나더러 무조건 사진을 찍으라고 했다. 사진 찍는 실력이 별로 없는 내게 마치 사진 찍는 법을 교육이라도 시키려는 듯이.


"아빠! 나는 계속 사 학년에 있었으면 좋겠어"
"왜?"
"오 학년이 되면 체육시간에 앞구르기를 해야 한대"
"앞구르기를 하는 게 뭐가 어렵냐?"
"이불을 펴놓고 아무리 연습해도 자꾸 옆으로만 넘어진단 말이야"
"그으래. 그러면 나중에 저녁 먹고 아빠랑 연습을 해보자. 그리고 아빠가 어렸을 적엔 앞구르기라 하지 않고 '복살넘기' 라고 했어"
"복살?"
"그래. 아빠도 잘은 모르겠지만 '복살넘기'란 말은 아마도 뱃살넘기기란 그런 말이 아닌가 생각해. 앞구르기를 할 때 뱃살이 뒤집어지잖아?"
"킥킥킥"

3월 3일이면 큰 딸 푸름이는 초등학교 최고 학년인 6학년이 되고, 둘째 딸 빛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 된다. 하지만 푸름이는 불평이 대단하다. 그 이유는 5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이 제 반이 되지 않았다는 거였다. 게다가 지난 초겨울에 새로 부임한 교장선생님에 대한 불평도 자주 늘어놓는다.


"푸름이는 왜 또 신경질이야?"
"아~ 정민이하고 정화하고는 같은 반인데 나만 쏘옥 빠졌단 말이야"
"괜찮아. 새로운 친구들을 더 많이 사귀는 것이 좋잖아?"
"그건 그렇다치고, 교장선생님 때문에 정말 짜증 나"
"교장 선생님이 왜?"
"교장 선생님 이마가 너무나 빤질빤질해서 조회 때마다 눈이 부셔서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단 말이야"

큰딸 푸름이의 불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지난 주에 작은 딸 빛나의 시가 오마이뉴스에 실린 것을 보고 "체, 그것도 시라고" 하면서 비웃는다. 그리고 제 딴에는 학생기자라고 제법 논리 정연한 시평까지 서슴치 않는다. 하지만 빛나는 그러면 언니도 나처럼 실려 봐, 라는 투로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

"봄이 다가와요, 가 뭐야? 시 첫 줄에 봄이 다가와요, 라고 썼으면 제목을 봄, 이라고 하든지"
"그건 언니 생각이지. 언니나 그렇게 써"
"글짓기에 나가서 상도 한 번밖에 못 탄 주제에 무슨 말이 그리도 많아"
"체~ 노래도 못 부르는 주제에"
"너 지난 번 몇 점 먹었어?"
"빵점 먹었다 왜?"

하여튼 말꼬리를 한번 물고 늘어지기 시작하면 딸 둘의 싸움은 끝이 없다. 하지만 늘 빛나가 먼저 꼬리를 슬그머니 내린다. 학교는 한 학년 차이가 나지만 실제로는 제보다 두 살이나 많은 푸름이의 제법 논리 정연한 말솜씨에 당할 수가 없다. 그때가 되면 이내 빛나는 내게 슬쩍 말을 던지며 위기에서 탈출한다.

"아빠! 우리 지난 번에 갔던 그곳에 가자"
"너 정말 빵점 먹었어?"
"......"
"그러면 가다가 빵떡을 많이 사줘야겠네"
"왜에에?"
"빵점을 먹었으니까 빵떡을 입에 물고 있어야지"

a 매화, 봄의 전령사

매화, 봄의 전령사 ⓒ 우리꽃 자생화

오랜만의 이틀 연휴. 작은 딸 빛나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내가 산보를 간다고 하면 혹시 가까운 산에라도 오를까 봐 지레 겁을 낸 푸름이는 아예 춥다는 핑계를 대며 컴퓨터 앞으로 슬그머니 다가앉는다.

"아빠랑 꽃보고 사진 찍고 올 테니까 언니는 컴퓨터나 실컷 하고 있어"
"그래, 너 잘났다"
"그만. 너희들은 말만 꺼내면 다투냐?"
"아빠! 빛나 쟤 땜에 미치겠어. 쟤가 저러고도 오 학년이래"
"아빠! 언니 땜에 정말 미치겠어. 언니가 저러고도 최고 학년이래"
"가자!"
"아빠! 만약에 꽃이 피었으면 꽃 한송이만 꺾어 와"
"아빠! 꽃을 꺾으면 안 되지이?"

이쯤 되면 정말 못 말릴 노릇이다. 하지만 딸들의 다투는 목소리에서도 이미 새 학년에 올라간다는 설레임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딸들의 마음 속에도 어느새 꽃피는 봄이 선뜻 다가와 있었다.

그날 오랜만에 나선 산보길 곳곳에서는 어느새 향긋한 흙내음이 물씬 묻어났다. 여기저기 밭둑에 앉아 쑥을 캐는 할머니들의 모습에서도 어느새 연초록 봄빛이 어른거렸다. 과수원 군데군데 눈처럼 하얀 매화가 마치 푸름이와 빛나의 말다툼처럼 앞 다투어 피어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뉴스비젼21>에도 보낼 예정입니다

덧붙이는 글 <뉴스비젼21>에도 보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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