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69

별은 지고 (4)

등록 2003.03.07 14:00수정 2003.03.07 15:20
0
원고료로 응원
"네놈이 이회옥이라는 놈이냐?"
"그, 그렇습니다."

다시 이틀 동안이나 약초 띄운 물에 담가져 있었건만 이회옥에게서는 여전히 악취가 풍겼다. 옥졸은 냄새가 완전히 사라지려면 앞으로 삼 년은 더 담가져 있어야 할 것이라 하였다.


그렇기에 진한 약향은 뿜어내는 약재가 담긴 주머니를 차게 하였다. 이러면 냄새가 훨씬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지옥갱 갱주에게 데리고 온 것이다.

생명의 은인이라면 은인인 갱주는 얼마 전에 새로 부임하였다고 한다. 그는 한 마리 천리준구를 끌고 왔는데 어찌나 사나운지 아직 아무도 타본 적이 없다 하였다.

"듣자하니 탈출하다 잡혔다고…?"
"……!"

이회옥은 잠시 할 말이 없었다. 괜히 대답했다가 불호령이 떨어질 것만 같아서였다.

"네놈에게 살 기회를 주겠다. 만일 임무를 완수한다면 탈출했다 잡힌 것은 없었던 것으로 해준다. 그러나, 실패한다면 다시 피거형에 처해지게 될 것이다. 알겠느냐?"


'허억! 또 피거형…? 안 돼! 그건 절대 안 돼!'

이회옥에게 있어 갱주의 말은 너무도 끔찍한 말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형벌인 피거형에 다시 처해지느니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거나 목이 잘리는 편이 났다.


아니 오마분시형에 처해지는 것이 차라리 났다고 생각한 이회옥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임무를 완수하리라 마음먹었다.

"네놈이 말 도둑이라 들었다! 말을 훔치려면 처음 보는 말도 다룰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말을 제법 잘 다루겠지?"
"……!"

"뒤뜰에 매어 놓은 말을 길들이는데 앞으로 정확히 한 달의 시간을 주겠다. 한 달 후 말을 탈 수 있으면 목숨은 건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다시 가죽포대 속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

"어떠냐? 하겠느냐?"
"예? 하, 합니다요. 하겠습니다요. 어떤 놈인지를 모르지만 반드시 길을 들이겠습니다요."

이회옥은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못 한다고 했다가는 다시 피거형에 처하라는 명이 떨어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후후! 그래? 좋아, 그럼 오늘부터 시작해라!"
"조, 존명!"

갱주가 사라진 후 이회옥은 허벅지를 꼬집어보았다. 말을 길들이는 것이야말로 특기 중의 특기가 아니던가! 그렇기에 이제 목숨을 건진 것이나 진배없었다. 그런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기에 꼬집어본 것이다.

정말 기적적인 죽음에서의 생환(生還)이었다. 이를 두고 아마 기사회생(起死回生)이라고 할 것이다.

* * *

"으으음…!"

중원의 관문인 산해관을 총괄하는 무천장 장주 집무실 앞에는 한 인물이 무릎꿇고 앉아 있었다. 고문을 당했는지 누더기가 된 그의 의복 여기저기에는 선혈이 묻어 있었다.

봉두난발이었지만 장주인 사면호협(獅面豪俠) 여광(呂廣)임이 분명하였다. 위풍당당한 체구였기에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곳 산해관에서 가장 키가 큰 사람이 바로 그였다. 다른 사람들보다는 적어도 머리 하나는 더 큰 칠척장신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사면호협은 긴 침음성을 터뜨리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무천장의 모든 출납을 담당하였기에 전후 사정을 훤히 꿰뚫고있는 혈면귀수(血面鬼手) 마욱진(馬郁秦)이 설마 이런 식으로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산해관에서는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권력을 지니고 있던 무천장의 장주인 사면호협이 이렇게 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느닷없이 날아 든 한 장의 첩지 때문이었다.

그것에는 무림천자성의 제일호법인 무영혈편(無影血鞭) 조경지(趙景持)의 수결이 있었다.

< 명(命)
산해관 무천장 장주에 혈면귀수 마욱진을 임명함.
현 장주 사면호협 여광은 부장주로 강등함.
무림천자성 제일호법 무영혈편 조경지 >

사면호협은 강등 당할 아무런 과오도 범한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일개 무천장주와 총단 제일호법은 엄청난 신분 차이가 있다. 그렇기에 따져볼 수도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제일호법의 수결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의 독특한 필체 때문이었다.

아무튼 사면호헙의 측근들은 총단으로 뇌물을 바치지 않은 것 때문에 이런 것 같다는 추측하였다. 그러면서 지금이라도 적당히 뇌물을 보내 이번 일을 무마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사면호협은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무림의 정의를 수호한다면서 어찌 뇌물 따위를 쓰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다 하였다.

올해 초 사면호협은 예년과 달리 갑작스런 폭설로 양민들의 모옥들이 무너져 내리는 통에 신년하례식에 참가할 수 없었다. 하여 총단 수뇌부들에게 정중한 인사말이 담긴 서찰을 보내는 것으로 신년 하례를 대신한 바 있었다.

그때 제일호법에게 보낸 서찰에는 부장주인 혈면귀수가 오랫동안 소임을 다하였으므로 비록 능력을 부족한 듯 하나 적당한 자리가 있다면 무천장 장주로 발령 내주었으면 한다는 의견을 함께 적었었다.

이에 대한 회신이 오기를 혈면귀수가 비록 이십 년 동안이나 무림천자성에 몸담았다고는 하나 장주가 되기엔 그릇이 작으며, 속 또한 좁아 안 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십 년이 아니라 이백 년을 더 무림천자성에 몸담고 있다 하더라도 절대 무천장 장주에 임명될 일은 없으니 다시는 이런 서찰을 보내지 말라 하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그를 장주에 임명한다는 첩지가 날아왔으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럴 즈음 혈면귀수는 자신이 장주 될 것을 미리 알기라도 하였는지 수하들을 대동한 채 거들먹거리며 들어섰다. 그리고는 어찌 부장주 주제에 감히 장주만이 앉을 수 있는 태사의에 앉았냐면서 호통을 쳤다.

어제의 수하가 갑자기 상전이 되었으나 사면호협은 토를 달지 않았다. 인사권은 총단 관할이기 때문이다. 자신은 그저 무림의 정의를 수호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 생각한 것이다.

그렇기에 즉각 내려앉으며 정중한 포권지례를 올렸다. 이날 이후 산해관을 총괄하는 무천장에는 일대 변혁이 일었다.

사면호협이 애써 키운 동량들이 요직에서 밀려나는 대신 평소 혈면귀수와 안면을 트고 지내던 자들이 대거 발탁된 것이다.

이렇게 며칠이 지난 후 사면호협은 장주의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는 정말 엉뚱한 이야기를 들었다. 무천장의 공금을 횡령하여 사리사욕을 채웠으니 모두 토해내라는 것이다.

지난 이십 년 간 무천장의 공금을 출납하는 업무를 담당하던 사람은 바로 혈면귀수 본인이었다. 그런 그가 내민 장부는 겉으로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면밀히 살펴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상당수 있었다.

적지 않은 은자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그 금액은 무려 칠백만 냥에 달했다.

이십 년 전, 혈면귀수가 무림천자성에 몸담기 위하여 헌납한 액수는 칠십만 냥이었다. 그 금액에 정확히 열 배가 되는 금액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자신이 가져도 될 잉여금마저 헐벗고 굶주린 양민들을 위하여 아낌없이 희사한 사면호협으로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혈면귀수는 단호하였다. 당장 부정축재한 재산을 내놓지 않으면 엄벌로 다스리겠다는 것이다. 있지도 않은 재산을 내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사면호협은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였지만 혈면귀수는 막무가내였다. 결국 형틀에 묶였고, 모진 매를 맞았다.

엉덩이가 터지면서 선혈이 튀었고 결국 혼절의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고 말았다. 이렇게 열흘이 지날 무렵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들었다.

뇌옥에 갇혀 있던 사면호협은 옥졸로 전락한 수하로부터 불공을 드리겠다며 대덕사를 찾았던 연화부인 사인옥(史璘玉)이 갑작스럽게 죽었다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사인(死因)은 액사(縊死 : 목이 졸려 죽는 것)라 하였다. 그렇다면 분명 타살이었다.

연화부인은 장주의 부인으로서 후덕함의 대명사라 할 수 있었다. 따라서 누군가와 원한을 살만한 일이 전무하였다. 그렇기에 사면호협은 누가 흉수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단감 10개에 5천원, 싸게 샀는데 화가 납니다 단감 10개에 5천원, 싸게 샀는데 화가 납니다
  2. 2 산림청이 자랑한 명품숲, 처참함에 경악했습니다 산림청이 자랑한 명품숲, 처참함에 경악했습니다
  3. 3 대학가 시국선언 전국 확산 움직임...부산경남 교수들도 나선다 대학가 시국선언 전국 확산 움직임...부산경남 교수들도 나선다
  4. 4 해괴한 나라 꼴... 윤 정부의 낮은 지지율보다 심각한 것 해괴한 나라 꼴... 윤 정부의 낮은 지지율보다 심각한 것
  5. 5 '유리지갑' 탈탈 털더니...초유의 사태 온다 '유리지갑' 탈탈 털더니...초유의 사태 온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