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시간에 갈 길 1달 걸려 돌아가는<BR>'짠순이 여행객' 쿠미코를 만나다

▲교통반점 앞을 흐르는 강변 공원에서는 아침마다 한바탕 춤판이 벌어진다. 동네 아줌마, 아저씨,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모여 저마다의 갈고 닦은 춤솜씨를 뽐낸다. 복장 제한 없음.김남희

북경에서 성도로 가는 특쾌 열차는 쾌적했지만 27시간의 이동은 지루했다. 무슨 놈의 나라가 이렇게도 커서 한 번 이동하는데 적게 걸려야 열 두어 시간이니…. 이젠 나도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몸으로 느낀다. 예전에 인도를 여행할 때 40시간 가까이 기차를 탄 적이 있다. 그때는 침대칸은 고사하고 인도 서민들이 타는 딱딱한 의자에 앉아 이틀을 버텼는데 이제는 어림도 없다.

열 시간이 넘으면 망설임도 없이 "침대칸 주세요!"를 외친다. 침대칸에서 스무 시간 넘게 보내고 나면 왜 이렇게 피곤하고 힘이 드는지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여행 다니라고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얘기하고 싶을 정도다.

중국기차의 좌석은 네 종류가 있다. 잉쭈어라 불리는 딱딱한 좌석과 루안쭈어라 하는 부드러운 좌석, 잉워라 하는 딱딱한 침대와 루안워라 불리는 부드러운 침대이다. 6명이 한 방을 쓰는 잉워는 복무원들이 계속 쓰레기를 치워주고, 더운 물이 놓여 있어 차를 마실 수 있다. 중국 사람들 중 침대칸을 타는 사람들은 비교적 돈이 있는 사람들이거나 출장중인 사람들이다.

▲**판다연구기지의 판다들. 아침 먹느라 관광객은 아랑곳하지 않고 바쁘기만 하다.**김남희

오늘 내 앞에 앉은 젊은 청년 "까오홍쥔"도 성도를 거쳐 상해로 출장을 가는 엔지니어이다. 영어를 곧잘 하는 그와 중국어, 영어를 넘나들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앞자리의 조폭 같이 생긴 남자가 자꾸 힐끔거리며 쳐다본다.

한참을 염탐하던 그가 마침내 눈이 마주친 기회를 틈타 말을 건다. "중국어 어디서 배웠어요? 곧잘 하네요." 아니, 한국말? 성도의 체육 고등학교에서 태권도를 가르치고 있는 조선교포이다. 셋이서 영어와 중국어, 한국어가 마구 뒤섞이는 무질서한 대화를 나누며 오다보니 긴 기차여행이 덜 지루하다.

사천성에 들어서니 창 밖으로 푸릇한 어린 보리싹들과 노랗게 꽃을 피운 유채밭이 보인다. 성도에 도착하니 저녁 7시가 넘었다. 택시를 같이 타고 온 교포청년이 내 숙소인 교통반점 앞에 내려주며 택시비도 받지 않는다. 게다가 핸드폰 전화번호를 적어주며 혹시 성도에 머무는 동안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하라고 당부한다.

▲**무후사 근처의 노천 시장에서 바나나를 파는 아저씨. 뒤로 보이는 것은 사탕수수.**김남희

마음이 더워진다. 북경에서 한국인들과 조선교포들 간에 서로 좋지 않게 말하는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지만 결국 동포란 이런 거다. 내가 이곳이 초행길이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전을 염려해주고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 싶어하는 마음.

이 분뿐만이 아니다. 서안행 기차표를 구하지 못해 예정에도 없던 북경으로 가게 되었을 때 북경에는 지인이 한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내 여행기를 읽은 오마이뉴스의 한 독자분이 연락을 해왔다. 북경지사에 파견 나와 있는데 혹시 북경에 오게 되면 꼭 연락을 달라고. '접대용 멘트'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 나이기에 바로 연락을 드렸다.

간첩 접선하듯이 서로의 인상착의를 메일로 주고받은 후 그 분은 미리 예고한 복장으로 일요일 이른 아침에 기차역으로 직접 마중을 나오셨다. 민박집을 잡아주고, 맛있는 밥을 사주시며 여행정보를 나눠주시더니, 급기야는 설을 쇠러 한국에 가며 아파트 열쇠를 내게 주고 가셨다.

일면식도 없는 내게 집 열쇠를 맡기며 편히 쉬면서 충전하고 가라고 하는 그분의 마음. 덕분에 넓고 깨끗한 고급 아파트에서 혼자 열흘을 머물며 팔자에도 없던 호화판(?)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물론 허접한 배낭족의 생활로 복귀한 후 긴 적응기간을 거쳐야 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했지만….

교통반점에 들어서니 4년 전 그대로의 모습이다. 교통반점은 사천성을 여행하거나 이곳을 거쳐 티벳으로 들어가는 많은 국제 배낭족들의 거점 역할을 해왔다. 그 사이 배낭족 숙소들이 무후사 근처에 몇 군데 새로 생겨 그 명성이 예전만 못하지만 그래도 이만큼의 쾌적함과 편의를 제공하는 숙소는 찾기 힘들다.

직원들은 다 영어를 하고, 4인이 함께 방을 쓰는 방은 하루 30원(우리돈 4500원)에 아침식사가 포함되어 있다. 무엇보다 많은 배낭족들이 이곳을 거쳐 가기 때문에 최신의 정보를 얻기에 최적의 장소이다. 오늘 나와 같은 방을 쓰는 쿠미코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시장 두 할머니의 표정이 대조적이다(왼쪽). 자전거에 야채를 싣고 장사하러 오는 아가씨(오른쪽).**김남희

올해 나이 스물 여덟 살인 일본인 여성 쿠미코는 3년째 혼자 여행하고 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유럽까지 3년 동안 여행을 하며 쓴 돈은 고작 1만3천불. 우리 돈 1600만원 남짓이다. 아시아에서 2년간 8천불, 아프리카와 유럽에서 5천불을 썼다고 한다. 나도 배낭 메고 나섰다 하면 세계가 알아주는 짠순이로 돌변하는데 이 친구한테는 못 당하겠다.

"3년 동안 1만3천불이 어떻게 가능해?"
"이란이나 파키스탄 같은 곳에서는 하루 5불이면 살 수 있어."
"난 일 년에 천 만원을 예상하는데."
"그 돈이면 아시아는 2년 동안 여행할 수 있어." 이런다.

그녀가 내게 묻는다.
"5년간의 여행이 끝나면 뭘 할 거야?"
"글쎄.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어. 하지만 몇 가지 생각하는 건 있어. 장기적으로는 외국인이 한국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를 지방에 열고 싶고…. 또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청소년들을 위한 여행학교 같은 걸 해보고 싶기도 해."
"여행학교라구? 나 같은 애가 그런 걸 일찍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나야말로 네가 말한 학교에 적응 못한 아이거든. 나 고등학교 중퇴했어."

▲**돋보기 안경을 낀 할아버지가 야채 좌판을 앞에 놓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김남희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는 중학교 때까지 공부를 아주 잘했다고 한다. 자연히 고등학교는 동경에서도 공부 잘 하는 아이들만 모인다는 명문고에 진학했다. 하지만 1년 남짓 다니다 자퇴를 했다고 한다.

"이유? 그냥 학교가 싫었어. 내가 기대했던 것하고는 너무나 달랐으니까. 난 다양한 세계를 접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는데 고등학교에서는 모든 게 대학입학을 위한 준비뿐이었고. 다들 거기만 열중하는 분위기였어."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혼자 방을 구한 그녀가 택한 길은 술집에서 일하는 거였다.

"난 다른 세상을 보고 싶었는데, 어떤 세상을, 어떻게 접해야 할지 몰랐어. 그때 내가 여행을 알았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처음 술집에서 일을 할 때엔 그냥 음식을 나르고 하는 종업원 같은 거였어. 그러다 더 심하게 나가게 됐지. 결국 집에서 문제가 되고, 일하던 곳을 그만 뒀어. 그때 우리 엄만 나한테 악마의 자식이라고까지 했어."

그녀는 밤에는 바에서 일을 하며 낮에는 검정고시를 준비해 고졸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동경의 2년제 전문대학에 들어갔다.

"난 공부하는 건 좋아해. 고등학교에서 주입식으로 가르치는 공부에는 흥미를 못 느꼈지만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공부는 재밌어. 난 지금 스물 여덟이나 됐는데 아직도 다시 대학으로 가서 제대로 공부를 하고 싶어."

쿠미코는 또래 일본 친구들에 비해 영어를 아주 훌륭하게 구사한다. 몇 년 전 4개월간 영국에서 연수를 했다고 하는데 웬만한 사람들이 1년 이상 한 것보다 더 막힘 없이 말을 한다. 지금은 중국어를 혼자 공부하고 있는데 그녀가 공부하는 법은 이렇다.

"북경에 한 달 동안 머물렀는데 그때 중국어 공부를 시작했어. 아침 9시면 책이랑 녹음기를 들고 맥도날드로 갔어.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오후 5시까지 있다가 나와. 맥도날드만큼 오래 있어도 눈치 안 주는 데가 없다니까."

그렇게 혼자서 한 달 공부한 그녀의 중국어는 여행하기에 불편함이 없다.

"넌 결혼은 생각이 없니?" 그녀가 묻는다.

나 역시 내가 살아온, 길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굴곡이 있었던 삶을 이야기한다.

"네가 말한 그 다른 사람과 절대로 나눠질 수 없는 부분 있잖아. 등을 맞대고 같이 잠들어도 절대로 공유할 수 없는 어떤 부분. 그게 넌 네 삶에서 핵심이라고 생각하니? 아니면 그저 사소한 한 부분이니?"
"난 핵심이라고 보는데."
"나도 그래. 어떤 부분은 결코 나눠질 수 없고, 이해될 수도 없는 것 같아. 남희, 넌 혼자 살려면 뭐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
"당연히 경제적 자립이지."
"역시 그렇지? 근데 난 좀 부끄러운 게 이번 여행경비를 부모님께 빌렸거든. 돌아가면 우선 직장을 잡고 그것부터 갚아야 해. 몇 년이 걸리더라도 꼭 갚을 거야."

쿠미코는 지금 성도에서 감기가 낫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티벳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5천미터급의 고개들을 넘어야 하는데 지금의 몸 상태로는 힘들 것 같아 몸이 회복되기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한다. 나 역시 감기를 앓고 있어서 그녀는 레몬과 생강과 꿀을 넣고 직접 만든 감기약을 한 컵 나눠준다.

"티벳은 어떻게 들어갈 건데?"
"사천에서 육로로 갈 거야. 물론 히치하이킹이지."
"하지만 허가서는 어떻게 하고?"

티벳은 중국 공안의 외국인에 대한 여행규제와 감시가 아직 심한 지역이다.

"알리에서 벌금 300위안만 내면 허가증을 받을 수 있어."
그녀는 이미 그곳 검문소의 영어를 하는 유일한 공안의 이름까지 알고 있다. 나 역시 8월에 티벳을 다시 가기 위해 중국으로 돌아올 예정이라 이것저것 묻는다. 이곳에서 육로로 라사까지 들어가는데 그녀가 잡고 있는 시간은 총 한 달.

"비행기 타면 한 시간이면 가는데."

그녀와 나는 깔깔거리며 웃는다. 우리는 혼자 장기 여행을 하는 아시아 여성으로서의 어려움과 즐거움을 공유하며 금세 가까운 친구가 된다.

"나도 처음엔 2년만 생각하고 나왔는데 벌써 3년이 됐어. 너도 지금은 5년을 생각하지만 아마 7년이 될지도 몰라."
"하지만 또 모르지 뭐. 5년이 아니라 다섯 달만에 그만둘지도…. 전에는 일단 목표를 정하면 남들 눈 때문에라도 꼭 지켜야 한다는 부담이 컸었는데 지금은 아니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재밌으면 계속 하는 거고, 아니다 싶으면 접을 거야."
"그래 맞아. 중요한 건 즐겁게 하는 거니까. 하지만 내 경험으로 봐도 즐거울 거야."

그녀와 내가 서로의 여행을 행복하게 마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