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던 중 왜문에서 온 문혁광이라는 자에 의하여 곡주부인이 살해당하는 일대 사건이 벌어졌다. 그날은 선무곡의 잔칫날이었다.
곡주와 함께 누대 위에서 후덕한 모습으로 곡도들을 바라보던 그녀에게 독이 묻은 암기를 발사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
곡주의 부인은 모든 곡도들이 진심으로 존경하던 여인이었다. 그런 그녀가 비명횡사하였기에 선무곡의 슬픔은 매우 컸다.
사람들은 북곡에서 보낸 간세일 것이라 하기도 하였고 왜문이 꾸민 음모라고도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밝혀진 것은 없었다.
정의수호대원들이 서둘러 문혁광을 죽여버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은 전례가 없던 일이다. 무림천자성에서는 이러한 일이 벌어질 때마다 혹시 배후가 있을지 모른다면서 철저하게 조사를 하곤 하느라 적지 않은 시일을 소모하곤 하였었다.
그런데 이번엔 아니었던 것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채 조사도 끝나기 전에 서둘러 문혁광을 죽여버린 것이다.
부인을 잃고 홀아비가 된 곡주는 더욱 실의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곡주 역시 한 구의 시신이 되는 미증유의 사건이 벌어졌다. 측근 중의 측근이자 심복 중의 심복이라 할 수 있는 수석장로가 투척한 상문정(喪門釘)에 격중되어 유명을 달리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시해였다.
곡주 유고(有故) 후 장로 중의 하나가 나서서 혼미에 빠진 선무곡을 수습하였다. 얼마 후 그는 스스로 곡주임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곡주를 시해한 수석장로 역시 문혁광처럼 제대로 된 조사조차 하지 않고 형장(刑場)의 이슬이 되게 하였다.
그가 곡주가 된 이후 가장 처음 한 일은 밀사를 보낸 것이다. 그의 품에는 수취인이 무림천자성주로 되어 있는 밀서가 있었다.
거기엔 자신을 선무곡 곡주로 인정해 달라는 글이 있었다. 대신 다시는 천뢰탄을 개발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겠다는 맹세의 글귀도 있었다. 그리고 간섭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것이며, 무엇을 결정하든 무림천자성의 의도를 반영하겠다는 글귀도 있었다.
한마디로 선무곡의 자주권(自主權)을 포기할 터이니 자신을 곡주로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눈치 챈 곡도들은 웬 망발이냐면서 반대하였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곡주 일당이 이미 전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불량한 제자들을 솎아낸다는 핑계로 자신들의 뜻에 반하는 많은 사람들을 잡아갔다. 그리고는 정신과 육체, 그리고 마음까지 깨끗하게 만들어 준다는 삼청동(三淸洞)에 밀어 넣었다.
말이 그렇지 실제의 삼청동은 가히 지옥이라 할만한 곳이었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폐인이 되어 버렸다.
사람들의 저항은 점점 거세어져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곡주 일당은 무력으로 모든 반발 세력을 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제자들이 목숨을 잃거나 실종되었다. 선무곡이 생긴 이래 발생된 여러 불행한 일 가운데 하나가 발생된 것이다.
이후 선무곡은 무림천자성의 괴뢰나 마찬가지였다. 무엇이든 그들의 뜻과 다른 결정을 내릴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던 중 선무곡 사상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몇 년 동안의 기근으로 인삼 작황이 좋지 않았기에 왜문 등 다른 문파로부터 많은 빚을 얻어 쓴바 있었다.
그 상환기일에 제대로 빚을 갚지 못하는 바람에 크나큰 위기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빚을 갚기 위하여 헐값에 인삼밭은 넘겨야 하는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그것이 사라지면 선무곡은 더 이상 유지 될 수 없기에 어쩌면 해체가 되어야 할지도 모르는 그런 상황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취임한 신임 곡주는 전임 곡주들과는 사뭇 다른 사람이었다. 지금껏 취임한 곡주들은 보수적인 장로들이 밀어준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만은 그렇지 않았다.
선무곡 사상 처음으로 호법 가운데에서 곡주가 나온 것이다. 전대 곡주일당들의 비리를 통렬히 비판하던 수석호법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곡도들의 기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컸다.
취임 직후 곡주는 썩어 빠진 곳들을 도려내었다. 그동안 들지 않아도 될 비용이 소요되던 여러 불합리한 것들을 과감하게 없앤 것이다. 가히 쾌도난마(快刀亂麻)라 할만한 조치였다.
그리고는 북곡인 주석교의 교주와 회동을 하였다. 남곡과 북곡으로 바뀐 이후 최초로 수뇌부 간의 만남이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최악의 위기를 넘기는데 성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전 무림의 이목을 사로잡는데도 성공하였다. 하여 신임 곡주인 대중존자(大中尊子)의 명성은 전 무림에 널리 알려졌다.
제자들은 어쩌면 이번 기회야말로 무림천자성의 지긋지긋한 간섭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했다.
세상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속도로 모든 빚을 갚은 것으로도 모자라 모든 것이 일취월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삼의 작황은 근래에 보기 드문 풍작이었다. 게다가 얼마 전 강호를 휩쓸고 간 돌림병 때문에 인삼의 가격은 엄청나게 폭등하였다. 덕분에 부자가 되었다. 이에 선무곡에서는 자위(自衛) 차원에서 새로운 무공과 병기를 도입하기로 하였다.
졸지에 모든 빚을 갚고도 엄청난 거금을 쥐게 된 선무곡에서 무공과 병기를 구입하려 한다는 소문이 번지자 무림의 여러 문파들로부터 제의가 쏟아져 들어왔다.
그동안 같은 정파라 할지라도 무림천자성의 독주를 두고만 볼 수 없어 각 문파에서는 은인자중하면서 무공을 연마하는 가운데 무적검과 대응할 병장기들을 개발하고 있었다.
그들로서는 선무곡이 지불할 막대한 은자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문파를 유지하려면 은자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여 여러 문파들이 무공을 넘기거나 병장기를 넘기겠다는 제의를 해왔다. 그 가운데에는 공개적인 문파도 있었고, 은밀한 제의를 하는 문파도 있었다.
선무곡 사람들로서는 각별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사안(事案)이었기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다시피 하였다.
이러는 가운데 선무곡에서는 나름대로 선정 기준을 정했다. 병장기의 경우에는 강도도 강도이지만 제조비법을 넘겨줄 수 있는지가 관건이었다.
무공의 경우에는 단순히 무공비급만 넘기는 것이 아니라 무공교두를 파견하여 보다 빨리 무공을 익힐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하고 있었다. 막대한 은자를 지불하는 대신 한시바삐 자주권을 회복하기 위함이었다.
각 문파가 제시한 조건을 조사하는 동안 수뇌부로부터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일부 정보가 새어 나왔다.
여러 문파가 저마다 좋은 조건을 제시하였지만 그 가운데 점창파가 제시한 조건이 가장 좋다는 것이다.
최근 점창파에서 개발한 파암노(破巖弩)는 무공이 약한 선무곡 사람들에게 있어 더 없이 적합한 병장기였다.
쇠뇌라고도 불리는 노(弩)는 보통의 활(弓)로는 발사하기 어려운 대형 화살이나 여러 개의 화살을 발사할 수 있으며, 연속적으로 발사할 수도 있는 장점이 있는 병장기이다.
또한 활보다 사거리가 길며, 파괴력 또한 크다는 장점이 있다.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처음 나타나 한(漢)나라 때 위력을 떨친 이래 유용한 무기로 활용되고 있었다.
한나라 때 노는 목제(木製)인데 쇠뇌 자루(臂)는 칠(漆)을 하였고, 여기에 청동으로 만든 기계가 달렸는데 기계인 노기(弩機)는 곽(郭), 아(牙), 현도(縣刀) 등의 부분품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시위(弦)를 당기는 방법에는 손으로 하는 것과 발로하는 두 가지가 있었다고 한다.
사기(史記) 소진전(蘇秦傳)에는 하남(河南)의 한(韓)에서 유래하였다 하나, 오월춘추(吳越春秋)에서는 호남(湖南)의 초(楚)에서 발명되었다고 한다. 허나 어떤 것이 맞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러한 노를 사용하는 실상(實狀)에 대해서는 산동무씨사(山東武氏祠)의 한대화상석(漢代畵像石)이나 동진(東晋) 고개지(顧愷之)의 여사잠도(女史箴圖)에서 볼 수 있다.
한나라 때에는 노를 구별하는데 쏠 수 있는 돌의 수로 표시하였다. 이에는 일석에서 십석까지 여덟 종류가 있었다고 한다.
이는 시위 탄력의 한계와 궁신(弓身)의 강도를 나타낸 것이다.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발전을 이뤄 여러 가지 종류가 되었는데 사람이 들고 다니면서 사용할 수 있는 것에는 탄노(彈弩), 소노(小弩), 수노(手弩)가 있고, 수레에 설치한 차노(車弩)에는 강노(剛弩)와 팔우노(八牛弩) 등이 있다.
이 가운데 팔우노는 여덟 마리의 황소가 있어야 시위를 당길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엄청난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역사상 가장 강한 위력을 지닌 노는 해동 땅 신라(新羅) 사람 구진천(仇珍川)이 만든 천보노(千步弩)라는 것이 있다.
글자 그대로 한번 쏘면 천 보 밖에 있던 병사의 갑옷을 뚫을 위력을 지닌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위력을 지닌 노였다.
이것이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덩치가 작았던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굴복시킬 수 있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당시 십팔만 나당(羅唐) 연합군(聯合軍)을 총지휘하는 대총관인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은 천보노의 위력을 보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나라에도 노가 있기는 하였으나 천보노에 비하면 조족지혈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장왕 이십 년,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철군한 그는 황제에게 이를 고하였고, 황제는 신라로 하여금 구진천을 보내도록 하였다.
당나라의 협조가 없었다면 삼국을 통일 할 수 없던 신라로서는 그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황제는 천보노를 만들어 바치도록 하였다. 하지만 구진천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여러 이유를 달아 끝내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이다. 만일 비법을 가르쳐 준다면 그것을 이용하여 신라를 공격하리라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일 당나라 군사는 신라를 삼키려고 달려들었다가 천보노의 위력에 처참하게 패퇴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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