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점창파에서 새롭게 고안한 파안노는 내공이 깊지 않더라도 시위를 당길 수 있도록 고안된 장치가 달려 있었다.
위력은 천보노에는 당할 수는 없지만 웬만한 노보다는 월등하다 할 정도로 강하고 정확했다.
그렇기에 선무곡 사람들에게 적합하였던 것이다.
점창파에서는 병기만 파는 것이 아니라 제조비법까지 전수해 준다고 약속했다. 하여 제자들은 바위도 꿰뚫는다는 파암노가 선무곡의 차세대 병장기가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병기 선정 기준이 바뀌었다. 어느 날 갑자기 곡주의 아들이 나타나 곡주의 뜻이라면서 병기를 선정함에 있어 위력이나 비법의 전수보다는 선무곡과 얼마나 가까운 문파인지에 더 많은 점수를 부여하라는 것이다.
점창파 이외에 병기를 팔겠다고 한 곳은 여러 곳이 있었다. 그들이 제안한 것에는 점수가 매겨져 있었다. 차세대를 결정할 중차대한 문제이기에 객관적이고도 공정한 점수매김이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무림천자성이었다. 그들이 팔겠다고 내놓은 병기는 무적의 위력을 지닌 무적검(無敵劍)이 아닌 그보다 한 단계 아래인 만한검(萬寒劍)이었다.
만한검은 무적검에 비하면 수수깡이라 할 정도이다. 그렇지만 강호에서 제작되는 다른 병기보다는 강한 것이었다. 하여 많은 문파들이 만한검을 애병으로 선정하고 있는 것이다.
선무곡 사람들은 같은 정파이면서 언제나 후견인인 척하던 무림천자성이 무적검이 아닌 만한검을 사라하자 코웃음을 쳤다.
무적검이라면 혹시 모를까 누가 한물간 병기인 만한검을 사겠는가! 게다가 무림천자성에서는 만한검의 제조비법도 전수해 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검에 손상이 있을 때 이를 수리하려면 반드시 무림천자성을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현재 만한검의 가격은 은자 오백 냥이다. 그들이 제시한 가격 역시 은자 오백 냥이었다. 대외적으로는 혈맹(血盟)이라고 떠벌리면서도 단 한푼도 깎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만한검에 손상이 있어 수리를 맡기면 손상 정도에 관계없이 은자 사백 냥을 내라고 한다. 손톱만큼 날이 빠진 것이나 아예 반이 부러졌거나 모두 같은 가격이라 한다. 칼만 안 들었지 강도나 다름없는 처사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현재 만한검의 손상을 수리할 능력을 지닌 곳은 오로지 무림천자성뿐이다. 그렇기에 욕을 하면서도 수리를 맡길 수밖에 없었다. 안 그러면 은자 오백 냥을 내고 다시 사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파암노에 관한 기밀이 흘러나오자 당연히 그것으로 선정될 것이라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오만한 무림천자성이 이번만은 자존심이 상하겠구나 하는 생각에 내심 흐뭇해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선정 기준을 바꿔버리자 졸지에 파암노가 아닌 만한검을 구입하는 것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것 때문에 눈만 뜨면 의사청에 모여 입씨름을 하는 것이다. 장로들은 곡주의 편을 들었고, 호법들은 말도 안 되는 처사라면서 강하게 반발하는 중이었다. 물론 곡도들의 의견은 곡주의 뜻과 전혀 상반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현재로서는 곡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권한을 지닌 사람은 곡주이다. 다른 문파들과 달리 선무곡에서는 매 오 년마다 곡주가 선출된다.
냉혈철심이 오랫동안 독재를 하였기에 이렇게 곡규를 바꾼 것이다. 아무튼 곡도들의 손에 의하여 선출되는 곡주는 임기 동안 전권(全權)을 휘두를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이에 대하여 장로와 호법들은 의견을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만일 장로와 호법들이 합세하여 곡주를 몰아내자고 하면 그것은 가능하다. 총 십사 명 중 적어도 십이 명 이상이 찬성하면 곡주를 하야(下野)시킬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장로들은 모두 곡주의 심복들이었다.
그렇기에 갑론을박을 아무리 벌인다 하더라도 곡주가 결정을 번복하지 않는 이상 한물간 병기이자 조건도 좋지 않은 만한검을 구입하는 것으로 결정될 것이다.
분명 무언가 흑막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 충분히 짐작되었다.
한편 모든 것이 결판나다시피 한 가운데 호법들이 매일 의사청에서 큰 소리로 난상토론을 벌이는 것에는 다른 속내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서 곡도들과 같은 생각이었지만 곡규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인상을 심어 주려는 것이다.
한 마디로 곡도들의 신임을 사려는 술책이었다. 차기에는 자신들이 지지하는 사람을 곡주을 만들려는 속셈인 것이다.
그들은 지금은 호법자리에 머물고 있지만 전대에는 장로직에 있던 자들이었다. 선무곡의 오늘날이 요 모양, 요 꼴인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아마도 이러한 자들이 곡을 이끄는 수뇌부의 자리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곡주가 되면 전권을 휘두르면서 적지 않은 축재(蓄財)를 하였다. 그러는 동안 곡주의 자식과 인척들은 늘 비리에 연루되기 마련이었다.
한편 장로와 호법들은 제멋대로 붕당을 만들어 놓고는 니전투구(泥田鬪狗)도 서슴지 않았다. 이 당에서 저 당으로 움직이면서 먼저 있던 당에 대고 욕하기도 서슴지 않았다.
회의를 할 때면 욕설은 보통이고 멱살잡이까지 종종 벌어졌다. 한 문파를 이끄는 수뇌부들의 행태라고 보기엔 너무도 수준이 낮았다. 늘 싸우면서도 한가지 일치하는 것이 있기는 하다.
가뭄이나 홍수로 인삼밭이 망가졌을 때에도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급급해 하던 인간들이 바로 그들이라는 것이다.
순박한 선무곡 제자들은 이러한 것을 바꿔보고 싶었다. 하지만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는 자들의 교묘한 술수와 노골적인 협박 때문에 전면에 나설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언제 어떻게 비명횡사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선무곡에서 규율을 담당하는 검찰단(檢察團)에 끌려가면 온갖 고문을 당하게 된다. 재수 없으면 목숨까지 잃게된다.
이런 것을 알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검찰단으로 끌려갔고, 그 가운데 여럿이 목숨을 잃었다. 그들은 설사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선무곡이 잘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아는 곡도들은 극소수였다. 철저하게 은폐하였기 때문이다. 그들 대부분은 검찰원과 상관없이 실종된 것으로 처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감춰진 것은 아니다. 몇몇 사건은 드러났다.
그럴 때마다 수뇌부들은 사건을 애써 축소시켰다. 그러면서도 이목이 두려운지 관계자들을 하옥시키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들이 수뇌부인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대부분 하수인이라 할 수 있는 하위직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이것도 잠시, 시간이 흐르면 언제 그랬는지 그들은 복직되어 떵떵거리거나 출옥하여 저잣거리를 활보하곤 하였다. 그들 가운데에는 승승장구하여 현재 수뇌부에 몸담고 있는 자도 있다.
참으로 개탄할만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튼 이런 자들이 곡을 이끌고 있으니 선무곡의 오늘날이 요 모양 요 꼴인 것이다. 그나마 이 정도라도 되는 것은 선량하면서도 영특한 곡도들 덕분일 것이다. 그들은 수뇌부이 썩건 말건 묵묵히 제 할 일을 다 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 * *
"후으으으읍! 휴우우우우! 후으으읍! 휴우우우우!……"
모두가 잠든 깊은 밤, 만천하가 백설로 뒤덮인 가운데 무림천자성 외원에 자리한 철마당의 마굿간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분명 말이 아닌 사람의 기척이었다.
두툼한 벽돌로 쌓아 그런지 밖은 살을 에일 듯한 혹한임에도 불구하고 실내에는 훈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 원인이 거의 한 자 높이로 깔려 있는 건초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굿간 한쪽에 있는 화로 때문이었다. 그것은 넓은 마굿간 전체를 데우려 가져다 놓았는지 제법 큰 것이었다. 거기엔 시뻘건 숯불이 타닥거리면서 타들어 가고 있었다. 안에 콩 껍질이라도 들었는지 간혹 껍질 터지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화로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는 결가부좌를 튼 청년이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운기행공에 열중하고 있었다.
"후으으으읍! 휴우우우우! 후으으읍! 휴우우우우!……"
그는 훈훈하기는 하지만 결코 덥지는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마에 솟은 땀이 흘러내리지 말라고 쓰는 두건을 두르고 있었다.
그는 말 도둑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무림지옥갱에 하옥되었다가 운 좋게 생환한 이회옥이었다.
그때 죄수 신분증으로 이마에 새겨진 삼천이십칠이라는 글자를 가리기 위하여 한 겨울에도 두건을 쓰고 있는 것이다.
무림천자성의 성주인 철룡화존 구부시의 애마인 비봉과 차기 성주가 될 철기린 구신혁을 태우고 다닐 비룡을 전담하고 있는 그는 이제 자타가 공인하는 철마당 제일 조련사였다.
무림엔 무림천자성에서 제일이라면 세상에서 제일이라는 말이 있다. 따라서 이회옥은 천하제일 조련사인 셈이다.
처음엔 애송이 취급을 받았으나 비룡을 조련해 내는 것을 본 다른 조련사들은 그를 동료로 받아 들였다. 그렇기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스스럼없이 이회옥의 조언을 구하러 오곤 하였다.
물론 그때마다 아는 한도 내에서 성실하게 답변을 해줬고, 그것이 효과가 있었기에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동료 조련사 대접을 받는 것이다. 덕분에 요즘엔 심심지 않게 술을 마셨다.
술자리가 있을 때마다 끼워주었기에 술을 배웠던 것이다.
처음엔 한잔만 마시고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토할 것 같이 속이 울렁거렸으나 요즘엔 아니었다. 다른 조련사들이 마시는 만큼 마시고도 멀쩡할 정도로 술 실력이 는 것이다.
자고 일어나면 자리끼(잠을 자다 목이 마를 때 마시기 위하여 침상 주변에 떠놓는 물)가 얼어붙을 정도로 추운 요즘 철마당 휘하 제일향과 제이향에서 하는 일이라곤 하나뿐이다.
혹시라도 마굿간 안에 있는 말들이 얼어죽지 않았나 가끔가다 들여다보는 것이 그것이다. 너무 춥거나 너무 더울 때에는 조련하지 않는 것이 철마당의 기본 방침이기 때문에 할 일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천리준구인 대완구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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