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91

분타 지위 협정서 (1)

등록 2003.03.31 13:29수정 2003.03.31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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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분타 지위 협정서


"저어, 그, 그게…"


이회옥은 일순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철마당 소속 조련사는 무공을 익혀서는 안 된다. 따라서 자칫 치도곤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네 이놈, 방금 어디 소속이냐고 물었다."

이회옥이 머뭇거리기만 할 뿐 빨리 대답하지 않자 구신혁의 음성은 금방 냉랭해졌다.

"예! 소, 속하는 철마당 제일향 소속 이회옥이라고 합니다."
"철마당 이회옥? 오호라, 이제 보니 네가 바로 비룡을 길들였다는 바로 그 녀석이로구나."

웬일인지 다소 냉랭하던 철기린의 어투가 금방 부드러워졌다. 이회옥은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는 듯 하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그, 그렇습니다."
"핫핫! 수고했다. 그나저나 비룡이란 놈을 보고 싶은데…"

"소, 속하를 따라 오시지요."
"뭐라고? 좋다, 앞장서라!"


철기린은 따라오라는 말에 잠깐 움찔하였다. 어찌 감히 조련사 따위가 자신더러 오라 가라 하는가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하고 흔쾌히 마구간으로 따라 들어갔다.

강호 유람 중 원단(元旦)이 가까워지자 구신혁은 총단으로 되돌아 왔다. 신년하례식에 참석하기 위함이었다.

무림천자성의 신년하례식은 황궁의 그것보다 결코 못하지 않다. 오히려 더 화려하고 더 장중하였다. 그렇지만 그것 때문에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이번 하례식에는 천하에 산재한 모든 무천장 장주들과 모든 문파의 장문인들이 대거 참석하게 될 것이다.

철기린이 무림천자성을 이끌 후계자가 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이 주인공이니 오고 싶지 않아도 반드시 참석하여야 하는 자리였던 것이다.

어느 정도 성장한 이후부터 철기린은 총단에 머무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엄한 부친의 눈치를 보아야 하기 때문이었고, 남들의 눈이 있기에 행동의 제약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소성주라고 불렸지만 좋아하는 술도 마음대로 마실 수 없었고, 계집을 품는 것 또한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단을 떠나지 않았던 것은 불안한 미래 때문이었다.

자리를 비웠다가 자칫 셋째인 무언공자에게 후계자 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기에 갑갑하지만 견뎌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부친으로부터 강호를 돌아보라는 권유가 있었다.

물론 처음엔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그 이유로 무공과 학문을 더 닦아야 한다는 핑계를 댔다. 그러다가 강호행을 결심한 것은 은근한 암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철룡화존이 말하길 자고로 가업(家業)은 장남이 이어받는 것이 마땅하다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웃는 낯으로 어깨를 다독였었다. 그래서 안심하고 강호로 나온 것이다.

아무튼 총단에 도착한 이후 철기린은 자신의 애마가 될 비룡에 얽힌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철마당의 노련한 조련사들도 손을 내저을 정도로 거친 말이었는데 아직 어린 소년인 이회옥에 의하여 길들여졌다는 것이 그것이다.

드넓은 무림천자성이었지만 워낙 특이한 일이었기에 그것이 화제에 올랐던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회옥 역시 철기린을 본 적이 있었다. 요즘 무림천자성의 모든 이목은 그에게 쏠려 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긴 장차 전 무림을 호령할 사람이니 관심이 없다면 이상할 것이다.

그것은 이회옥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틈만 나면 그가 지나는 길목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즉각 알아본 것이다.

"호오! 이놈이 비룡이라고?"
"그렇습니다."
"으음! 좋군. 정말 좋아."

철기린은 비룡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부모를 잘 둔 덕에 지금껏 온갖 호의호식을 다 누리면서 좋다는 것들을 모두 보아왔다.

술을 마셔도 금존청(金尊淸)처럼 최고급으로만 마셨고, 음식을 먹을 땐 입안에서 살살 녹는 것이 아니면 먹지를 않았다. 걸치고 있는 의복 또한 최고급 비단으로 만든 것만 걸쳤다.

사용하는 물건들도 마찬가지이다. 거처인 기린각(麒麟閣)에 있는 집기들은 단 하나도 예사로운 것이 없었다. 황궁에서 사용하는 것보다 좋으면 좋았지 못한 것이 없었던 것이다.

누구나 흔히 사용하는 지필묵(紙筆墨)만 해도 그렇다. 보통의 먹[墨]은 한 동(굵게 묶어서 한 덩어리로 만든 묶음, 먹은 10 장)에 은자 두 냥 정도 한다.

중원의 서생들 대부분이 이것을 사용한다. 그런데 철기린이 사용하는 먹은 한 장에 은자 이십 냥 짜리였다. 그렇다면 한 동의 가격이 무려 은자 이백 냥이나 하는 것이다. 보통 먹에 비하여 무려 백 배나 비싼 것을 사용하는 것이다.

먹이란 그을음[연매(煉煤)]을 긁어모아 만드는 것으로, 소나무를 태운 송연(松煙)에서 그을음을 취하는 송연묵과, 채종유(菜種油), 참기름(胡麻油), 비자기름(榧油), 오동기름(桐油) 등을 태운 연기에서 취하는 유연묵(油煙墨) 이렇게 두 가지가 있다.

아궁이나 가마[窯]를 마련하여 놓고 재료를 태우면 그을음이 굴뚝에 붙게된다. 그 가운데 위쪽에 모이는 것일수록 상제(上劑)라 하여 품질이 좋다고 한다.

당묵(唐墨)의 머리 윗면에 정연(頂煙) 혹은 초정연(超頂煙)이라고 표시해 놓은 것은 사용한 연매가 상품 양질이라는 뜻이다. 특히 공연(貢煙)이라고 표시한 것은 최상품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황궁으로 진상되는 먹이다.

먹을 만들려면 그을음을 긁어모은 뒤 아주 가는 체로 친 후 아교로 개어 반죽하고는 절구에 넣어 충분히 다진다. 다음에 이것을 목형(木型)에 넣고 압착한 다음, 꺼내어 재 속에 묻어 차차 수분을 빼며 말린 것이 바로 먹이다.

묵명(墨銘)에 십만저(十萬杵) 또는 목구철저삼만(木臼鐵杵三萬)이라고 쓰인 것은 그 숫자만큼 찧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철기린이 사용하는 먹은 무려 백만 번이나 찧은 것이다. 그렇기에 보통 먹에 비하여 백 배나 비싼 것이다.

그가 사용하는 붓은 백호필(白虎筆)이라는 것으로 흔히 사용하는 붓에 비하여 그 가격이 무려 일천 배나 비싼 것이다.

중원의 산에는 호랑이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다. 하지만 백호는 결코 흔한 짐승이 아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신령스런 짐승으로 여겨 영물(靈物)이라고도 불렀다. 그런 백호 숫놈의 생식기 부근에 있는 털만을 뽑아 만든 것이 바로 백호필이다. 한 마리 당 오직 하나밖에 만들어지지 않으니 얼마나 비싸겠는가!

말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껏 타고 다니던 말도 결코 나쁜 말이 아니다. 멀리 대식국(大食國)까지 가서 어렵게 구해온 것이다.

보통 말이 은자 이백 냥일 때 그것은 이천 냥이었다. 이것만해도 무려 열 배나 비싼 것이다.

그가 사용하는 다른 물건들은 보통이 백 배인데 불과 열 배 비싼 말을 탄 것은 더 좋고, 더 비싼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철기린이 지금껏 타던 말과 비룡은 아예 비교가 되지 않았다.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것이 비룡이 앞서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철기린이 연신 만족에 찬 웃음과 함께 감탄사를 터뜨리면서 갈기를 쓰다듬고 있었던 것이다.

"핫핫핫! 정말 마음에 든다. 당장 안장을 얹어라. 이놈이 얼마나 쓸만한지 한번 타 봐야겠다."
"안 됩니다."
"뭐라고? 방금 무어라 하였느냐? 안 된다고 하였느냐?"

철기린은 어이가 없었다. 무림천자성은 물론 무림을 비롯한 그 어떤 곳에서도 자신에게 대놓고 안 된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넷 뿐이다.

부친이자 무림천자성주인 철룡화존과 부성주인 인의수사 채니, 그리고 금릉 무천장의 장주인 약영혈돈 천일평, 마지막으로 수석호법인 무영혈편 조경지가 전부이다.

그 외의 호법들과 십이 장로, 그리고 팔대 당주도 자신과는 감히 시선조차 마주치지 못한다. 따라서 일반 무천장주들과 정의수호대원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들에게 죽으라고 하면 아마 죽는시늉까지는 할 것이다. 그런데 한낱 말 조련사 따위가 면전에서 안 된다고 하자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습니다. 안 됩니다."
"뭐야? 네놈이 감히 본좌에게…?"

"소성주님! 소생의 말 좀 들어 보십시오. 지금은 마구간과 바깥은 온도차가 너무 큽니다. 사람도 더운데 있다가 갑자기 추운 데로 가면 자칫 감기에 걸리기 십상입니다.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안 된다고 한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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