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99

빛나는 대머리 독두환(禿頭煥) (4)

등록 2003.04.08 14:00수정 2003.04.08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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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태극목장에서 조련사로서의 처음 수업을 받을 때 일찌감치 제일목부 자리에 앉은 부친은 이렇게 말하였다.

"옥아, 타고난 조련사라면 어떤 말이라도 경계심을 느끼지 않게 하는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난단다. 네가 아직 어려 그런 자질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없다 하더라도 실망하지 마라. 노력하면 되니까. 그런 의미에서 오늘부터는 마구간에서 자도록 해라."


이 이야기를 들은 것이 일곱살 때였다. 이후 제대로 된 잠자리에서 잠을 자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하나뿐인 아들을 너무 홀대하는 것 아니냐면서 투정을 했었다. 하지만 이런 투정도 잠시였다. 모친으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부친인 이정기가 제일목부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나이 아홉에 태극목장에 몸담은 이후 혼례를 올릴 때까지 한번도 제대로 된 침상에 누워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린 이회옥에게 있어 부친 이정기는 본받고 싶은 표상이자 극복할 대상이었다. 다시 말해 부친에게 배우되 부친보다도 뛰어난 목부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 아무리 잠자리가 불편해도 마구간을 떠나지 않았다.

태극목장 마구간은 백여 마리가 한꺼번에 들어 있는 큰 마구간들이다. 따라서 이회옥은 한 마리 한 마리를 살필 수 없었으나 말들은 달랐다. 사람이라곤 이회옥과 장일정뿐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말들은 이회옥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마구간을 두루 살핀 뒤 암수 한 쌍을 골라냈다. 다음 날 이회옥은 백여 명에 달하는 정의수호대원들의 엄중한 호위를 받으면서 선무곡으로 향하였다. 전에는 지옥거에 탄 채 정의수호대원들의 호위를 받았으나 이번엔 달랐다.

선무분타의 분타주와 대등한 신분인 순찰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제왕비를 지니고 있다는 이유하나가 빚은 결과였다.


* * *

"핫핫핫! 이제 다 왔다. 여기가 천뢰도다."
"우웩! 우웩!"
"우웩! 우웩! 우웩!"

반광노조 형운악이 능숙한 솜씨로 배를 대는 동안에도 장일정과 호옥접은 난간을 붙잡고 토악질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죽음의 섬 천뢰도는 과연 절지(絶地)라 불릴만하였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격한 파도와 와류는 철판을 두른 철갑선이라 할지라도 단숨에 부서트릴 수 있을 정도로 거셌다.

과연 제아무리 조타술에 뛰어난 뱃사람이라 할지라도 공포에 떨 만큼 악명 높은 죽음의 마역(魔域)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반광노조의 솜씨 역시 만만치 않았다.

바다를 생업으로 삼고 있는 뱃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삼각파도이다. 이것은 바다에서 국지적으로 발생되는 돌풍 등으로 인해 진행 방향이 다른 두 파도가 동시에 일어나는 것으로 삼각파도가 일면 뱃머리를 어느 파도 쪽으로 향할지 모르게 된다.

한쪽 파도를 타면 다른 파도가 배의 측면에 부딪쳐 배가 전복되거나 부서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을 만나면 백이면 아흔 아홉은 침몰하고 만다.

상해(上海)에서 배를 타고 숭명도(崇明島)를 지나 동쪽으로 오십여 리를 가는 마역에서 수없이 많은 삼각파도와 와류를 만났지만 반광노조는 유유하게 이를 지나쳤던 것이다.

하지만 파도에 익숙하지 않은 장일정과 호옥접에게 있어 그것은 가히 지옥과 같은 항해였다.

뱃머리가 번쩍 들리는가 싶으면 어느새 선미(船尾)가 허공에 떠 있었다. 충고를 받아들여 선실에 있었기에 망정이지 갑판에 있었다면 벌써 망망대해에 내던져졌을 것이다.

그것도 선실 복판에 있는 기둥에 몸을 묶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만일 그냥 있었다면 온몸에 타박상을 입었을 것이다. 아무튼 둘은 더 이상 토할 것도 없건만 얼굴이 노랗게 되도록 토악질을 하였다.

"빨리 상륙하지 않으면 언제부터 천둥번개가 칠지 모르네. 그러니 어서 올라가세!"
"웩웩! 우웩! 헉헉! 아, 알았어요. 웩웩!"
"허억! 허억! 우욱! 웩! 우우욱! 웩웩! 헉헉!"

반광노조가 배를 정박시키는 동안 힘겹게 내린 둘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백사장을 가로질렀다. 그런 그들의 뒤를 따르던 반광노조가 다시 주의를 주었다.

"이보게, 주의하게 수풀 속에 뱀이 많네. 어서 그것을…"
"우욱! 아, 알았어요."

장일정은 품에 있던 생사잠을 꺼내들었다. 그러자 바람도 없건만 주변의 수풀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일각사왕의 뿔 때문에 황급히 도주하는 것이다. 반광노조의 말대로 천뢰도에는 엄청나게 많은 뱀들이 서식하는 모양이었다.

조심조심 수풀을 헤치고 들어가기 시작한지 만 하루가 지났을 무렵 사방이 바위로 둘러진 커다란 연못을 만날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같은 연못이건만 물빛이 무려 다섯 가지나 되었다.

"어머나! 세상에…"

호옥접은 천생이 여자이긴 여자인 모양이었다. 이곳이 천뢰도이고, 주변에 수 없이 많은 뱀들이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감탄사를 터뜨리면서 연못가로 다가서고 있었던 것이다.

"멈추게! 더 이상 가면 위험하네. 잊었는가? 여기가 바로 뇌정(雷井)이네. 만년뇌혈곤이 살지. 설마 산채로 놈의 먹이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니겠지?"
"예에…? 사, 사람을 잡아먹나요?"

"그렇네. 물에 그림자만 비쳐도 놈이 나타날 것이네. 어마어마하게 큰놈인지라 자네 정도면 한 입 거리도 안 될 것이네."
"아, 알았어요."

호옥접이 황급히 물러설 때 반광노조는 능숙한 솜씨로 등뒤에 있던 봇짐을 풀어 배렸다.

잠시 후 그가 꺼내든 것은 시커먼 빛을 발하는 낚싯대였다. 용(龍)도 낚아 올릴 수 있다는 조룡간(釣龍竿)이었다.

반들반들하게 윤이 나는 그것은 천지간에 극히 드문 묵오죽(墨烏竹)으로 만든 것이라 하였다. 설명대로라면 그것의 탄성은 이 세상 어떤 낚싯대보다도 더 뛰어난 것이다. 따라서 제아무리 육중한 놈이라 하더라도 능히 끌어올릴 수 있다 하였다.

낚싯대에 달려 있는 낚싯줄은 만년뇌혈곤을 낚기 위하여 어렵게 구한 고래의 힘줄이었다. 한 가닥으로는 부족하다면서 무려 세 가닥을 꼬아서 만들었다. 그래서 상해를 떠나기 전 백 명이나 되는 어부들이 달려들어 잡아 당겨봤지만 끊지 못한 것이었다.

능숙한 솜씨로 모든 채비를 마친 반광노조는 심각한 표정으로 뇌정 주변을 돌아다녔다. 어디가 낚기 좋은지 찾으려는 것이다.


오래 전, 아들인 형윤회가 격랑에 휩쓸려 실종된 후 반광노조는 천뢰도에 온 적이 있었다. 이 부근에서 실종되었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상륙했던 것이다.

그때 그는 뇌정에서 솟구치는 어마어마하게 큰 괴물을 보았다. 온몸이 핏빛인 그것은 작렬하는 뇌전을 마중하기라도 하는 듯 자꾸 자꾸 수면 위로 솟구쳤다. 그것은 분명 전설처럼 전해지는 만년뇌혈곤이었다. 아무리 안 낚아본 고기가 없다는 반광노조였지만 그때만은 겁에 질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바다에 사는 물고기 중 가장 큰 것이 고래이다. 큰 것은 길이가 칠 장이 넘는 것들도 있다. 그런데 괴물의 길이는 그것보다도 더 길어 보였다. 몸통 둘레 역시 대단하였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길이는 십여 장, 둘레는 사 장이 넘어 보였다. 한 마디로 괴물이었다. 그때 반광노조는 평생 낚시질로 잔뼈가 굵은 그였지만 잡을 생각은 아예 해보지도 않고 슬그머니 도망쳤다. 거꾸로 잡혀 먹힐 것만 같았던 것이다.


장일정과 호옥접이 자신의 배를 훔치려는 것으로 오인하고 그를 끌고 간 반광노조는 반쯤 미쳐있는 상황이었다.

사람들은 아들을 잃은 슬픔 때문에 그런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장일정의 눈에는 달랐다. 무언가에 중독되었는데 그것이 뇌를 침범하여 그렇다는 것을 깨닫고 생사잠을 꺼내보았다.

과연 예상대로였다. 생사잠을 꺼냄과 동시에 반광노조의 귀에서 지렁이 같은 것이 나오는가 싶더니 쏜살처럼 사라졌다. 그것은 바다에서만 사는 일종의 독사였다. 배 밑창을 수리하러 물 속에 들어갔을 때 귀로 들어간 것이다.

제정신이 돌아온 반광노조는 장일정의 설명을 듣고는 그를 풀어 주었다. 스스로도 자신이 미쳐가고 있다 생각했었는데 구해주었으니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때 장일정은 천뢰도와 만년뇌혈곤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면서 왜 잡아야 하는지 이야기하면서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반광노조는 펄쩍 뛰었다. 한두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잡을 수 없는 것을 잡자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고래를 잡으려 해도 적어도 이십여 명이 필요하다. 하물며 고래보다도 더 큰놈을, 그것도 뇌성벽력이 진동하는 천뢰도에서 잡자는 데 어찌 펄쩍 뛰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장일정은 끈질기게 설득하였다. 결국 반광노조는 일단 시도는 해보기로 하였다. 뇌정에 산공독을 풀면 설사 만년뇌혈곤이라 할지라도 힘을 못 쓸 것이라는 설득에 넘어간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였다. 천뢰도까지 가려면 철갑선이 있어야 한다. 다행히도 그것은 영화객잔의 장방이 구해주었으나 같이 갈 선원을 구할 수 없었다.

뇌정에 괴물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은자를 아무리 많이 준다고 해도 사람들은 모두 도망쳤다. 결국 장일정과 호옥접은 그리고 반광노조는 철갑선을 포기하였다. 그래서 셋만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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