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과 관련이 있는 건물에 경교장과 현 4.19기념도서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충무로2가 65-4번지를 찾아가면 쓸쓸한 봄을 보게 된다. 이후 신도호텔로 이름이 바뀌고 현재 신한은행 충무로지점이 들어서 있다.권기봉
그러나 우리 주위에 이날을 알고 있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지에 이르러서는 회의적이다. 오히려 임정 수립기념일이라는 것이 임정 요인의 후손이나 정부의 행사 담당자 정도에게나 의미 있는 날로 치부되고 있지는 않을까. 4.19혁명 기념일이나 8.15광복절은 그나마 날짜에서 기념일 이름을 쉽게 연상할 수 있지만 임정 기념일의 사정은 그렇지 않다.
'쥐도 새도 모르게' 환국한 임정
그런데 지금에 비해 막 해방을 맞던 1945년 당시에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국내의 정정(政情)이 불안한 상황에서 '임정 봉대론(奉待論)'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임정에 거는 기대가 남달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대와는 달리 정작 이들의 환국(還國)은 말 그대로 '쥐도 새도 모르게' 이루어졌던 것이 사실이다.
대한민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100여일이 지난 1945년 11월 23일, 대륙을 유랑하던 임정 요인 제1진 15명은 지루한 기다림과 우여곡절 끝에 환국한다. 그러나 당시 이 소식을 알고 있는 이는 임정 환국 준비를 위해 구성된 '임시정부 환국 환영준비위원회'는 물론 서울 하늘 아래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이 임정 요인 제1진의 환국 사실을 알 수 있던 것은 조선 주둔 미군최고사령관 하지 중장의 "오늘 오후 김구(金九) 선생 일행 15명이 서울에 도착하였다. 오랫동안 망명하였던 애국자 김구 선생은 개인의 자격으로 서울에 돌아온 것이다"라는 성명을 통해서였다.
물론 이는 임정 요인들이 이미 경교장(京橋莊)에 도착한 이후였고 꽃다발을 든 환영 인파나 카 퍼레이드 등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개인의 자격으로' 환국해 하지 중장의 성명을 통해 임정의 존재가 발표된 것도 의아하지만, 정작 임정이 어떻게 서울에 들어올 수 있었는지를 따라가 보면 더욱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임정 환국 환영준비위원회에서 개최한 ‘임시정부 환국 봉영회(奉迎會)’ 식장에서 백범 김구가 연설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임정은 뜻을 펴지 못했다.권기봉
이를 위해 장준하(張俊河)의 <돌베개>(세계사, 2001)를 보자. 임정 주석 김구의 수행원 자격으로 제1진과 함께 조국 땅을 밟은 장준하는 1971년 자신의 일본군 병영 탈출과 임정 참여, 환국 후의 국내 상황 등을 담은 자서전 <돌베개>를 출간한다. 그는 미군 수송기를 타고 김포비행장을 통해 입국, 밖이 잘 보이지도 않는 장갑차량을 타고 서울로 '호송'되던 당시 상황을 떠올리고 있다.
"일행이 한 사람씩 내렸을 때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미군 GI(필자 주: '미군'을 의미)들뿐이었다." (339쪽)
"나부끼는 태극기, 환성의 환영, 그 목 아프게 불러줄 만세소리는 환상으로 저만치 물러나 있고 거무푸레한 김포의 하오(下午)가 우리를 외면하고 있다." (339쪽)
"탱크처럼 된 장갑차 여섯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GI들이 정렬해 있었고 시무룩하게 우리를 바라보는 표정에 우리들의 시선이 닿자, 우리는 서글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340쪽)
"차창으로 농부가 보였다. 흰옷 입은 백의의 농민이 소를 몰고 길옆으로 비켜섰다. 나는 태극기를 앉은 채로 올려서 그 농민에게 흔들어주었다. 그러나 이것도 제지당하고 말았다." (340쪽)
"아무라도, 맨 먼저 만나는 농부에게라도, 맞붙잡고 실컷 울고 싶건만, 그러나 우리는 미군의 작전대상물로 장갑차에 실려 가고 있다." (340쪽)
지루한 인용의 남발로 읽힐지는 모르지만 장준하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제1진의 환국 상황을 마무리 짓는다.
▲대한민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1백여 일이 1945년 11월 23일, 대륙을 유랑하던 임정 요인 제1진 15명이 환국한다. 그러나 하지 중장의 성명이 있기 전까지 이들의 환국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권기봉
"소를 앞세우고 무심코 길을 비키는 농부, 그 농부는 아마 미군용차가 많이 지나가는구나, 이렇게 혼자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 행렬 속에 김구 주석이, 삼천만의 희망이며 혁명투사인 민족의 지도자가 들어 있는 줄은 생각도 못하리라. 안타까움이 농부의 표정을 일그러지게 만든다. 내가 그렇게 보는 것이다. 이 답답한 노릇이 조국의 운명을 끝까지 기막히게 할 줄은 미처 몰랐다." (341쪽)
그런데 여기서 잠깐. 제1진 15명에 이어 제2진으로 신익희(申翼熙) 등 19명이 같은 해 12월 2일 옥구비행장을 통해 환국한다. 삭풍이 부는 12월, 활주로에 내린 이들 앞에 놓인 차는 그나마 사방이 꽁꽁 막혀 바람이라도 막아줄 장갑차량도 아니고, 먼지와 바람을 그대로 통과시키는 군용 트럭이었다. 이들의 비참한 환국 풍경을 보노라면 오히려 제1진의 처지가 너무나 품격 있게 느껴질 정도다.
"모두들 손발과 뺨살이 얼어 얼얼했고 눈썹과 머리엔 흙먼지가 뽀얗게 얹혔으며, 트럭이 흔들릴 때마다 앞뒤좌우로 시달린 이분들은 모두 차를 내려서 손발을 녹이고 있었다." (400쪽)
"논산에 닿은 것은 밤이 어두워서였다. 트럭으로 몰려오는 바람을 다 안고 달려서 읍내의 한 여관에 겨우 몸을 눕힌 것이 10시. 먼지투성이의 한 무리들이 미군 트럭에서 내려 망측스런 꼴을 하고 들어섰을 때 그 여관의 주인이나 사동들도 조금도 이들의 신분을 상상도 못했으리라. 이들은 아무 말도 않고 하룻밤만 묵고 가기로 했다. 이렇게 하여 환국 제2진의 제1야는, 한 이름 없는 작은 여관방에서 지냈다." (400~401쪽)
▲임정은 잊혀졌다. 한미호텔도 기억에서 사라졌다. 지금 남은 것은 무엇일까?권기봉
왜 머나먼 곳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이 깃발과 함께 환호하는 인파는커녕 이렇게 비밀리에, 그것도 서글프다 못해 비참한 모습을 보이며 '개인의 자격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을까? 쉬우면서도 간단치 않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독자들의 상상에 맡긴다.
번화가 명동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없었다
제1진으로 환국한 김구와 김규식(金奎植), 이시영(李始榮) 등 15명과 제2진으로 환국한 조소앙(趙素昻)과 김원봉(金元鳳) 등 19명, 일단 1945년 12월까지 환국한 이들은 모두 34명이었다. 그런데 수십 년간 고국을 떠나 있었던지라 갑작스런 환국에 이들이 머무를 곳을 찾는 일이 급선무였다.
이들의 숙소를 구해준 것은 제1진의 환국도 하지 중장의 성명을 통해서나 알 수 있었던 '임시정부 환국 환영준비위원회'였다. 일제 당시'광산왕'이란 별명을 얻을 만큼 대부호였던 최창학(崔昌學)이 자신의 친일 경력을 희석시킬 목적으로 기부한 경교장과 그 근처에 있던 현 4.19기념도서관 터의 건물, 마지막으로 충무로2가에 있던 한미호텔 등 모두 세 군데를 임정 요인들의 숙소로 이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경교장은 김구가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을 당한 장소이자 겉모습만은 지금도 남아 있어 적지 않은 이들이 그 존재를 알고 있고, 4.19기념도서관도 이기붕의 집이 있던 자리이기에 그 자리만큼은 그리 낯설지가 않다.
| | ‘한미호텔’ 터 찾아가는 방법 | | | 번화가 명동으로 떠나자! | | | | 지하철 4호선 명동역에서 내려 8번 출구로 나간다. 그럼 바로 출구 밖에 24시간 편의점 ‘미니스탑’이 보이며 그 오른쪽으로 골목이 하나 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명례방길’이다. 그리로 들어가 1분도 채 지나지 않으면 네거리가 나타나는데, 들어온 골목의 왼쪽에 우두커니 서있는 ‘신한은행’ 건물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환국했을 때 머물렀던 건물 중 하나인 한미호텔이 있었던 자리다. / 권기봉 | | | | | |
그런데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진 기념일답게 관련 유산도 홀대받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유독 세 곳의 숙소 중 하나인 한미호텔만은 그 존재가 묘연했다. 어느 자료를 뒤져보아도 한미호텔이 '충무로에 있었다' 혹은 나아가 '충무로2가 100번지에 있었다'는 말은 있지만 정확히 어디였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충무로2가에는 현재 66번지까지만 있을 뿐 100번지라는 지번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기록이 아닌 기억에 의존해야 하는 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