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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지(寸志)
산간벽지 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느라 애쓰신 선생님이 주말을 잠시 이용해 덜컹거리는 비포장 도로를 서너 시간 똥차 타고 도시에 나가 밑반찬부터 싸 날라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땐 학부모가 직접 농사지은 푸성귀를 선생과 나눠 먹는 것은 미풍양속에 가까웠다. 새 김치 한 종지 갖다드리고 상추, 배추 한 두 포기에 양념된장 갖다 드렸으니 선생님과 학부모는 이웃이었다. 누가 감히 이걸 문제 삼을 수 있었겠는가?
오랜 옛날에도 책 한 권 다 읽거나 베끼면 '책거리'를 하는데 동료와 스승에게 음식 한 상을 걸게 냈던 유례가 있는 점으로 보아 촌지가 사회 문제가 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근래 20여 년쯤부터 촌지(寸志)와 치맛바람으로 심한 속앓이를 했고 요즘도 암암리에 뒷거래가 되고 있다하니 이를 어쩔거나. 초등학교 저학년과 고3 담임을 맡으면 2년 내에 집사고 중형차를 산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얘기다.
단지 옛날과 비교해서 주는 내용물이 다르고, 단위가 달라졌으며, 기대치가 달라졌다는 점이다. 이젠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공범이라는데 사회적 합의가 이뤄졌고 교사 집단 자체 정화 운동이 한창 벌어졌던 적도 있다. 치맛바람과 촌지(寸志)는 한통속이다. 왠지 너무 조용하게 간다 싶어 곧 안 좋은 소식이 들려올 것 같은 폭풍전야 같은 분위기다.
계란 한 줄로 시작된 촌지
내 눈에 비친 첫 촌지는 계란 한 줄이었다. 집에서 놓아기른 토종닭이 낳은 자그마한 달걀은 붉으스름 해서 보기에도 좋았다. 어른들은 지푸라기로 달걀 10개를 예쁘게 포장해서 학교 가는 아이 손에 들려 공공연히 선생님께 갖다 드리라 하셨다. 그러면 대개 "'다음 부턴 절대 이런 걸 보내시면 안된다'고 어머님께 말씀드려라"하시며 돌려보내는 분도 있고, 아무 말 없이 받아주시는 분도 있었다.
돌려보내려고 하면 꾀 있는 아이들은 "선생님, 앞으로는 절대 안보낸다고 했어라우~" 하면 마지못해 받으시기도 했다. 달걀 장사할 것 아니고 그래봐야 일년에 너덧 명이 갖다 줬을 뿐이니 재산축적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다음이 채반에 먹을 걸 잔뜩 장만해 가지고 와서 놓고 가는 것이었다. 차차 커져서 닭으로 바뀌었다. 염소나 개를 잡아 양탕, 보신탕을 끓여 집으로 선생님을 몰래 불러와서 먹게 하였다. 추어탕을 끓여 술 한잔 대접하기도 했다. 그래도 얼마나 정겨운 모습인가?
직접 친 한봉 꿀 한 되를 잘 짜서 몰래 놓고 가기도 했으니 시골 선생님들은 못 먹어본 것 없었고 그 고장 특산품 한 번 입에 대보는 것도 즐거움 중 하나였을 것이다. 천 원 짜리 몇 장 넣어 답례를 하는 분도 서서히 나타났다.
알만한 애들은 다 아는 일
운동회 날이든 소풍 때든 어김없이 나타나는 아주머니를 심심찮게 보아서 그런지 30여 명이 6년을 한 교실에서 같이 지냈던 우리는 '누구누구 엄마가 와서 선생님께 뭘 줬다', '그 애 엄마는 선생님과 친하다', '저렇게 한가할 걸 보니 걔 엄니는 농사지을 것도 없는가 보다'라고 입방아를 찧었고, 심한 경우 '거시기 엄마랑 울 선생이랑 연애하는 거 아닐까?'하는 진한 농담을 일삼는 아이도 있었으니 얼마나 무던히도 드나들었으면 그런 말이 나왔을까?
"야, 거시기 엄마 또 왔다 갔담서?"
"응."
"근데 뭣 갖고 왔다냐?"
"그냥 어디 갔다 옴시롱 들렀다 간 것이 것제…. 잘 차려입고 분 바르고 왔드만…."
"아냐 임마, 니가 잘못 봤어. 걔 엄마가 빈골로 올 사람이냐? 아까 내가 선생님 댁에 갔을 때 씨암탉 한 마리가 묶여있고 음식이 잔뜩 있더라."
"뭐야? 그 집 대게 부잔가보다 잉?"
"부자야? 조선팔도 부자 다 죽었는갑다 임마."
그렇게 공을 들여 드나드는 아주머니 애들이 공부를 더 잘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한 번의 헛디딤이 그 관계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게 하는 게 몇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몇 년을 드나들다 갑자기 발길을 끊으면 아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고, 그나마 그 정도도 못하면 정말 사람구실 못 할 것이라 생각하는 게 부모다. 이쁘고 똑똑하기는 내 자식이 세상에 최고지만 말이다. 매너리즘과 유혹과 아들사랑의 삼각관계의 절묘한 조화라고나 할까.
소풍과 운동회는 공공연한 자리, 논밭 파는 사람도 생겨...
소풍과 운동회 때는 네 마을에서 돌아가며 음식을 장만해 왔다. 아저씨 한 분이 바지게에 쌓아 지고 오는 것도 모자라 어머니들 양손에도 가득 들려 있다. 그래도 곱게 한복을 차려 입고 열댓 명이서 같이 음식 준비하고 선생님들을 위로하는 모습은 어린 내 눈에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풍경이었다.
봄·가을 소풍가는 날이면 어머니께서는 200원을 따로 챙겨주시며 선생님께 담배 두 갑을 사다드리라고 했다. 그 때 내가 사간 담배는 '개나리'였는데 시골 어른들은 '봉초(封草)'를 말아서 피거나 '새마을'을 피우던 시절이라 최고급품에 속하던 것이었다. 그 후로 '화랑', '거북선'을 사다 드렸다.
아줌마들끼리의 경쟁도 치열했다. 한 아이의 어머니가 다녀가면 며칠 안 되어 다른 아이 엄마가 다녀갔다. 그 덕에 선생님 댁 청소를 하러 갔다가 집에서 평소 먹어보지 못한 젊은 아줌마들의 음식 솜씨를 품평하는 경지에까지 오르게 되었으니 나는 행운아였다.
친인척 관계에 있던 한 아이의 어머니는 머리에 가득 이기도 힘들게 한 달이 멀다하고 그런 일을 해대니 시골 살림살이가 거덜나 가계가 기우는 건 시간 문제였다. 어림잡아 4~5년은 내게 그리 들켰으니 나중에 들리기로 논 열 마지기는 팔아먹었다는 거다.
여동생과 아버지 그리고 술친구
그렇다고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학생수가 급격히 줄어 폐교 위기에 내몰린 전남 화순 북면동국민학교는 6살부터 취학을 독려했다. 부작용이 대단했다. 막내딸인 동생이 속을 썩이기 시작했다. 여섯 살부터 3년 째 입학을 거듭하는 통에 집에서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나보다 다섯 살 아래라 아침마다 데리고 다니는 일이 못할 일이라는 결론을 내린 적도 있었다. 내 공부에 지장이 있을 지경이었다. 교문 근처 100m 근처에 가서 학교가 보이면 '뗑깡'을 부리고 한 발짝을 움직이지 않았다. 동생을 땅 바닥에 내동댕이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르고 달래고 간혹 패서 질질 끌고 교실까지 간당간당한 시각에 데려가면 한시간이 안되어 집으로 도망 오고 말았는데 그 선생님이 3년 째 아이를 입학시키는 1학년 담임 선생님을 맡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선생님은 약주 좋아하시는 아버지와 경오생(庚午年) 갑장이었다. 학교 담벼락과 가까운 곳에 서마지기 논을 산지가 2년밖에 안되었으므로 논을 둘러보신다는 핑계로 매일 오후 서너 시면 동네 주막을 두고 그리 출근부를 찍었으니 두 분 간에 술친구로서는 원 없는 시기였다.
두 분이 만나면, "딸 아이 좀 잘 부탁함세…."로 시작하여 "자네 집에 밑술 안 담갔는가? 내일 내가 감세."하며 맞장 뜨고, 주막에서 시작하여 관사에서 거나하신 분들이 논둑 길을 가로질러 집으로 오시곤 했다.
곧바로 500미터밖에 안된 거리에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 운동' 하면서 신작로라고 내 놓은 곳이 1500미터나 되게 만들었으니 그 먼 거리를 가로질러 다니셨던 것은 당연했다. 때 맞춰 밀주(密酒) 감사(監査)도 뜸하던 때라 집에 담가둔 술이 익으면 먼저 맑은 청주(淸酒)마시고, 동동주 들들 뜨게해서 드시고, 탁주(濁酒) 걸러 즐기셨으니 양(兩) 김삿갓이 따로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런 내 아버지, 홀로 되신 당신께서 고등학교 3학년 때 먼길을 마다 않고 두 번이나 찾아 오셔서 담임 선생님과 막걸리를 드신 걸 보았다. 지금 생각하면 참 대단하신 분이다. 한 푼 찔러 줄 돈도 없으셨던 분이 3학년 선생을 대낮에 찾아오시다니. 언제고 선생님께 우리 아버지 차비 드렸느냐고 여쭤 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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