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복숭아꽃김규환
집안일이 학업보다 중요했던 시절, 학교로 도망을 치다
그 시절에는 보리를 베어 타맥(打麥)을 하고 곧바로 논을 갈아 모를 쪄 모내기를 하는 2모작 경작이라 애 어른 할 것 없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이 때가 일 년 중 가장 바쁜 철이다.
어른은 허리 한 번 펴기 힘들었다. 새벽 4시에 해보다 일찍 일어나서 이슬 밟으며 논으로 나가서 밤 9시가 넘어 달을 머리에 이고 집으로 돌아가는 게 농사다. 이런 삶의 반복이 최소 스무 날 이상 이어진다.
중학교 간 이후 '농번기 방학'이 있던 초등학교 때와는 형편이 달라졌다. 따로 농번기 방학을 주지 않고 30여 마을을 돌아가며 보리를 베러 가는 터에 집에서는 난리법석이었다. 정작 바쁜 곳은 천수답(泉水畓)이 많은 우리 동네 인근 골안 7동(洞)인데 마을과 농지 규모가 작다고 한 번도 아이들을 내 주지도 않고 다른 구역으로만 배치했으니 어른에겐 죽을 노릇이었다.
당연지사 열에 세 명은 집을 빠져 나오지 못하고 일주일 넘게 붙잡혀 집안 일을 거들었으니 개근상 받기는 다 틀렸다. 나에게도 어른의 불호령이 떨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 집만 일요일에 따로 날을 잡아 모내기를 할 수도 없는 처지다. 품앗이로 농사 짓는 때라 그런 황금같은 날에 천신이 돌아온다는 것은 하늘에 별 따기나 다름없었다. 모가 웃자라면 제 구실을 못하므로 여러 정황을 살펴 모내기 날을 잡고 저녁 밥상 앞에서 한 말씀하신다.
"규환아, 낼 집안일 거들어라와~"
"예?"
"뭔 대답이 그리 신통치 못혀?"
"학교 가야한디라우~"
"낼은 모심어야됭께 학교가지 말고 모쟁이 해야한당께!"
"예…."
"긍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쇠죽 쒀놓고 소쟁이 논으로 나가봐…."
"알았당께요."
저녁 먹으면서 했던 대화는 대화가 아니었다. 명령이 떨어지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리 몽뎅이 부러질 일이었다. 아무 말 않고 아침이 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여느 날과 같이 아침이 시작되었다. 아침 먹을 때까지는 아무렇지 않은 듯 협력한다.
이윽고 못 줄 챙기고 소여물 주고, 스무 명이 먹을 오전 새꺼리(새참) 준비하느라 바쁜 틈을 타 담박에 학교로 줄달음을 쳐 도망쳐버리니 바쁜 통에 나를 잡으러 오실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동네만 빠져나가면 그만이었다. 저녁에 와도 이미 상황은 종료가 되었으니 뭐라 하시겠는가? 힘든 일을 하시면서도 공부 열심히 하겠다는 아들이 대견스럽기도 하셨을 것이다.
초등학생이었던 동생은 밥 바구리(바구니의 방언) 나르는 일과 막걸리 받아오고 물 길러 나르는데 요긴하게 쓰였다. 초등학교 5~6학년 이상은 어른과 똑 같은 일을 했다. 남자들은 아이 보는 일에 쓰기에는 당시에 일손도 달리고 힘도 어른과 다를 바 없었으므로 지게에 발채를 얹어 모를 바지게에 지고 '장가가기 힘들다'는 '모쟁이'를 해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