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은동 왕산 생가 터에서 필자. 항일 명문 집이 주춧돌마저 찾아볼 수 없도록 폐허가 되고, 뒷뜰 대나무만 몇 그루 남아 있었다. 필자가 관계기관에 이를 지적해도 마이동풍이다. 이 땅에는 아직 정의도 진리도 없다. 오직 천민자본주의만 있을 뿐이다. '선비의 고장' '충절의 고장'이란 말이 몹시 부끄럽다.박도
중국에서 귀국 후 어느 날 이화대학 도서관에서 참고 도서를 찾던 중,<한국독립운동사 연구> 제7집에서 '許亨植 硏究(허형식 연구)'라는 독립기념관 연구사 장세윤씨의 논문이 눈에 번쩍 띄어 단숨에 읽고는 잦아진 허형식 장군에 대한 호기심이 다시 일었다.
수소문 끝에 현재 성균관대학 동아시아연구소 연구 교수로 재직 중인 장세윤 교수를 만났다. 내가 허형식 장군과 동향이라 하자 장 교수는 초면인데도 십 년 지기처럼 맞아주었다. 국내에 처음 허형식 연구를 발표한 장 교수가 허형식을 주목했던 점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항일연군 지도자들이 대부분 북한 출신인데 견주어 남한 출신이다.
둘째, 구한말 의병장 왕산 허위 선생의 당질이다.
셋째, 항일연군에서 정치 이론과 사상, 대원 교육과 전략전술 분야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
넷째, 1940년대 초 최용권 김책 김일성 등과 거의 대등한 고위 간부로 활동했다.
다섯째, 1942년 8월 북만주에서 전사할 때까지 항쟁할 만큼 철저한 적극 무장 투쟁론자였다.
특히 장 교수가 허형식 장군을 높이 평가하는 점은 1940년대 초 무렵 다른 항일연군 지도자들이 일제의 극심한 토벌을 피해 소련으로 넘어갔으나, 허형식 장군은 단 한번도 국경을 넘나들지 않고 끝까지 만주의 백성들을 지키다가 토벌군에게 장렬히 전사했다는 사실로, 독립전사의 열정과 순수성에서는 그 누구보다 앞선 지도자라고 했다.
그 후, 나는 장세윤 교수와 허형식 장군의 임은동 생가와 유족들을 탐방하였다. 고향의 생가는 폐허가 된 채 대나무 몇 그루만 자라고 있었고, 임은 허씨 10여 가구 중 허호씨만이 홀로 고향 땅을 지켰다.
만주로 망명했던 왕산 유족들은 러시아 중국 북한 미국 등지로 뿔뿔이 흩어졌다고 했다.
미국에 거주하는 왕산 후손 허도성 목사가 일시 귀국하여 만났더니 임은 허씨 후손들이 그 새 ‘일리야’ ‘부로코피’ ‘슈라’ ‘나타샤’가 되었고, 당신 후손마저도 머잖아 ‘로버트 허’ ‘벤 허’가 될 판이라고 눈시울을 적셨다.